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컨 놓기 힘든 집…문턱 남겨둔 리모델링에 약자 고통도

글·사진=박호걸 기자 2023. 10. 9.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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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임대 30년 보고서 <3> 낡고 고장 난 아파트

- 20개 단지 모두 1990년대 완공
- 작년 11곳 살펴보니 문제 120건
- 배수관 막히고 엘리베이터 균열
- 전기용량 작아 에어컨도 못 달아

- 정부 노후 주택 ‘그린 리모델링’
- 부산 입주민 35% 장애인이지만
- 배려 없이 벽지 등 위주 새 단장
- 매트 깔고 기어서 화장실 써야

부산지역 영구임대주택이 30년 세월을 이기지 못해 곳곳에서 많은 문제를 드러낸다. 그러나 재건축 등 근본적인 해결이 어려워 매번 땜질식 처방에 그친다. 입주민 중 노인과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 비율이 높은데도 이들에 대한 배려는 없다. 보완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부산 영도구 LH 동삼1단지 A 씨의 집. A 씨의 집은 그린 리모델링으로 전반적으로 깨끗해졌지만, 화장실(왼쪽)과 출입구(중간)가 여전히 좁고 턱이 있어 장애인인 A 씨가 생활에 불편함을 겪는다.

▮에어컨도 못 다는 아파트

8일 국제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부산 영구임대주택은 모두 1990년대 초중반 완공됐다. 부산도시공사(BMC)와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공급했다.

가장 먼저 입주한 곳은 1991년 8월 부곡단지(553가구·BMC)다. 이후 ▷1991년 10월 북구 덕천2단지(1507가구·LH) ▷1991년 11월 영도구 동삼단지(976가구·LH) ▷1991년 12월 해운대구 반송단지(1710가구·LH) ▷1992년 4월 사하구 다대3단지(750가구·BMC) ▷1992년 5월 사상구 모라1단지(2529가구·LH) ▷1993년 6월 사상구 모라3단지(2385가구·LH), 학장1단지(720가구·BMC) ▷1993년 10월 영도구 동삼1단지(400가구·BMC) 등 9개 단지가 들어섰다. 모두 30년을 넘겼다. 이 외 나머지 11개 단지도 앞으로 3년 안에 지어진 지 30년을 넘는다.

오래된 만큼 고장 난 곳도 많다. BMC가 지난해 추석을 맞아 영구임대주택 11곳의 생활안전시설을 점검한 결과 120건의 문제가 발견됐다. 옥상 배수관이 걸핏하면 막혔고, 미끄럼 방지 포장이 벗겨졌다. 피뢰침은 녹슬었고, 지지선도 제 역할을 못 했다. 이 밖에도 ▷엘리베이터 창틀 주변 균열 ▷비상계단 파손으로 철근 노출 ▷천장 철판 지붕 노후화와 부식으로 빗물 누수 ▷발광다이오드(LED) 점등 오작동 등이 확인됐다.

특히 기계실·전기실 배관 등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입주민 안전을 위협하고 생활 불편을 초래하는 부분이 많았다. 지역 건설업계 관계자는 “당시 영구임대주택 공사비가 3.3㎡당 100만 원이 채 안 됐을 거다. 아파트에 들어간 자재도 저렴했기 때문에 30년이 지났으니 여러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며 “배관이나 전기 등이 말썽을 많이 일으키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에어컨도 제대로 설치할 수 없다. 발코니 공간이 협소한 것은 둘째 치고 전기 용량 자체가 작다. 영구임대주택 전기 용량은 가구당 1.3~1.8㎾ 정도인데, 이는 현재 최소 기준인 3.0㎾의 절반 수준에 그친다. BMC는 영구임대주택 전체 가구의 20~30%가 에어컨을 돌리면 전기 사용량이 변압기 용량의 70%에 다다를 것으로 본다. BMC 관계자는 “셧다운이 우려돼 집마다 에어컨을 달 수 있는 형편이 안 된다. 에어컨 추가 설치를 위해서는 전기 용량부터 확보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입주민 배려 않은 리모델링

BMC와 LH도 이런 상황을 잘 안다. 정부는 2021년 9월부터 노후 공공임대주택 4만 가구에 대한 ‘그린 리모델링’ 사업을 하고 있다. 준공한 지 15년 이상 지난 영구임대주택 등을 대상으로 한다. 맞닿은 소형 평형(전용 면적 26㎡) 두 가구를 비내력벽(자체 하중만 받고 상부에서 오는 하중은 받지 않는 벽) 철거로 더 넓은 한 가구(52㎡)로 만드는 세대 통합 방식과 기존 주택에 빌트인 가전 및 고성능 단열창호 설치, 친환경 자재 시공 등을 하는 단일 세대 리모델링 방식으로 나뉜다. 부산에서는 BMC가 420가구, LH 부산울산본부가 2148가구의 리모델링을 완료했거나 현재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리모델링이 일방적으로 이뤄진다. 국제신문 취재진은 최근 영도구 LH 동삼1단지 A(68) 씨 집을 찾았다. 선천적으로 몸이 작은 A 씨는 20년 전 직장에서 척추를 다쳐 설 수도 걸을 수도 없다. 지난해 10월 그린 리모델링을 마친 집으로 이사 왔다.

리모델링한 집을 살펴보니 변기·타일·바닥·벽지는 새로 단장해 반짝반짝했지만, A 씨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었다. 입구가 좁아 전동휠체어를 세워두면 사람이 지나갈 수 없을 정도였다. 화장실 크기도 좁아 전동휠체어가 들어갈 수 없었다. A 씨는 욕실 바닥에 매트를 깔고 앉거나 기어서 화장실을 사용해야 한다. 좁은 집이 문제지만 BMC나 LH 부산울산본부가 부산에서 진행한 리모델링 중 세대 통합형은 단 한 가구도 없다. 그나마 리모델링으로 방 문턱은 없앴지만, 베란다와 화장실은 여전히 턱이 높다.

A 씨는 “리모델링으로 그나마 나아진 건 맞다. 그런데 원래 없던 붙박이장이 생기는 바람에 침대를 놓을 공간이 사라졌다”며 “이왕 예산을 들일 거면 손을 잡고 몸을 지탱할 가드레일을 설치하고, 문턱을 없애줬으면 좋았을 것 같다. 이런 배려가 없는 점이 아쉽다”고 했다.

영구임대주택 입주민 중에는 A 씨처럼 몸이 불편한 취약계층이 많다. 지난해 기준 부산 영구임대주택 입주민 3만2864명 중 장애인은 1만1381명으로 34.6%에 달한다. 65세 이상 노인은 1만5485명(47.1%), 기초생활수급자는 2만2592명(68.7%)이다. 입주민 대다수가 사회적 약자다. 부산의 한 사회복지관 관계자는 “영구임대주택 리모델링은 싱크대 높이,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욕실 크기, 안심 센서 설치 등 취약계층의 어려움을 고려해 설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복지법인 우리마을 김일범 사무국장은 “행정이 여전히 공급자 중심 발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입주민을 배려하지 않은 영구임대주택 리모델링이 대표적 사례다”고 꼬집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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