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버지니아] 美 프론티어 정신의 발상지 '하퍼스 페리'를 아시나요

정영훈 외대산악부OB·재미대한산악연맹 워싱턴D.C 2023. 10. 2. 07:2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매릴랜드 고지에서 바라본 하퍼스 페리의 석양.

가을이 오면 고향생각이 간절하다. 찬바람이 오면 향수가 깊어진다. 고향이란 정서는 시와 노래의 단골 소재다. 존 덴버의 '테이크 미 홈 컨트리 로드Take Me Home Country Road'도 미국인의 향수를 잘 표현한 곡 중 하나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웨스트버지니아의 산과 강이 생각나는 노래다.

웨스트버지니아의 '하퍼스 페리Happer's Ferry'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이란 수식어가 딱 어울리는 마을이다. 그만큼 옛 미국의 정서를 한껏 누릴 수 있다. 워싱턴 D.C에서 시골길을 따라 두어 시간쯤 걸리는데 도심을 벗어나 산길로 들어서면 농장, 과수원, 포도원들이 시골의 정취를 더해 준다. 말을 타고 이동하는 카우걸Cow girl과 카우보이도 볼 수 있다.

하퍼스 페리는 세 개의 주(매릴랜드, 버지니아, 웨스트버지니아)가 만나는 곳에 위치해 있다. 셰난도어강과 포토맥강의 상류가 만나는 곳으로 아름답고 작은 산골이다. 풍성한 역사를 담고 있기도 하다. 셰난도아강과 블루리지에 기대어 살고 있는 사람들의 어제와 오늘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서 하퍼스 페리는 미국사람 누구나 한 번쯤 와보고 싶어 하는 곳이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돼 있어 법의 보호를 받아 옛 마을 경관이 그대로 보전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미국을 상징하는 서부를 향한 개척(프론티어) 정신과 남북전쟁의 갈등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애팔래치안산에서 발원한 셰난도아는 굽이굽이 사행천을 이루며 흐르다가 하퍼스 페리에서 포토맥 강물과 하나가 된다. 여기부터는 포토맥이 셰난도아 강물을 안고 워싱턴 D.C를 거쳐 대서양으로 흘러간다. 하퍼스 페리라는 마을 이름은 이곳에서 나룻배Ferry를 몰았던 로버트 하퍼Robert Happer에서 온 것이다. 철로와 다리가 놓이면서 나룻배는 없어졌지만 하퍼라는 이름은 남게 됐다.

루이스&클락 탐험대가 훈련을 위해 사용했던 도구들이 보존된 전시관.

루이스&클락 탐험대 훈련장

잠시 역사 이야기를 해보자. 미국이 국가의 모습을 갖추어 가던 시기,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프랑스로부터 당시 미국 영토의 2배가 넘는 루이지애나 땅을 사들였다. 그때의 루이지애나는 지금의 뉴올리언스가 있는 작은 주가 아니었다. 미시시피강 주변 지역과 그 서쪽 땅을 모두 포함하고 있었다. 현재의 루이지애나, 아칸소, 오클라호마, 미주리, 다코타, 아이오와, 네브래스카, 캔자스, 미네소타, 콜로라도, 와이오밍 그리고 몬타나주까지 포함하는 광대한 땅이다. 프랑스는 이 땅을 1에이커(약 1,200평)당 4센트라는 헐값으로 미국에 팔게 된다. 프랑스에서 온 사람들은 농경과 정착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강과 수로를 따라 이동하면서 모피사냥을 즐겼다.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는 어차피 통치가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토머스 제퍼슨은 미국인이 가장 좋아한 대통령 중 하나다. 독립선언서의 기초를 작성하고 신생독립국 미국의 초석을 다진 인물이다. 그는 루이지애나 땅을 사들인 후 이곳을 탐사하기 위한 탐험대를 조직했다. 은퇴군인 메리웨더 루이스와 제퍼슨의 전우였던 윌리엄 클락을 탐험대장으로 정했다. 이들을 '루이스&클락 탐험대'라고 부른다.

루이스&클락 탐험대가 서부 개척을 위해 훈련했던 곳이 바로 하퍼스 페리다. 그들은 이곳에서 뗏목과 카누를 만들었다. 강을 거슬러 오르는 연습과 오지 생존 훈련도 했을 것이다. 훈련을 마친 그들은 1804년 탐험을 시작한다. 떠날 때는 탐험이 3년 이상 걸릴 것이라고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탐험대는 미시시피강을 거슬러 오르고 로키산맥을 넘었다. 옐로스톤 지역을 지나고 스네이크강을 따라 서북부로 이동했다. 콜롬비아강의 원류를 찾고 그 물줄기를 따라 내려와 태평양에 다다른다. 하퍼스 페리에는 루이스&클락 탐험대가 훈련을 위해 사용했던 도구들이 보존되어 있다.

