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의점·세탁소·빨래방… 제목에 장소 들어가면 베스트셀러가 된다

이영관 기자 2023. 10. 11.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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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위 중 6권이 ‘장소 힐링 소설’

상점, 세탁소, 빨래방, 편의점, 기차역…. 오랜만에 서점을 찾는다면, 베스트셀러 매대에 늘어서 있는 이런 소설 제목에 당황할지도 모른다. 특정 장소를 따뜻한 느낌으로 그린 표지까지 유사한 이 책들은 이른바 ‘장소 힐링 소설’이다. 대체로 각자의 사연을 지닌 이들이 어떤 장소를 찾아 위안을 얻는다는 설정. 교보문고에 따르면, 9월 5주 기준 소설 분야 베스트셀러 20위 중에 여섯 권이 이에 해당한다. ‘비가 오면 열리는 상점’ ‘바다가 들리는 편의점’ ‘메리골드 마음 세탁소’ ‘불편한 편의점’ ‘세상의 마지막 기차역’. 범위를 조금 넓히면 ‘연남동 빙굴빙굴 빨래방’과 ‘달러구트 꿈 백화점’도 이에 해당한다.

소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2012), ‘불편한 편의점(2021)’이 100만부 이상 팔리며 큰 성공을 거둔 적은 있지만, 지금처럼 국내 순위권 다수를 ‘장소 힐링 소설’이 차지하는 현상은 이례적이다. 경제 불황 같은 현실적 이유 외에도 장르 간 경계가 희미해졌다는 것이 큰 이유로 꼽힌다. 가령 ‘메리골드 마음 세탁소’는 세탁소 주인으로부터 흰 티셔츠를 받아 빨면, 각자의 상처가 얼룩과 구김으로 나오는 설정이다. 여러 인물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이야기는 어딘가 있을 에세이처럼 읽히기도 한다.

이 작품들 중에는 전통적 등단 경로를 거치지 않고, 밀리의서재 등 전자책 홈페이지에 연재한 이후 책으로 출간된 사례가 많다. 이런 연재 특성상 옴니버스식 이야기가 호응을 얻기 쉽다는 점도 작용했다. 박인성 문학평론가는 “모든 게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사회에서, 특정 장소를 바탕으로 변하지 않는 것이 지닌 위안을 찾게 되는 현상”이라고 했다. 또 “시트콤이 각 이야기마다 큰 변화가 있지 않듯, 책의 어디를 펼쳐도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라며 “숏폼 형식으로 콘텐츠를 즐기는 젊은 층의 수요와 옴니버스식 이야기가 맞아떨어진 것으로 보인다”라고 했다.

불행을 팔고 행복을 살 수 있다는 설정의 ‘비가 오면 열리는 상점’은 지난 4월 열린 런던 도서전에서 화제가 되며 출간 전부터 일본·대만 등 6국에 판권을 수출했다. ‘메리골드 마음 세탁소’는 영미권 대형 출판사인 펭귄랜덤하우스에 10만달러(약 1억3000만 원) 선인세를 받아 수출됐다. 이 책의 계약을 이끈 BC에이전시 홍순철 대표는 “한국형 힐링 소설이 치유와 연대, 로맨스·스릴러 등 장르가 결합된 점을 높게 평가한 걸로 보인다. SF·스릴러 소설 등이 많이 쏟아지는 해외 입장에선 생소한 유형의 소설일 것”이라고 했다.

국내 반응은 엇갈린다. ‘장소 힐링 소설’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음에도 평단이 반응하지 않는 것은 물론, 비슷한 소재와 서사의 작품에 대한 독자 피로감도 높아지고 있다. 온라인 서점의 독자 리뷰에선 “비슷한 작품들이 떠오른다”와 같은 반응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표정훈 출판평론가는 “전통적 의미에서 문학성이 희미하다는 이유로 기성 세대가 볼 경우 ‘수준이 낮다’는 평가를 내릴 수도 있다. 다만 평가를 내리기보다는 앞으로도 이어질 하나의 현상으로 봐야 하며, 그 안에서도 작품성이 더 좋고 안 좋은 것이 생겨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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