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말을 쓰지 않는 게 차별, 언어는 인권이다"

장슬기 기자 2023. 10. 7.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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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 특집 인터뷰] 한글문화연대 대표 이건범, 한글날 법정 공휴일 만드는데 기여
"신문 뿌리 독립신문은 순한글신문, 쉬운 우리말 사용에 언론이 앞장서야"

[미디어오늘 장슬기 기자]

한글날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부터 공휴일이었다. 당시 한글날은 '국경일'까진 아니고 '기념일'이었다. 그러다 1990년 이른바 '노는 날이 많다'는 재계 논리로 한글날(10월9일)이 국군의날(10월1일)과 함께 공휴일에서 빠졌다. 이후 15년간 한글 관련 단체들이 요구한 결과, 2005년 한글날을 국경일로 지정하는 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고 2012년 다시 공휴일로 복귀했다.

한글날을 법정 공휴일로 만드는 데 주요 역할을 한 시민단체 한글문화연대 대표 이건범은 지난달 27일 미디어오늘 인터뷰에서 “한글날을 공휴일로 만들어야 한 번이라도 한글날에 대해 생각해보고 기억할 수 있다”고 했다. 한글 사용의 중요성을 말하지 않는 시대에 그는 한글 사용, 특히 공공분야에서 쉬운 언어 사용을 강조하면서 “언어는 인권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는 왜 쉬운말 사용이 인권 문제라고 할까. 그와 인터뷰를 일문일답으로 재구성했다.

- 한글날을 공휴일로 만드는데 한글문화연대가 큰 역할을 했다. 그때 분위기는 어떠했나?

“공휴일을 만드는 이유는 잘 기억하기 위해서다. 어린이날 쉬어야 어린이에 대해 생각하는 기회가 오는 것처럼 한글날이 공휴일이 돼야 우리말 사용에 대해 우리 주변도 돌아보지 않겠나. 공휴일이 늘어나면 경제에 타격을 입는다는 기업 논리가 득세할 때였다. 경제단체 논리대로면 2004년에 주5일제 도입하고 나서 나라가 망했어야 한다. 당시 경총(한국경영자총협회) 등에서 휴일이 많은 것처럼 주장해서 이를 선진국 휴일 수 등을 제시하며 조목조목 반박했다. 그렇게 한글 가치를 경제 논리로 재단하려거든 '한글 사용료'를 내야 하지 않겠나.(웃음) 지금은 주5일제에 다들 동의하고, 오히려 내수 진작을 위해 정부가 휴일을 만들어내고 있다.”

▲ 2012년 10월30일 한국경영자총연합회 앞에서 도끼상소 시위를 벌이는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 사진=한글문화연대

- 2005년 국어기본법이 제정됐지만 이 법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고, 규제 조항이 없어서 한국어 사용의 중요성을 체감하기 어렵다.

“프랑스의 '투봉법'은 방송이나 광고 등 공공영역에서 프랑스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벌금을 매기기도 한다. 프랑스는 헌법 제2조에 프랑스의 국어는 프랑스어라고 규정하고 있다. 한국에선 헌법 조항은 아니지만 헌법재판소(헌재)에서 '공문서를 통해 공적 생활 정보를 습득하고 자신의 권리 의무 관련 사항을 알게 되므로 국민 대부분이 읽고 이해할 수 있는 한글로 작성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 언어를 자유롭게 쓸 수 있어야 하는데 국어기본법이 언어를 통제하는 것 아니냐는 오해도 있다.

“국어기본법은 일반 국민의 언어 생활을 규율하는 법률이 아니다. 개인이 외국어를 쓰든 상관없고 다 표현의 자유 영역이다. 국가와 공공기관에서 사용하는 언어에 대한 법이다. 공무원 등 국가가 언어의 생산 주체가 되고 그들 소수가 용어를 만들어내지만 그 영향을 다수 국민에게 끼친다. 공적 공간에서 공적 용무에 사용하는 언어를 한국어로 해야 한국어만 아는 국민들도 소통하는 데 문제가 없다.”

▲ 김명진 한글문화연대 부대표(왼쪽)와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가운데). 사진=한글문화연대

- 한자를 같이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지난 2012년 국어기본법을 헌재에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했다.

