[2023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1.김포다도박물관

경기일보 2023. 10. 12.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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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햇살이 투명한 오후, 박물관 야외 조각공원의 잔디밭 곳곳에 중년의 여성들이 둘러앉아 있다. 바구니에 담긴 보자기를 풀자 하얀 찻잔과 찻주전자가 햇빛에 반짝인다. 한 여성이 익숙한 솜씨로 차를 따른다. 차를 나누며 담소하는 중년 여성들의 모습에서 운치가 느껴진다. 김포시 월곶면에 자리한 김포다도박물관(관장 손민영)에서 마주한 풍경이다. 2001년 개관한 김포다도박물관은 다도를 주제로 설립한 한국 최초의 사립박물관이다.

김포시 월곶면에서 2001년 5월 개관한 다도박물관은 1만여평(3만3천㎡) 부지에 잔디밭과 조각공원 등의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어 가을날씨를 즐기기에 좋다. 박물관 전경. 윤원규기자

■ 김포, 한국 차문화의 성지

‘다반사’라는 말이 있듯이 한국인은 오래전부터 차를 즐겨 마셨다. ‘삼국사기’에 신라 선덕여왕 때부터 차가 있었으며,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김대렴이 귀국하면서 가지고 온 차의 씨앗을 흥덕왕이 지리산에 심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의 대문호 이규보가 손수 차를 볶았다는 흥미로운 기록도 남아 있다. 고려 귀족들이 즐겨 마시던 차는 조선으로 이어진다. 조선의 대학자 점필재 김종직이 하동군수로 재직할 때 차 종자를 구해 차밭을 재배해 임금께 올리는 공물을 충당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왜 김포에 다도박물관이 설립됐을까? 손 관장이 들려주는 사연이 흥미롭다. “김종직 선생님은 차를 무척 즐긴 선비였지요. 점필재의 수제자 한재(寒齋) 이목 선생(1471~1498)이 지은 ‘다부(茶賦)’는 초의선사의 ‘동다송’보다 무려 340년 앞선 것입니다. 동다송보다 분량이 풍부하고 내용도 독창적입니다. 우리 박물관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선생을 기리는 한재사당과 묘소가 있어요. 1976년 사단법인 예명원을 설립해 전통예절과 다도를 교육했어요. 박물관이 필요해 자리를 찾고 있다가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서 김포에 자리를 잡게 된 것입니다.” 김포다도박물관은 사단법인 예명원과 매년 6월 첫째 주 한재당에서 이목 선생께 헌다례를 올린다.

다도란 차를 달여 손님에게 권하거나 마실 때의 예법을 의미한다. 다양한 다기류가 전시돼 있다. 윤원규기자

김포가 우리 차의 성지임이 분명하다. 그런데도 ‘다부’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까닭이 무엇일까? 24세 문과 장원급제한 이목은 일찍부터 임금과 조정의 주목을 받았다. ‘차가운 집’이라는 뜻의 ‘한재’라는 호에서도 느껴지듯 대쪽 같은 선비였다. 이목은 큰 가뭄으로 백성들이 고통을 받을 때 영의정 윤필상을 탐관오리라며 죽이라고 상소를 올려 조정을 놀라게 하고 왕과 당사자의 분노를 사기도 한다. 이목은 연산군 4년(1498년) 유자광, 윤필상 등 훈구파들이 일으킨 ‘무오사화’에 연루돼 죽임을 당한다. 겨우 28세에 세상을 떠났으나 적지 않은 시문을 남겼다. 선조 대에 편찬된 문집이 있지만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하다가 1980년 한국학중앙연구원 유승국 원장에 의해 ‘다부’의 존재가 알려진다.

고려~조선시대 다기류 등 300여점의 유물이 전시되고 있다. 전시실 전경. 윤원규기자

손민영 관장은 인복이 많다며 두 스승을 소개한다, “청사 안광석 선생님과 최근덕 전 성균관 관장님을 스승으로 모시며 가르침을 받은 것은 내게 큰 행운이었지요. 예명원을 설립할 때 도움을 베푼 분들입니다.” 유명 작가들의 작품이 즐비한 조각공원과 팔도의 장독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야외 전시장과 호젓한 정자, 생태 양어장과 거위들이 노니는 아름다운 연못을 갖춘 1만여평의 땅도 후원자가 마련해준 것이다. “포정문화재단 민경덕 이사장님은 다도박물관의 설립부터 운영까지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신 분입니다. 나는 박물관에 전시될 유물만 가지고 왔어요. 이사장님의 두 며느리도 저에게 다도를 배웠어요. 언젠가는 이 제자가 이 박물관을 운영하게 될 것입니다. 박물관의 역사를 이어갈 후계자가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요.” 손 관장의 부모님도 다인(茶人)이었다. “서당 훈장이시던 아버지를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어머니가 차를 만들어 손님께 대접했는데, ‘쓴차’라 불렀지요. 부모님 덕분에 차를 일찍부터 가까이했던 것이 다른 사람들보다 차에 더 깊이 빠지게 된 것 같아요.” 서당 훈장인 아버지를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어머니가 ‘쓴차’를 대접하는 모습을 보며 자란 손 관장에게 운명적인 만남이 있다. 남편은 물론 시댁까지 자신을 지원해 준 것에 깊이 감사하고 있다.

