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verseas Trip] 키르기스스탄 여행③ 카라콜 백패킹

2023. 10. 10.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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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발이 아니면 닿을 수 없는 곳 해발 3,532미터 고산 호수 트레킹

키르기스스탄 동부에 ‘트레킹의 도시’라 불리는 지역이 있다. 수도 비슈케크에서 38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카라콜(Karakol)이 바로 그곳. 이식쿨 호수 동쪽 끝에 자리한 카라콜은 이식쿨 지역의 행정수도이면서 키르기스스탄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다. 객기에서 출발한 2박3일간의 고산 호수 백패킹은 동행자들의 영향 아래 곱절의 용기로 발현되어 잊을 수 없는 경험을 남겼다.
해발 3,532미터에 위치한 고산 호수 알라쿨에서의 백패킹 모습
카라콜과 트레킹 그리고 백패킹
카라콜(Karakol) 트레킹을 마친 이들의 말은 딱 두 문장으로 함축됐다. ‘무조건 할 것’,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이미 경험한 자들의 후기에 고개가 끄덕여지면서도 한편으론 ‘무조건’을 강조할 만큼 대단할까 싶은, ‘트레킹이 트레킹이지’ 싶은 생각도 지울 수 없었다. 사실 트레킹 여부에 상관없이 카라콜을 행선지로 정한 건 카자흐스탄 국경과 가깝다는 이유에서였다. 카라콜은 키르기스스탄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이자 카자흐스탄으로 가기 위한 중간 기착지 정도. 애초 목적은 그랬다.
숙소에서 만난 여행자들과 함께 시작한 트레킹
중앙아시아 교차로에 위치한 카라콜의 지역적 이점은 키르기즈인뿐 아니라 카작 타타르족, 러시아인, 위구르족, 우즈벡인 등 여러 민족과 문화가 결합된 독특한 도시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형성해왔다. 1904년 중국인 건축가가 중국식 목조건물로 지은 둔간 모스크(Dungan Mosque)나 1872년 석조건물로 지어져 현재도 매주 일요일이면 예배가 진행되는 러시아 정교회 대성당(Holy Trinity Cathedral)은 도시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다. 이와 더불어 해발 1,745m에 위치한 카라콜은 터스키-알라-투(Terskey-Ala-Too) 산맥이 도시의 화려한 전경을 완성한다.
1872년 지어진 러시아 정교회 대성당
아름다운 자연경관으로 둘러싸인 카라콜의 첫인상은 ‘트레킹의 도시’라는 명제를 단박에 확인시켜줬고, 청록색 고산 호수를 배경으로 백패킹을 시도해보고 싶은 생각이 절로 들게 했다. 물론 텐트나 침낭 등 장비를 대여할 수 있는지 여부가 관건이겠지만. 호수 주변에 형성된 유르트(Yurt, 유목민 거주지) 캠프에서 숙박이 가능해 보였다. 이제는 ‘무조건’ 백패킹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후회가 남을 것 같았다. 괜한 객기가 괜찮은 용기로 발현되기를 바라면서 백패킹 계획에 착수했다.
숙제는 또 다른 숙제를 낳고
하룻동안 도심 여러 곳의 스포츠용품 숍을 돌며 캠핑 장비 대여가 가능한지 수소문했지만 ‘등잔 밑이 어둡다’고, 결국 찾은 곳이 바로 묵고 있던 숙소였다. 한데 애달프게 찾아 헤맨 텐트와 침낭, 매트리스를 손에 넣은 기쁨도 잠시, 돌덩이 같은 무게와 부피는 또 다른 숙제를 불렀다. 일순간 ‘후회고 뭐고 그냥 백패킹을 포기할까?’ 싶었으나 이런 순간에도 객기는 여전히 활개를 쳤다. 백패킹 여정의 동행자 스페인인 다니(Dani)가 텐트를 맡아주기로 하면서 한 뼘의 용기를 채워 넣었다.
