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동물원] 욕망에 미쳐 날뛰던 ‘밤비 후예들’의 최후

정지섭 기자 2023. 10. 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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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정기 이른 수컷, 암컷 유혹하며 괴성 질러대고 자기 냄새 풍겨
부주의하고 쉽게 흥분해 사냥꾼들에겐 오히려 절호의 찬스
발정기에 접어든 와피티사슴이 포효하는 모습. /Liberty Games C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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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트디즈니의 1942년작 ‘밤비’가 지금까지 명작으로 평가받는 이유 중 하나는 비교적 충실한 생태 묘사입니다. 애니메이션이라는 환타지에 갇히지 않고 야생사슴들의 본질적 습성을 담고 있거든요. 강자가 모든 권력을 가져가 휘두른다는 것이죠. 여러 부수적 캐릭터들이 아기자기한 모습으로 등장하지만, 이 만화는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수사슴의 투쟁기입니다. 그렇다면 밤비는 대체 어떤 사슴일까요? 미국 북동부 메인주에 사는 흰꼬리사슴이 모델이었다고 알려져있습니다. 하지만, 디즈니의 애니메이터들은 북미 지역에 사는 여러 사슴종들을 두루 참고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위대한 숲의 왕자’로 등장하는 밤비의 아비, 사슴왕을 보면 시커먼 가슴털을 두른 것이 영락없는 와피티사슴(엘크)이거든요. 어쩌면 밤비의 후예라고도 할 수 있는 수컷 와피티의 범상치않은 울음소리를 담은 동영상(US Fish and Wildlife Service Facebook)부터 보실까요? 가능하면 볼륨을 최대치로 올리시길 권합니다.

이 소리, 우렁차다고 하기엔 뭔가 괴이쩍고, 신경질적이라 하기엔 다소 애처롭습니다. 간절하게 갈구하는 듯하면서도 앙칼지게 협박하는 것처럼도 들려요. 구슬프다기엔 섬뜩합니다. 울부짖을 때마다 사슴의 사타구니가 위아래로 거칠게 들썩입니다. 이 울부짖음은 이 족속 사이에선 일종의 노래입니다. 거친 헤비메탈이면서 감미로운 발라드며, 끈적한 리듬앤블루스이기도 하고 찰진 아카펠라이면서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랩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단어로 표기할 수는 없겠지만, 노랫말을 해석하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위와 같은 내용이에요. “나랑 흘레붙을 암컷 어디 없소오오오오~” 노래의 제목을 ‘흘레송’이라고 이름붙여도 될 법합니다.

이 ‘흘레송’이 마뜩치 않은 걸까요? 시큰둥하게 쳐다보던 암컷 몇마리가 관심을 끊고 제 갈길을 가려하자 이 수컷은 암컷들에게로 방향을 틉니다. 결과는 상상에 맡기도록 하죠. 거칠고 질긴 구애행동 끝에 원하던대로 흘레붙는데 성공했을 수도 있고, 뜻대로 안되자 자기 성질에 못이겨서 애먼 암컷을 무자비하게 짓밟았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비극적인 일이 일어납니다. 밤비 아비를 연상시키는 우람한 피지컬의 경쟁 수컷이 등장하자 혼비백산해서 도망쳤을 수도 있겠습니다. 이 기괴한 울음소리, ‘흘레송’은 날이면 날마다 들을 수 있는게 아닙니다. 발정난 수사슴이기에 만들어내는 소리입니다. 욕망의 에너지에 온몸이 저당잡혀 날뛰는 짐승이 만들어내는 조화라고나 할까요? 그렇게 접어드는 늦가을, 수사슴들이 발정이라는 운명의 주술에 빠져들었습니다.

늦어도 11월 중순까지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남기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거칠게 날뛰는 수컷들의 발굽소리와 몸짓으로 땅은 패이고, 나뭇가지는 온갖 흠집이 날 거예요. 여기저기 묻은 분비물에서 풍기는 냄새가 숲을 스멀스멀 피어오를 것입니다. 최후의 승자가 되려는 수컷들의 거친 투쟁으로 숲은 거대한 격투장으로 돌변하게 됩니다. 대담해진만큼 위험해지는 시절입니다. 영어 단어로 ‘rut’는 여러 짐승중에서도 특히 수사슴의 발정을 일컫습니다. 그만큼 유별나다는 뜻일테지요.

