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산 짝퉁으로 누군가는 수퍼카를 탑니다

김아진 기자 2023. 10. 7.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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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장난감부터 명품까지
진화하는 짝퉁의 세계
각종 오픈마켓과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에서 팔고 있는 짝퉁들. 인터넷에서는 아동용 장난감부터 골프복, 18K·다이아몬드 액세서리, 명품 시계까지 정품과 비슷한 물건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알리익스프레스·쿠팡·인스타그램, 그래픽=송윤혜

“야, 너도 쿠팡에서 2만원 주고 샀냐?”

“뭔 소리야. 나 이거 백화점에서 샀거든?”

“완전 똑같은데, 그걸 20만원 넘게 주고 사다니 진짜 호구네.”

“참 나.”

40대 친구 사이인 남성 A씨와 B씨는 얼마 전 골프장에서 서로 민망한 상황을 마주했다. 한 명은 정품(진짜), 한 명은 가품(가짜)을 입었는데, 겉보기에는 누가 봐도 같은 옷이었다. 그런데 제 돈을 주고 옷을 산 A씨는 라운드 내내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니, 태그(tag)까지 똑같으니까 오히려 제가 속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예요.”

B씨는 가품을 입고도 당당했다. “아무리 골프가 난리라지만 수십만원 주고 티 쪼가리 한 장 사는 건 바보 아닌가요? 짝퉁 사는 게 불법도 아니고요.” B씨의 말이 궤변이지만 묘하게 설득력이 있다 보니, A씨는 함께 온 친구들에게 “호구”라며 놀림을 당했다.

국내 짝퉁 시장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과거엔 서울 동대문 지하상가 등에서 암막 커튼을 치고 중국에서 가져온 S급(정품과 거의 똑같다) 짝퉁 물건을 단속을 피해 숨겨 놓고 팔았지만, 요새는 온라인에서 “진짜 같은 짝퉁”이라고 대놓고 판매한다. 자동차 말고 모든 물건에 짝퉁이 존재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짝퉁을 사는 사람도 속아서 사는 게 아니다. 소비자도 대략 가격을 보면 정품인지, 가품인지 안다. 오히려 싼 가격에 명품 같은 물건을 샀다고 자랑한다. 업계 관계자들은 “적발돼도 벌금형에 그치고, 운이 나빠도 몇 년 살다 나오면 된다”며 “판매자는 많은 돈을 벌어서 좋고 구매자는 싼 가격에 사고 싶은 걸 사니 누이 좋고 매부 좋고다. 이게 짝퉁의 세계”라고 했다. 짝퉁을 근절하려면 강력한 처벌을 하거나 대대적인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장난감부터 인테리어 소품까지

짝퉁은 수백만,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명품 가방, 신발 등에 한정돼 있었다. 그러나 최근엔 아동용 장난감, 스포츠 용품, 액세서리, 인테리어 소품, 전자 제품, 건물까지 짝퉁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다.

구매자에게 가장 큰 이점은 가격이다. 서울 서대문 한 주얼리숍 주인은 “18k 명품 액세서리 의뢰가 가장 많다”라며 “정품 가격의 10% 정도면 비슷한 퀄리티를 받아볼 수 있으니 이해가 안 되는 수요는 아니다”라고 했다. ‘어느 정도로 똑같냐’고 물었다. “금 함량까지 똑같이 하면 95% 이상이죠. 각인까지 새겨주는데요. 시계는 워낙 정교하기 때문에 뭐 뜯어보면 다를 수 있지만 목걸이, 팔찌, 반지는 돋보기를 들이대지 않는 한 모를걸요.” 그러면서 한마디 더 보탰다. “우리나라에 명품 안 두른 사람 없잖아요. 제 생각에 90%는 짝퉁일 겁니다.”

서울의 부촌인 청담, 압구정, 서초, 이촌, 한남의 일부 오프라인 수입 의류 가게에선 짝퉁 옷을 팔면서 구입 시에만 라벨을 붙여주고 있다. 30대 여성 C씨는 “500만원짜리를 30만원에 구매하긴 하지만 결코 싼 가격이 아니다”라며 “태그가 없으면 살 이유가 없다”고 했다. 유튜브에서도 정품과 가품을 비교하는 영상은 수두룩하다. 한 유튜버는 “이 정도면 진짜를 살 이유가 없을 정도”라고 했고, 블라인드 테스트에서도 짝퉁을 골라내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중국에 사는 한 조선족은 노골적으로 자신이 파는 짝퉁과 다른 업체 짝퉁을 대조하면서 “우리 것은 정품과 똑같다”고 구입을 유도한다.