숙소에서 만난 여행자들과 함께 시작한 트레킹
백패킹 일정은 2박3일, 카라콜 계곡을 따라 남쪽으로 해발 3,532m에 위치한 고산 호수 알라쿨(Ala-Kul)까지 올라간 다음 그곳에서 동북쪽으로 알틴 아라샨(Altyn Arashan)을 거쳐 카라콜로 돌아오는 코스다. 3일간 이동거리는 약 40km 이상, 트레킹 최대 높이는 3,910m에 달한다. 고산 호수를 포함해 눈 덮인 봉우리, 푸른 계곡 등 다양한 풍경을 제공하는 이 코스는 카라콜을 찾는 여행자들 사이에서 인기 높은 트레킹 중 하나다. 그도 그럴 것이 카라콜 도심에서 버스나 택시를 타고 트레킹 시작지점까지 다소 접근이 용이해 홀로 트레킹을 시작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트레킹 초반 카라콜 계곡의 아름다운 풍경
“처음 세운 계획은 ‘나 홀로 백패킹’이었지만 숙소에서 만난 여행자들과 하나둘 의기투합하게 되면서 트레킹 그룹이 만들어졌다. 다니를 포함해 싱가포르인 앤서니(Anthony), 이탈리아인 마달레나(Maddalena), 폴란드인 패트릭(Patrick)까지 국적도 성별도 다른 네 명의 동행자와 산에 올랐다. 트레킹 초반만 해도 동행자의 여부가 이 험난한 여정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불안과 인간의 생존본능에 기댄 채
백패킹 첫날, 새벽부터 꽃단장에 신경을 썼다. 꽃단장이라고 해 봤자 정성껏 샤워를 하는 것뿐이지만. 3일간 고양이 세수도 감지덕지해야 할 상황이라 마지막처럼 느껴지는 청결한 순간에 꽤 시간을 들였다. 3일이면 사실 긴 일정도 아닌데 그것이 3개월처럼 길고 멀게 다가온 건 마침내 가방을 메고 숙소를 나설 때였다. 지난밤 숙소 주인과 현지인들의 조언을 듣곤 최소한으로 짐을 꾸렸지만, 다음날 택시 안에서 그것이 최소한이 아님을 깨닫는다. 하지만 여행자를 태운 택시는 이미 도로 한가운데를 씽씽 달리고 있다. 나를 제외한 모두의 얼굴에 미소가 만연한 이 상황, 숙소를 나서기 전으로 되돌릴 수 없는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그 미소에 동참하는 수밖에.
트레킹 초반 카라콜 계곡의 아름다운 풍경
듣던 대로 트레킹 초반은 걸을 만했다. 카라콜 계곡을 따라 국립공원 매표소부터 첫 번째 유르트 캠프까지 약 16km 구간은 평지가 대부분이라 고민을 하지 않았다. 더러 오르막 코스가 나타나긴 했지만 그다지 가파르지 않아 올라갈 힘은 충분했다. 무엇보다 어깨를 짓누르는 가방의 무게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난 뒤부터 불안요소로 작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인간의 생존본능은 적응본능에서 비롯된다.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 이르고 나면 어떻게든 이 상황을 내 편으로 만들려는 생각이 불안을 잠재우는 데 효과를 발휘한다. 어느새 무게에 적응돼버린 어깨가 그저 고맙고 대견하고 미안하고 안쓰럽고 위대할 뿐이다.
첫 번째 유르트 캠프
고난도 트레킹은 첫 번째 유르트 캠프에서 다리를 건넌 뒤 시작됐다. 숲 사이로 난 좁다랗고 가파른 오르막을 따라 끝도 없이 올라야 하는 이 구간은 듣던 것보다 더한 체력을 요했다. 무지막지하게 가파른 길을 맞닥뜨리고 나니 짐 무게에 적응된 어깨에 제동이 걸렸다. 발걸음이 위를 향할수록 짐 무게로 인해 어깨는 아래로 축 쳐진 채 땅에 닿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댔다.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생존본능이 어서 빨리 나타나기를 마음 속으로 수도 없이 기도했다. 믿을 수 있는 거라곤 그것 하나뿐이었으니까. 첫 번째 유르트 캠프에서 두 번째 유르트 캠프까지 약 2.5km 거리, 소요시간은 2시간을 훌쩍 넘겼다.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는 건
2박3일 트레킹에서 첫날 밤은 두 번째 유르트 캠프에서, 다음날 밤은 알틴 아라샨에서 여장을 푸는 게 일반적인 코스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두 번째 유르트 캠프에 두 발 닿은 기쁨을 만끽하며 목 좋은 곳에 텐트를 치느라 분주했을 테지만 역시나 계획은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앤서니와 나를 제외한 나머지 동행자들의 넘치는 체력이 새 계획에 발동을 걸었다. 알라쿨 호수에 가서 여장을 풀자는 얘기였다.