미국 콜로라도 에스테스 공원에서 와피티 암수 한쌍이 포착됐다. /visitestespark.com

미국 매사추세츠주 수렵당국에 따르면 이 시기 수컷사슴들의 행동 패턴은 대략 세 단계로 나뉩니다. 우선 본격적인 발정 전 수컷들은 빌드업에 들어갑니다. 우선 되도록 많이 먹어 온몸을 기름기로 살찌우며 체력을 비축합니다. 그리고 사슴뿔을 나뭇가지에 박박 문지릅니다. 이 행동을 통해 일석이조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어요. 발정기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인 뿔 박치기 싸움에 대비해 목근육을 튼튼하게 단련할 수도 있고, 자신의 냄새를 남기는 효과도 있습니다. 이 냄새는 경쟁자 수컷들에게는 경고의 메시지이고, 암컷들에게는 유혹의 묘약 역할을 할 것입니다. 수컷들은 발굽으로 숲을 파헤쳐 보드라운 흙을 드러나게 한 뒤 냄새를 묻히고 오줌을 흩뿌려 존재감을 과시합니다. 나뭇가지에다 눈을 부벼대며 냄새를 묻히지요.

본격 발정기가 되면 수사슴들의 행동 패턴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본디 포식자를 피해서 저물녘이나 새벽녘에 활동하던 조심스러운 생활 습성은 온데간데 없고, 한낮에도 암컷들을 찾아 헤맵니다. 자기 성질을 자기가 못 이겨 날뛰다보니 달려오는 자동차와 부딪치는 사고도 이 때 부쩍 늘어납니다. 이 시기 놈들의 삶의 목표는 오로지 흘레, 흘레, 그리고 또 흘레입니다. 먹는 것도 거들떠 보지 않고 몇시간씩, 혹은 며칠씩 암컷들을 쫓습니다. 미리 체지방을 비축해놓으며 빌드업해놓은 에너지가 이 때 맞춰서 소비되는 거죠. 그렇게 격정의 시간이 흐르고 나면, 암사슴과 수사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예전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서로를 데면데면하게 보면서 풀을 질겅질겅 뜯으면서 말이죠. 그러나 수컷들간 격렬한 세력 다툼에서 승리한 수컷의 DNA가 여러 암컷의 뱃속에서 2세로 자라나고 있을 겁니다. 그렇게 또 생명의 바퀴의 한 서클이 묵묵히 흘러갑니다.

발정기를 맞아 세력다툼을 벌이는 와피티사슴이 뿔을 부딪치며 싸우고 있다. /National Wildlife Photo Contest entrant Pat Ulrich

수사슴들이 본능적 욕망에 휘둘려 날뛰기 시작할 때 덩달아 흥분하는 족속이 있습니다. 바로 사람입니다. 발정기는 최적의 사냥시기이기도 하거든요. 흘레붙는데 사로잡혀 대낮에도 눈에 뵈는게 없이 거칠게 날뛰는 수사슴들은 주변 천적을 경계하는 조심성도 없어집니다. 이런 수컷은 물론 수컷이 쫓아다니면서 위치가 노출된 암컷까지 함께 덩달아 잡을 확률이 높아지죠. 사슴 수렵을 관리하는 미국 각 관청에서는 사냥(hunt)이 아니라 수확(harvest)라는 말을 쓸 정도입니다. 그만큼 사슴잡이는 단순한 수렵 이상의 가을걷이라는 의미가 깃들어 있는 거죠. 욕망에 눈이 멀어 조심성없이 날뛰다 쓰러진 수사슴 입장에선 씨를 뿌리려다 피를 뿌린 셈이 됐습니다. 이 한맺힌 죽음을 맞은 일부 개체들은 가슴팍까지 잘려나간 뒤 박제돼 장식용으로 벽에 걸리기도 할 것입니다.