고려~조선시대 다기류 등 300여점의 유물이 전시되고 있다. 전시실 전경. 윤원규기자

■ 보여주고 가르친다

우리 차의 역사와 문화는 풍성하다. 대학에 다도학과가 생길 정도로 관심이 높아졌다. 하지만 우리 차와 예절에 대해 말로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 박물관에서는 관람객과 교육생들에게 우리 차를 어떻게 알려주고 있을까. “다도는 들려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줘야 해요.” 다도를 어떻게 보여준다는 것일까? 48년 다도를 세상에 알린 명인의 교육법이 더욱 궁금해진다. 손 관장은 대학교 여성교양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학생들에게 교양으로 예절과 다도를 가르쳤다. 우리나라의 차 문화와 예절을 가르치는 데 평생을 헌신한 대가에 대한 작은 보상이 주어졌다. 지난 5월 손 관장은 (사)한국박물관협회로부터 ‘제26회 자랑스런 박물관인상’을 수상했다. 다도 경연대회, 세계 찻자리 전시 등을 운영하며 우리 차 문화의 역사와 우수함을 세계에 알리는 데 이바지한 공을 높이 산 것이다. 또 지역사회와 문화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다례 교육을 펼쳐 기관의 특성을 살린 고유한 공헌 활동을 추진해 지역민과 함께 상생하는 박물관의 모범적 역할을 해왔다는 평가를 받았다.

손민영 관장이 전시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윤원규기자

20년째 학예사로 일하며 전시와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안정아 국장의 안내로 박물관 전시실에 들어선다. 전시실에는 고려와 조선시대 다기류는 물론 최근 것까지 300여점이 진열돼 있다. 전시실 입구에 진열된 찻잔 100개를 살펴본다. 찻잔마다 담고 있을 사연을 상상해 본다. 이목 선생이 지은 ‘다부’를 새긴 조각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물을 담는 주전자와 차를 끓이는 화로, 뜨거운 물을 식히는 찻잔, 다례상 등 선조들의 손때 묻은 낡은 유물들이 더욱 반갑다. 이 찻잔은 누가 사용했던 것일까? 야외에 나가 차를 마실 때 사용하는 목각함이 전시된 곳에 그림 한 폭이 걸려 있다. 목각함을 들고 양반을 따라나서는 어린이의 모습을 담은 ‘다동화(茶童畵)’다. 불을 피우고 물을 끓이던 동자는 누구보다 일찍 차 맛과 다도의 풍류를 터득했을 터이다. 한국과 중국, 일본의 다도 도구를 유심히 살펴본다. 과연 우리만의 특징은 무엇일까? “중국, 일본과 달리 한국은 주전자에서 뜨거운 물을 잠시 담아 두는 물 식힘 사발 ‘숙우’를 갖추고 있습니다.”

양반사대부가 여성들의 안방을 재현한 공간이 멋스럽다. 자개가 박힌 장롱과 나비를 장식한 촛대, 달항아리를 갖춘 우아한 안방에서 차를 마시던 옛 여성의 표정을 상상해 본다. 저 많은 유물과 자료를 모으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돈을 들였을까. 차에 미치지 않으면 감히 엄두조차 내기 힘든 일이다. 전시실을 둘러보다 문득 “다도는 먼저 보여주는 것”이란 말의 뜻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다구를 정갈하게 관리하고 가지런히 배열하는 것은 순수와 질서를 가르쳐 줍니다. 예절 속에 자연스레 녹아 있는 차와 함께하며 행동과 태도가 달라지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그렇게 흐뭇할 수 없어요.”

어린이들이 다도체험을 하고 있다. 윤원규기자

■ 다도가 선물하는 인간의 품격

지난 5월 사단법인 예명원과 공동 주관으로 ‘예절과 다도 경연대회’를 개최했다. ‘예절과 다도 경연대회’는 올해로 27회를 맞았다. 세계 찻자리 대회, 전통문화큰잔치, 성년례가 열린다. ‘성년례’는 올해 성년이 되는 19~20세 해병들에게 전통 성년의식인 관례 의식에 따라 관을 씌워주며 성년이 된 것을 축하하는 행사였다.

박물관이 가장 정성을 쏟는 교육 대상은 유아들이다. 앙증맞은 아이들의 손에 찻잔이 들려 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맴돈다. 사진 한 장이 발길을 멈추게 만든다. 유치원 아이들이 다소곳이 둘러앉아 차를 마시는 사진이다. 아이들의 진지한 표정에서 기품이 느껴진다. 다도는 사람의 품격을 높이는 신비한 힘이 있다.

김포다도박물관은 가을 소풍 장소로도 안성맞춤이다. 한강 너머 북녘땅이 훤히 보이는 애기봉 전망대도 박물관에서 7분 거리에 있다. 사랑하는 이와 따뜻한 차를 마시며 깊어가는 가을을 음미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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