하퍼스 페리로 들어가는 철제 다리.

남북전쟁 도화선, 존 브라운의 봉기

남북전쟁이 일어난 불씨도 하퍼스 페리에서 찾을 수 있다. 전쟁이 시작되기 몇 해 전, 노예제도 폐지를 위한 무장 봉기가 하퍼스 페리에서 일어났다. 존 브라운은 급진적인 노예폐지론자였다. 그는 무장을 하고 정부군과 싸우다 결국 교수형에 처해졌다. 존 브라운의 무장투쟁은 노예제도를 혐오하는 북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때 사람들은 노예제도가 갖고 있는 문제는 정치적으로 해결될 수 없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렇게 존 브라운이 죽은 후 4개월 만에 미국 역사상 가장 불행한 남북전쟁이 시작되었다.

북군은 존 브라운을 추모하며 군가에 그의 이름을 넣어 불렀다. "존 브라운의 주검은 썩을지라도, 그의 혼은 계속 행군할지어다!"라는 가사다. 후렴구에는 "영광, 영광, 할렐루야!"를 몇 번 반복한다. 이 곡조는 기독교인이라면 익숙한 '마귀들과 싸울지라'로 시작되는 찬송가의 원곡이다. 본래 이 노래는 매사추세츠 민병소방대의 야외집회를 위해 작곡된 것이었다. 노래는 구전으로 전해지면서 여러 가지 변형된 가사로 불렸다. 북군의 병사들은 '존 브라운 시체'라는 제목으로 이 노래를 부르며 행군했던 것이다.

줄리아 하우는 시인이며 노예제 폐지를 지지하는 시민운동가였다. 그녀는 워싱턴 D.C에 머무르는 동안 이 군가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을 '공화국 전승가The Battle Hymn of the Republic' 라는 제목으로 개사했다. 북군을 위한 공식적인 행진곡이 만들어진 것이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약 20년 후 윌리엄 스테프는 곡의 창작자가 본인이라고 밝힌다. 소방대 친구의 부탁으로 그 곡을 썼다고 한다.

하퍼스 페리로 가는 길에 만난 웨스트버지니아의 카우걸들.

애팔래치안 트레일 본부 위치

하퍼스 페리는 애팔래치안 트레일을 종주하는 사람들에겐 위로와 휴식을 주는 곳이다. 이 트레일(2,194마일)은 미국 남부 조지아에서 캐나다 국경 부근 메인까지 애팔래치안산맥을 따라 걷는다. 서부의 퍼시픽 트레일(2,653마일), 중부의 콘티넨털(3,028마일)과 더불어 미국의 3대 트레일이다.

애팔래치안 트레일의 시작 지점인 조지아주의 스프링어산과 끝인 메인주의 캐타딘산의 지리적 중간 지점이 하퍼스 페리다. 이곳에 도착하면 하이커들은 절반 이상 걸었다는 심리적 위로를 받는다. 그들은 하퍼스 페리에서 장비와 식량을 보충하고 휴식을 취한다. 걷느라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가족, 친구들도 여기서 약속하고 만난다. 그러니 하퍼스 페리에 애팔래치안 트레일 본부가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퍼스 페리를 한눈에 보기 위해서는 매릴랜드 고지Maryland Height를 올라야 한다. 이곳은 100여 m 암벽 위에 위치해 있다. 등산객들은 절벽을 우회해 정상에 설 수 있다. 수직으로 솟은 암벽에는 10여 개의 등반 코스가 개척되어 있다. 하강 훈련이 필요하거나 원정을 위해 주마링 훈련이 필요한 등반가들이 이곳을 찾기도 한다.

매릴랜드 고지 절벽 끝에서 강 너머 하퍼스 페리를 내려다 볼 수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정면은 웨스트버지니아, 왼쪽은 버지니아 주다. 정상 발아래가 세 개의 주(버지니아, 매릴랜드, 웨스트버지니아)가 만나는 지점이다. 원래 웨스트버지니아는 버지니아의 일부였다. 그런데 남북전쟁 시기, 흑인들의 노동력이 필요 없었던 산악지대 사람들은 노예제를 유지하려는 사람들과 뜻을 같이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버지니아로부터 분리됐다.