과도한 욕망은 파멸을 부르기 마련입니다. 그 극적인 사례가 바로 박치기 도중에 뿔이 얽혀버리는 상황이에요. 나뭇가지 치듯 우람하고 아름답게 자라난 수사슴의 뿔은 발정기 때 누가 더 많은 암컷과 몸을 부둥킬 수 있을지 ‘흘레권’을 두고 수컷들이 맞붙들 때 중요한 무기가 됩니다. 두 마리 수컷이 정면으로 뿔을 맞부딪칠 때 나는 ‘따닥’ 하는 굉음이 지축을 진동합니다. 수컷들의 격렬한 박치기를 담은 동영상(WildlifeOnVideo Youtube) 잠깐 보실까요?

승자와 패자가 명확히 가려져야 할 뿔싸움이, 모두가 죽는 비극으로 끝나는 경우가 종종 일어난다는 겁니다. 서로 부딪치면서 얽힌 뿔이 끝내 풀리지 않으면서 두 마리 수컷이 정말 원치 않던 방식으로 한 몸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씩씩대면서 불 같은 눈으로 상대방을 째려보던 두 마리 수컷의 지능은 불행히도 ‘조립은 분해의 역순’으로 서로 협력하고 의지해서 이 꼬인 뿔타래를 풀만할 정도로 높지 못합니다. 부둥킬수록 뿔에 얽매이고 단련시켰던 목근육이 죄어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죽음의 공포를 느낄지도 모릅니다. 비극적 동병상련이죠. 이럴 바에는 그저 회색곰의 후려치기 한방에 나가떨어져 고통없이 삶을 마감하는게 나을지도 모릅니다. 뿔로 하나가 된 수컷 두 마리가 시차를 두고 서서히 혼이 빠져나가거나, 아니면 산놈이 죽은놈의 몸뚱아리를 끌고, 숲의 유령처럼 배회하는 괴이쩍인 장면이 연출됩니다. 포수건, 천적이건 사냥하는 자의 입장에서는 누워서 떡먹고, 손안대고 코푸는 상황이 펼쳐집니다. 일석이조, 아니 일석이록(一石二鹿)이군요. 바로 보실 사진처럼 말이죠.

죽은 다른 사슴(오른쪽) 사체를 뿔에 매달고 다니던 사슴(왼쪽)이 막 사냥당한 직후의 모습. /Kentucky Department of Fish and Wildlife Resource. Joe Mattingly Facebook

이 사진은 뿔이 얽힌 채 다른 놈 끌고 무겁게 발걸음을 옮기다가 사람에게 ‘수확’당한 사슴의 최후를 담은 사진(Kentucky Department of Fish and Wildlife Resourse Facebook)입니다. 혼이 빠져나간채 잿빛으로 썩어문드러져가고 있는 몸뚱이를 머리에 달게 된 이 수사슴이 뜻한바대로 승리를 쟁취해 흘레붙었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습니다. 어쩌면 살아도 산게 아닌 신세였던 이 사슴에게 고통스러운 삶을 마감해준 인간은 긍정적 의미든, 부정적 의미든 교착된 상황을 마감해준 종결자가 됐습니다.

뿔이 얽힌 채 죽은 두 수사슴의 사체가 제법 시간이 오래지난뒤에 발견됐다. /Brandon Mann. Field and Stream

위 사진 역시 뿔이 얽힌 채 원치않게 한몸처럼 부둥켜 모두 불귀의 객이 돼버린 수사슴의 사체가 발견된 상황을 담고 있습니다. 풍상을 고스란히 맞은 몸뚱아리가 마치 세월의 더께를 두른 미라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유전자를 품고 있던 정소(精巢)들도 다른 내장기관들과 함께 스케빈저(시체를 파먹고 사는 짐승)들의 밥이 됐거나, 서서히 비와 바람을 맞으며 풍화됐겠죠. 뼈와 거죽만 남아있지만 뿔은 얽히고 설켜서 투쟁당시의 극한 상황을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액세서리가 되어 어딘가에 내걸릴 것입니다. 살아남아서 종족 번식의 대를 다하는 게 대체 얼마나 어려운 모험인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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