알라쿨 호수로 가는 길을 알리는 이정표를 따라 고산 호수까지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른다.
두 번째 유르트 캠프가 첫날의 최종목적지라는 사실을 동력 삼아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고 또 올라왔건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물론 동행자들을 다 보내고 나 홀로 이곳에서 계획대로 여장을 풀 수도 있었지만 그러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고 반나절 동안 약 19km 구간을 지나왔는데 또 다시 3시간이 넘는 산행을, 그것도 해발 500m의 가파른 구간을 올라야 하는 것이 두렵기까지 한 현실. 함께 걷고도 싶고, 홀로 걷고도 싶은 상황에서 다시 가방을 들쳐 멨다.
다리를 건너고 난 뒤 본격적인 고난도 트레킹이 시작됐다. 숲 사이로 난 좁다랗고 가파른 오르막을 따라 걷다 만난 두 번째 유르트 캠프(사진 ©Anthony Tan)
트레킹 중간에 만난 프랑스인 요안(Yoann)과 크로아티아인 타자나(Tajana)까지, 트레킹 멤버는 7명. 알라쿨 호수를 향해 다같이 힘차게 출발했지만 어느새 내 주위에 남은 사람은 앤서니 한 명뿐. 제각기 다른 속도와 체력은 각자의 길을 만든다. 그것의 방향이 같을 때 각자의 길은 한곳에서 만난다. 속도와 체력, 방향이 같은 앤서니가 곁에 있다는 건 행운처럼 느껴졌다. 갈수록 험난한 여정, 해발 3,000m를 넘긴 지점부턴 강한 바람과 추위로 금세 땀이 식어버리는 상황….
가방을 대신 들쳐 매준 다니(사진에서 좌측)
‘“동행’의 의미가 간절하게 순간순간을 채웠다. 체력을 잃어갈수록 감동은 더 크게 물밀 듯 몰려왔다. 알라쿨 호수에 도착한 다니가 그 길을 다시 걸어 우리를 찾으러 왔을 때, 그리곤 나를 대신해 내 가방을 들쳐 메곤 앞장서 걸음을 뗐을 때, 마침내 호수에 도착해 나머지 동행자들과 얼싸 안으며 따뜻한 마음을 나눴을 때 제각기 우리는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며 다시 만났다.”
고산 호수의 길고 긴 밤
아름다운 산봉우리에 자리잡은 고산 호수는 키르기스스탄의 명소 중 하나다. 산과 빙하로 둘러싸인 반짝이는 청록색의 호수는 오로지 두 발로만 접근이 가능하다. 차량은 둘째치고 말조차 닿을 수 없는 길이다. 알라쿨 호수를 맞닥뜨린 순간 ‘트레킹이 트레킹이지’라는 생각은 말끔히 종적을 감췄다. 이 호수를 보기 위해 하루 동안 약 22km를 걷고 여기에 해발 1,700m를 올랐다.
캠프 사이트 전경
고된 하루의 수고를 위로라도 하듯 호수에 닿자마자 산봉우리 위로 일몰이 내려앉았다. 붉게 타오른 산봉우리 너머로 길고 길었던 하루가 진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하루가 저만치에서 작별을 고한다. 트레킹하는 동안 빨리 호수에 닿기를, 빨리 하루가 지나가기를 그토록 바랐건만 저물어가는 하루에 기쁨보단 아쉬움을 먼저 삼킨다. 나 자신과 지지고 볶고 싸우느라 오늘 하루 수고가 참 많았다.
