恨 맺힌 ‘구한말’ 영웅들 경기도 지원 대상서 제외 [잃어버린 무명의병을 찾아서]
도내 105개 전투·6천971명 참전...독립운동 모태 구한말 의병은 빠져
경기일보는 1년 전 역사문화콘텐츠연구원과 함께 ‘잃어버린 무명의병을 찾아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일본의 토벌 기록 속 사살 숫자로 남겨지기까지 뜨겁게 피고 졌던 이들의 흔적을 찾아 이제라도 기억하려는 첫걸음이었다. 1년 뒤인 지금, 경기일보는 구체적인 실행의 발걸음을 이어나간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이들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올리는 것이, 그들이 일궈 놓은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편집자주
1907년 10월6일 (평택)진위 동방 약 30리 지점, 30여명 참여, 8명 사망. 1908년 2월 7일 파주 적성 남방 약 30리 지점 80여명 참여, 80명 사상. 1907년 12월26일 포천군 내동면 진목리 부근 250여명 참가, 90명 사망. 1908년 1월9일 포천 서북방 200여명 참여, 20명 사망. 1908년 1월29일 이천 음죽 서방 약 20리 지점 40여명 참여, 34명 사망. 경기도내 총 전투지역 105곳, 참가 의병 수 6천971명, 사상자 1천288명.(대부분 사망)
이름은 없다. 110년 전 일제의 조선주차군사령부(朝鮮駐箚軍司令部)가 써내려 간 의병 탄압 기록지인 ‘조선폭도토벌지’ 속 지역, 일자와 함께 사살 숫자로만 남겨졌다. 가족도, 고향도, 평범한 삶도 버렸다. 남루한 옷차림, 성한 것이 하나 없는 총만 가진 채 대한제국 말기 국권을 지키려고 투쟁에 나섰다 불꽃처럼 사라진 의병들이다.
1910년 8월22일 한일병합조약 강제 체결로 대한제국은 멸망했지만 우리 민족은 식민지 통치 초기 내내 일제에 맞서 싸웠다. 그 선도엔 을미사변 이후인 1895년부터 1910년인 한말, 경기도를 포함해 전국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의병들이 있었다. 한말 의병의 항일투쟁은 일제를 몰아내는데 성공하진 못했지만 여러 해 동안 일제의 강점을 지연시켰다. 이후 만주나 연해주로 이동해 지속적으로 독립군 또는 광복군과 연계해 독립운동의 모태가 됐다.
경기도는 구한말 ‘의병 역사의 산실’이자 ‘의병 격전지’였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촉발된 을미의병이 일어난 후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90여곳에서 일본군에 맞선 전투가 벌어졌다. 경기도 출신으로 의병전쟁에 참여해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은 의병은 216명. 이들은 전투 중 체포돼 교수형을 당하는 등 순국하거나 옥고를 치렀다. 순국한 이들의 상당수는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이외에 숫자로도 남지 않은 무명의병의 수는 가늠할 수 없다.
하지만 정작 이들을 기리는 기념사업이나 보훈 등은 지자체 단위에서 제각각 이뤄질 뿐이다.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을 한 이들을 기리는 ‘경기도 항일운동 유적 발굴 및 보존에 관한 조례’와 ‘경기도 독립운동기념사업 지원조례’에서 구한말 의병은 대상에서 빠져 있다. 경기도 단위에서 이들의 기록을 찾거나 기릴 근거 자체가 없는 셈이다.
정자연 기자 jjy84@kyeonggi.com
김보람 기자 kbr13@kyeongg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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