“2016년 헌재 재판관들이 9대0 전원일치로 국어기본법에 손을 들어줬다. 국민들이 잘 알아듣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한글을 사용하자는 법이기 때문에 정당하다고 본 것이다. 공용어를 한국어로 하고 국어를 한글로 한 걸 낡은 민족주의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이다.”

▲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 사진=겨레말TV 갈무리

- 한글날을 공휴일로 만든 뒤 한글문화연대는 한글날에 무슨 일을 해왔나? 물론 한글날에만 한글의 중요성을 알리진 않겠지만.

“한글 옷 패션쇼를 해왔다. 한글을 하나의 무늬로 활용하는 방안은 시각적 효과가 있다. 디자인을 공모해 디자인이나 재질을 신경써서 만들었다.”

- 인사동 등에서 외국인용 관광상품으로 한글 새긴 옷을 쉽게 볼 수 있다.

“한글 옷 패션쇼도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여전히 한글을 무늬로 한 옷은 한국인들 의류 문화 바깥에 존재하는 것 같다.”

- 또 무슨 활동을 했나?

“세종대왕이 겨레의 스승이라서 세종대왕 나신 날인 5월15일이 스승의 날이다. 광화문 광장에서 주로 행사를 했다. 세종대왕 동상 앞에 거대한 나무 벽체를 세워 5월15일에는 '고맙습니다', 10월9일에는 '한글사랑해' 등의 글자 구멍을 뚫고 지나가는 시민들이 꽃을 꽂는 행사를 했다.”

▲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한글날 행사. 사진=한글문화연대

김명진 한글문화연대 부대표는 “광화문에 소위 '태극기집회'가 시작되면서 한글날 관련 행사를 방해하며 밀치고 전기도 끊어서 그 뒤로는 광화문에서 행사를 열지 못하고 있다”며 “우리 운동이 보수적인 가치지만 (한자파 혹은 태극기부대 등) 또 다른 (자칭) 보수 세력들과 싸워야 했다”고 덧붙였다. 이후 코로나19가 닥쳤고 계속 실내에서 한글날 행사를 해왔다.

- 정부나 공공기관뿐 아니라 언론도 한국어 사용을 고민하는 일이 필요해 보인다.

“언론사마다 표기법이 있으니 한국어를 쓰도록 반영이 되면 많이 바뀔 것 같다. 과거 국한문혼용에서 국영문혼용으로 넘어간 느낌이다. 한자를 영어 로마자가 대체한 것이다. 우리말, 한글 중심으로 자리를 잡았어야 했는데 안타깝다. 신문의 뿌리는 순한글로 표기한 독립신문이지 않나. 물론 언론인들이 로마자 표기 등을 강하게 주장한다기보다는 (외국어 사용에 익숙한)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는 면도 있다. 그렇지만 말과 글을 가장 많이 사용하며 직업 생활을 하는 언론인들이 한국어·한글 사용에 반 발 정도 앞장섰으면 좋겠다. 물리학자인 김상욱 교수나 뇌과학자인 정재승 교수는 AI라고 하지 않고 인공지능이라고 한다. 언론인들도 사명감을 갖고 분위기를 만들어갈 필요가 있다. 요즘은 인터넷을 통해 외국어가 봇물처럼 들어온다. 그렇다고 언론에서 그대로 써주면 외국어에 시민권을 부여해주는 면이 있다.”

한글문화연대는 지난 6월부터 기자들을 대상으로 기사에 자주 등장하는 용어 100개에 대해 개선 필요성을 조사했다. 507명의 기자가 참여한 조사에서 개선이 필요하다는 응답이 60%가 넘는 용어 74개에 대해 국어 전문가, 언론단체, 현장 기자들 자문을 거쳤고, 최종 60개를 선정했다. 예를 들어 '보이스피싱'은 '전화금융사기'나 '전화사기'로 '디지털포렌식'은 '전자감식', '디지털자료복원', '디지털증거수집'으로 바꾸는 식이다.

또 한글문화연대는 지난 3월 한글학회, 한국기자협회, 방송기자연합회, 한국어문기자협회 등과 '우리말약칭제안모임'을 꾸리고 지난 8월에는 국제기구명을 로마자 약칭이 아닌 우리말 약칭으로 쓰는 것에 대해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응답자 71.2%가 로마자 약칭 대신 우리말 약칭 사용을 원했다. '국제박람회기구'를 로마자 약칭인 'BIE'로만 쓰면 알아보지 못하는 국민이 많으니 우리말 약칭인 '박람회기구'로 쓰자는 뜻이다.