산봉우리 위로 내려 앉은 일몰
백패킹의 백미는 자연 속에 나만의 집을 짓고 그 안에서 잠을 청하는 것. 힘든 하루긴 했지만 호수에 여장을 풀기로 한 건 결과적으로 훌륭한 선택이었다. 대다수의 여행자들이 두 번째 유르트 캠프에서 첫날밤을 보내기 때문에 그곳의 번잡함에 비하면 호수는 청정지역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다면 바로 밤의 추위. 텐트에 몸을 집어넣고 보니 텐트 안과 밖의 날씨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기온은 영상 3도, 다행히 영하로 내려가진 않았지만 체감기온은 영하로 뚝 떨어진 상태다. 돌덩이 같이 무겁고 부피만 큰 침낭과 매트리스는 밤새 덩치 값을 전혀 하지 못했다. 뼛속까지 시린 추위에 잔뜩 웅크린 몸, 긴 하루의 끝에 길고 긴 밤이 텐트를 에워쌌다.
세상에 쉬운 산은 없다
최고난도 알라쿨 패스로 오르는 길 . 저 멀리 트레커들이 보인다.
알라쿨 호수에서 해발 3,910m에 위치한 알라쿨 패스 뷰 포인트(Ala Kul Pass Viewpoint)까지 올라가고 나면 둘째 날 밤을 보낼 알틴 아라샨까지 내리막 혹은 평지길이 아름답게 펼쳐지는 코스다. 호수에서 뷰 포인트까지 약 1.7km, 예상시간은 2시간 17분, 이 구간을 3시간 안에 통과한다면 꽤 성공적인 결과물이, 고생 끝에 낙이 찾아올 거였다.
알라쿨 패스로 향하는 길은 매우 가파른데다 돌멩이로 뒤덮여 미끄럽기까지 해 발을 내디딜 때마다 고도의 집중을 요했다. 발가락의 온 신경이 곤두서 있는 상태에서 발을 땅에 내딛는 것 자체가 발가락에 마치 해를 가하는 것 같은 죄책감이 들 정도였다. 알라쿨 패스 이후 오르막보다 더한 가파른 내리막이 나타나자 두 손 두 발 덜덜 떨며 거의 앉은 자세로 미끄러지듯 내려가는 아찔한 광경 앞에 오직 동행자 모두의 안전과 무사를 빌었다.
해발 3,910미터 알라쿨 패스 뷰 포인트에서 바라다 본 호수의 비현실적인 아름다움
알틴 아라샨까지는 약 9km, 4시간 가까이 걸으면 목적지에 닿는다. 알틴 아라샨은 ‘황금의 근원’을 의미하는 말로 계곡과 산악 휴양지가 조성된 마을이다. 이곳에는 여러 개의 천연 온천이 자리하는데 황산 온천수는 다양한 질병을 치유하는 효과를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온천수를 기대하며 걸어가는 길, 일순간 하늘을 드리운 먹구름의 기세가 심상치 않더니 곧장 세찬 비를 뿌려댔다.
알라쿨 패스 뷰 포인트와 이후 펼쳐진 아찔한 내리막길
하늘이 쩍 갈라질 듯 천둥번개까지 동반한 강한 비는 진흙탕 길을 열었다. 한층 질펀해진 길을 밟았다 하면 신발이 진흙에 파묻히기를 여러 번, 갯벌 위를 걷는 기분과 맞먹었다. 진흙탕 길 대신 낮은 풀이 깔린 곳 위주로 이동하다 보니 시간은 배 이상 늘어났고, 옷에 방수기능이 장착되어 있긴 하지만 두어 시간 내내 내린 강한 비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세상에는 쉬운 산도 쉬운 트레킹도 없다.