지정학적으로 하퍼스 페리는 남북전쟁의 격전지였다. 셰난도아강을 사이에 두고 남과 북이 대치하는 상황이 이어졌고 여러 차례 전투가 있었다. 이곳에서 승리한 남군은 최후의 결전을 위해 인근의 게티스버그 평원으로 진격했다. 그 유명한 게티스버그전투다. 여기서 남군은 패하고 승리한 북군은 기세를 놓치지 않고 전쟁의 승자가 된다. 매릴랜드 고지에는 아직도 그때 사용했던 참호와 포격 진지가 남아 있다.

셰난도아강에서 낚시와 카누를 즐기는 사람들.
셰난도아강에서 낚시와 카누를 즐기는 사람들.

아찔한 셰난도아 튜빙의 추억

하퍼스 페리는 맑은 물을 찾아 튜빙, 카누, 낚시를 즐기러 온 사람들로 늘 분주하다. 튜빙은 튜브에 몸을 맡기고 물길 따라 둥둥 떠내려 오는 한가로운 놀이다. 어떤 이들은 별도의 튜브에 맥주를 채운 아이스박스를 끌고 내려오기도 한다. 엉덩이를 물에 넣고 반쯤 누운 자세로 들이켜는 차가운 맥주는 낭만 그 자체다. 보는 이도 기분이 좋아지는 신선놀음이다.

그러나 막상 직접 해보면 결코 쉽지 않은 놀이다. 몇 해 전 이곳에 튜빙을 하러 왔었다. 아이들이 할머니도 모시고 가자고 해서 집안 3대가 다 출동한 여행이었다. 가뭄이 한창이었던 시기라 강물의 수심이 무릎이나 허리까지밖에 오지 않았다. 물은 아주 천천히 흘렀다. 튜빙의 장점은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것이고, 단점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방향을 틀려고 해도 물을 헤칠 수 있는 것이 없다. 손바닥을 노처럼 써도 미약하다. 할머니는 튜브를 이동시키지 못하는데다 무게 중심을 잃고 계속 뒤집히기만 했다. 복부 힘도 부족해 튜브에 끼어버린 엉덩이를 끌어올리지 못했다. 튜브는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물에 잠긴 엉덩이는 수면 가까이 돌출된 바위를 쓸면서 내려가곤 했다. 결국 아내가 할머니 튜브를 잡고 끌면서 물속을 걸어야 했고, 할머니의 엉덩이는 계속 수난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강의 상류에서는 딸이 여울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 빠른 물살을 타고 가다가 낙차가 있는 물줄기 아래로 고꾸라졌던 것이다. 이미 물을 한 차례 먹은 상황이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중심을 못 잡고 한 곳만 맴돌며 "아빠! 오빠!"만 부르고 있었다.

강의 가운데에서는 아들이 헤매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려면 강가로 이동해야 하는데 순식간에 강 중앙으로 흘러간 것이다. 그대로 떠내려가면 물살을 헤치고 다시 올라올 수 없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아들에게 수영해서 강가로 오라고 소리쳤다. 아들은 헤엄을 쳤지만 물살에 떠내려가더니 결국 아래로 밀려가고 있었다. 우리는 폭 1km 정도의 넓은 강에서 이산가족이 되어 생존의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그후로 튜빙은 절대 안 한다.

셰난도아 상류의 브룩 송어 서식지.

송어가 대기오염 척도

셰난도아강에는 다양한 종류의 물고기들이 있다. 물 맑은 계곡에는 브룩 송어Brook Trout가 살고 있다. 이 물고기는 북극 인근 얼음 호수에서도 살 수 있는 냉수어종이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크기로 다른 송어에 비해 작다.

흥미롭게도 브룩 송어는 셰난도아와 블루리지의 대기오염 정도를 알려 주는 물고기다. 공기의 질이 나빠지면 송어의 먹이가 되는 작은 곤충들이 감소하고, 브룩 송어 개체수도 줄어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맑은 물에서 잘살기 때문에 산성비가 내려 수질이 오염되는 것도 문제다.

과거에 비해 이곳을 지나는 차량이 더 많아졌다. 더디지만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다. 웨스트버지니아 산골이 언제까지 깨끗한 자연을 지키고 있을지 모르겠다. 커져가는 도시와 밀려오는 차량으로 자연생태가 위협받고 있다고 한다. 많은 추억을 갖게 해 준 고향 같은 산골 마을 하퍼스 페리가 아름다운 모습으로 오래 남기를 바란다.

월간산 10월호 기사입니다.

Copyright © 월간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