- 낯선 국제기구의 경우 확실히 우리말 약칭으로 쓰면 어떤 일을 하는 기구인지 예상할 수 있어서 필요한 제안이다.

“언론이 로마자 약칭으로만 쓰는 건 '독자들의 영어 능력이 이 정도는 될 것'이라고 전제하고 사용하는 것이다. 그걸 듣고 보는 사람으로선 잘 몰라도 부끄러워 말을 하지 못한다. 차별 용어의 경우 사람들이 쉽게 지적할 수 있지만 우리말, 쉬운말을 쓰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 내가 못 배운 사람이 되니까 항의할 수 없다. 누구는 노래에 관심이 있고 누구는 그림을 잘 그리는 것처럼 모두가 다 외국어에 능력이 있거나 관심이 있는 건 아니지 않나. 그런데 영어 능력이 부족하다고 마치 평균적인 한국인으로서 소통하며 살아가기 어렵게 만드는 게 더 강한 차별이다. 보통의 차별이 다수가 소수를 차별한다면 우리말·쉬운말을 쓰지 않아 언어 능력으로 차별하는 건 (공공이나 언론 등) 소수가 나머지 대다수를 차별하는 것이다.”

- 이제 '언어는 인권이다'라는 책 제목이 이해가 간다.

“처음에는 언어'도' 인권이다라고 했다.(웃음) 유럽사회에선 소수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있고, 언어 때문에 차별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두 개 언어를 공용어로 지정하기도 하는데 한국은 단일 언어 사회다 보니 이런 고민보다는 오히려 영어를 잘했으면 좋겠다는 분위기 속에서 지내왔다. 영어를 잘하면 취업도 하고 승진도 하니까 영어를 공용어로 만들자는 주장도 있었는데, 지금 한류가 세계화된 게 영어 때문은 아니지 않나.”

그는 2013년 2월 경향신문 칼럼 <언어도 인권이다>에서 한 사례를 소개했다. 영국에서 한 가정이 정부로부터 난방수당을 더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얼어죽은 사건을 계기로 40대 초반 여성이 항의 시위를 시작했고 이후 '쉬운 영어 운동'이 시작됐다. 한국의 복지 정책도 언어 장벽이 높다. '포괄수가제', '바우처', '텔레케어' 등 어려운 용어 앞에 시민들은 주눅들 수밖에 없고, 쉬운 말을 쓰는 게 곧 인권이라는 취지의 칼럼이다. 이어 2017년 그는 <언어는 인권이다>라는 책을 펴냈다.

최근 한글문화연대는 전국 국어단체 75곳, 인천 시민사회단체 53곳과 함께 인천시의 영어통용도시 정책에 반대하고 있다. 인천시가 지난 6월 구체적 계획을 발표하겠다고 했지만 아직 공개된 내용이 없는 가운데 오는 15일 '인천 영어통용도시 선포식'을 강행하려고 해 이들 단체는 지난 7월 1차 기자회견에 이어 지난 4일 2차 기자회견을 열고 인천시 계획을 비판했다. 이들 단체는 경제자유구역 주민의 영어 실력을 획기적으로 높이지 않는 한 불가능한 정책이며 인위적 영어 환경 조성은 시민에게 불편을 주는 점, 실제 영어통용도시를 만들기 위한 수단이 마땅치 않아 학원연합회에 손을 내미는 등 사교육을 부추긴다는 점을 근거로 비판했다.

▲ 지난 4일 인천시청 앞에서 열린 영어통용도시 정책 반대 기자회견에 참석한 이건범 한글문화연대 대표(가운데). 사진=한글문화연대

-지난해 부산시가 영어상용도시를 만들겠다고 발표한 후 인천도 영어통용도시를 추진 중이다.

“시대착오적이면서 실제 시에서 할 수 있는 건 없는 정책이다. 인천경제자유구역 안에 한국인이 42만 명쯤 되고 외국인이 7000명 정도인데 7000명을 위해 42만 명이 영어를 배우는 게 맞나 싶다. 성인들이 지금 영어를 배워서 쓰라고 하면 하겠나. 결국 영어를 쓰는 도시를 만드는 게 쉽지 않으니 학생들 대상으로 원어민 강사를 파견하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다. 이런 분위기가 영어를 거리낌 없게 남용하게 할까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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