알라쿨 유르트 캠프와 빗 속에서의 트레킹이 이어진 계곡 주변
우리는 또다시 한곳에서 만났다
비를 뚫고 알틴 아라샨까지 가는 동안 내 곁을 지킨 동행자는 역시나 앤서니뿐이었다. 지난밤 호수에서 만나 그룹에 합류한 호주인 데이비드(David)까지 총 8명이 다같이 알라쿨 패스에서 내려온 뒤 앤서니와 나는 점심을 먹기 위해 무리에서 이탈한 상태였다. 비에 홀딱 젖은 채 어렵사리 알틴 아라샨에 도착을 하긴 했는데, 문제는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는 일행을 어떻게 찾을지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
백패킹 동행자들과 따뜻한 온천수로 위로를 받았다.
비를 맞아가며 각 캠프를 돌아다니기엔 캠프의 위치가 다소 떨어져 있는 데다 무엇보다 체력이 바닥나 힘도 용기도 없었다. 통신장비도 갖춰져 있지 않은 산속이라 연락을 취할 수도 없는, 그냥 멈춰선 채 허공만 응시하고 있던 상황에서 일순간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빗소리에 파묻혀 귀에 닿았다. 다리 건너편 캠프에서 우리를 알아보곤 양손을 흔들며 연신 이름을 부르는 사람, 패트릭이었다!
계곡과 온천, 산악 휴양지가 조성된 알틴 아라샨
비에 젖은 몸은 금세 한기가 돌았다. 온천이 있어서, 따뜻한 온천수에 몸을 담글 수 있어서 더는 내리는 비에 노여움을 갖지 않기로 했다. 이제 비에 노출되지도 않았고, 온천수에 위로를 받으며 마침내 온기를 품게 된 이 아름다운 트레킹의 끝. 돌이켜보면 트레킹 중 비가 내려서 좋았던 점도 있었다. 비에 굴복하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앞으로 나아간 그 힘은 언젠가 반드시 곱절의 긍정적 효과를 불러올 것이라 믿게 됐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성장’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모두가 모두의 동행자
비가 갠 뒤의 아침은 공기의 냄새부터 다르다. 콧속에 파고든 청량함이 폐 속까지 전달되어 긴 호흡에 시간가는 줄 모른다. 더욱이 트레킹의 마지막 날, 카라콜이라는 문명으로 다시 돌아가는 이 하루의 끝은 생각만 해도 미소가 절로 나온다. 오직 내 힘 들여 쌓아 올린 온전한 기쁨과 경험이 여정에 대미를 장식한다.
(좌측 위에서 시계방향으로) 앤서니, 요안, 데이비드, 타자나, 마달레나, 패트릭, 다니
알틴 아라샨에서 카라콜로 가는 버스정류장까진 약 15km, 평지나 내리막이 대부분이라 소요시간은 5시간 안팎이다. 비의 흔적이 말끔히 사라진 화창한 새날의 기운과는 달리 여전히 진흙으로 뒤덮인 젖은 신발과 옷을 그대로 입은 채 마지막 트레킹을 시작했다. 발가락의 꿉꿉함이 짜증으로 변질되기 전에 어서 빨리 강렬한 햇볕이 몸을 감싼 비의 흔적을 없애주기를 바랐다.
발걸음의 여유는 마음에서 온다. 트레킹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멤버 전체가 무리 지어 길을 간다. 모두가 모두의 동행자다. 카라콜 백패킹 여정을 표현하면 당장은 어떤 것을 먼저 말해야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 고민하는 시간이 길겠지만 시간이 흘러 훗날 이 여정을 떠올리면 고민할 것도 없이 가장 먼저 이 무리들의 면면이 생각날 것이다.
백패킹 동행자들
“백패킹은 자신의 두 발과 의지만으로 대자연을 찾아나서는 여정, 카라콜 백패킹은 그것과 더불어 여러 명의 발걸음과 의지가 힘을 합치면 얼마나 커다란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는지, 그 힘이 앞으로 나아갈 용기에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지 확인한 여정이었다. 나는 누군가의 동행자로, 누군가는 나의 동행자로 서로를 감싸 안은 3일간의 트레킹이 마침내 끝에 다다랐다. 우리는 각자 어디선가 또 누군가의 동행자로 다시 길을 걸어갈 것이다. 지금처럼 그렇게.”
[글과 사진 추효정(여행작가), Anthony Tan]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899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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