서울 을지로 인테리어 상가에서도 유럽 명품 디자이너 인테리어 조명, 오브제 등 소품을 모방한 가품이 널려 있다. “정품을 해외 배송으로 받으면 길게는 수개월이 걸리지만, 여기서 사면 곧바로 설치가 가능하다”는 말에 소비자는 혹한다. 가격도 정품의 10~20%다. 한 블로거는 셀프 인테리어를 하면서 “이쪽 짝퉁 시장도 신세계더라”며 “발품 팔아 1만원대 제품을 샀는데, 실제 100만원짜리 루이스폴센, 세르주무이 조명을 산 친구도 몰라봤다”고 자랑했다.

서울 명동에 있는 비밀 매장에서 판매된 짝퉁 가방들 /서울 중구청

◇온라인서 쉽게 검색

짝퉁은 인터넷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쿠팡, 11번가, 지마켓 등 오픈 마켓뿐 아니라 인스타그램, 포털사이트 블로그, 카페 등에서도 최상급 짝퉁을 홍보하는 글이 쏟아진다. 공공기관인 공영홈쇼핑의 인터넷 쇼핑몰에서도 위조 의심 상품이 나왔다.

특히 중국의 알리익스프레스는 브랜드 이름으로도 짝퉁 검색이 곧바로 된다. 명품은 물론 수십만원짜리 국내 브랜드의 가품도 1만원대 안팎으로 구입할 수 있다. 한장에 몇 만원짜리 정품 포켓몬 카드도 50장을 몇 천원에, 그것도 해외 무료 배송으로 살 수 있다. 세계 곳곳에서 “마음에 쏙 든다”는 구매자들의 후기도 눈에 띈다. “아이가 울고불고해서 속는 셈 치고 한 번 사 봤어요. 퀄리티는 실망스러워요. 애한테 미안하긴 하지만, 네 살짜리가 뭘 알겠어요.” 알리 측이 최근 짝퉁 판매자에게 계정 폐쇄 등 무관용 원칙을 적용하겠다고 했지만 아직은 큰 변화가 없어 보인다.

과거엔 중국에서 만든 짝퉁을 국내로 들여와서 되파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최근엔 소비자들이 퀄리티를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국내 제작, 유통 시장도 커졌다. 정품을 사서 꼼꼼하게 뜯어보고 이음새, 스티치, 라벨까지 똑같이 만드는 것이다. 최근 검찰이 구속한 30대 인플루언서도 이런 방식으로 옷, 신발, 액세서리를 팔았다. 3년간 샤넬, 에르메스 등 짝퉁 2만점을 판매해 수십억원을 챙겼고, 불티나게 팔리니 직원 6명을 둔 회사까지 차렸다. 이 인플루언서는 짝퉁을 판 돈으로 명품을 걸치고 고가의 수퍼카를 탔으며 강남 고급 빌라에 살았다. 특허청이 앞장섰지만 걱정이 더 컸다. “상표법 위반으로 조사를 받아도 벌금 내면 끝이거든요. 업계 사람들은 그걸 다 알아요. 범죄인 줄 알면서도 수익이 더 크니까 유혹을 떨치기 쉽지 않은 거죠.”

◇솜방망이 처벌

만연해 있는 짝퉁 시장을 단속하는 일도 쉽지 않지만, 적발하더라도 처벌 수위가 굉장히 낮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행법상 위조 상품을 제작·판매하다 적발되면 7년 이하 징역이나 1억원 이하 벌금형에 처하도록 돼 있는데 실질적인 처벌 수위는 매우 낮다. 최근 5년간 특허청이 검찰로부터 통보받은 자료를 보면 평균 벌금은 2018년 229만원, 2019년 246만원, 2020년 303만원, 2021년 276만원, 2022년 273만원으로 파악됐다.

올 1월부터 8월까지 짝퉁 범죄 수익 회수액은 60억5000만원에 달했지만, 건별 벌금 평균액은 356만원에 불과했다. 그래서 재범률이 높다. 그나마 최근엔 업자를 구속도 하는 등 처벌 수위가 높은 판결이 나왔다. 얼마 전에는 부산의 유명 카페 건물과 유사하게 지은 울산의 짝퉁 건물에 대해 법원은 철거 명령과 함께 건축가에게 5000만원을 배상하라고 했다.

소비자의 인식 변화도 시급하다. 과거에 짝퉁이 문제가 됐던 건 가품을 진품처럼 속여 팔았기 때문이지만, 이제는 소비자가 짝퉁임을 알고도 구입한다. “수요가 있는 한 짝퉁 시장은 계속 번성할 수밖에 없어요. 대신 한 가지만 기억하세요. 당신이 짝퉁을 사는 순간, 판매자는 그 돈으로 백화점에서 명품을 사서 걸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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