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 선생’을 아시는지? 난세 속 연휴의 책장

한겨레 2023. 10. 1.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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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선생이 읽을 책들은 과연?
그림 김태권

편 선생을 아시는지?

1980~90년대에 나온 이른바 ‘사회과학 서적’ 가운데 적지 않은 책이 ‘편집부 지음’ 또는 ‘편집부 옮김’으로 출판됐다. 많은 사람이 짐작했다. 지은이나 옮긴이의 이름을 숨겨, 공안당국에 잡혀가지 않게 하려는 출판사의 배려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 짐작이 사실이 아니라면? 진짜 이름이 ‘편집부’라는 전설의 작가가 있어, 이 모든 책을 몸소 냈다면?

성은 편, 이름은 집부. 나는 편 선생을 생각한다. 한때 그는 세상 모든 문제에 대해 자신 있게 풀이를 내놨더랬다. ‘이론’의 힘이었다. 지금 세상은 책으로 못 헤아릴 요지경이다. 그래도 편 선생은 포기하지 않는다. 책을 읽고 또 읽는다.

여기는 편 선생의 좁은 방. 벽마다 책이 겹겹 꽂혔고, 바닥에 책 상자가 층층 쌓였다. 좁은 책상 위 번역할 때 쓰는 낡은 노트북 한대가 놓였고, 여러권의 책이 펼쳐져 있다.

한가위 긴긴 연휴에 편 선생이 읽을 책은 무얼까?

제3제국사(1~4권)
윌리엄 L. 샤이러 지음, 이재만 옮김 l 책과함께 l 2023년

옛날 옛적에 ‘제3제국의 흥망’(1~4권)이라는 제목으로 나왔던 책이다. 이번에 다시 나왔다. 번역도 새롭고 표지도 고급스럽다.

샤이러는 미국인 기자다. 2차대전이 일어나기에 앞서 유럽을 들락거리며 취재했고 전쟁이 터진 뒤 종군기자가 됐다. 히틀러가 집권하는 과정도, 나치 독일이 전쟁을 치르며 어떻게 몰락하는지도, 미국 사람치고 가까이서 지켜봤다. 나중에 ‘좌경용공’으로 몰려 언론계를 잠시 떠나는데 이때 자료를 엮어 ‘제3제국’의 역사를 썼다. 제3제국은 히틀러 패거리가 나치 독일을 부르던 이름. 지은이가 오랫동안 기자를 하던 사람인데다 몸소 보고 들은 이야기를 곁들인 덕에 책이 생생하고 활력 있다. 연휴에 어울리는, 두껍지만 잘 읽히는 책.

편 선생은 왜 지금 히틀러를 읽을까?

세상은 난세다. 나라마다 속으로 곪아 민주주의는 위기이고, 나라끼리 전쟁의 기운이 감돈다.(중국이 대만을 정말 치면 어쩌나? 편 선생은 걱정이다.) 20세기 후반에는 힘 있는 나라 사이에 조심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2차대전에 대한 기억이 살아 있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히틀러의 기억이 빛바랜 요즘 세상은, 민주주의도 국제질서도 위기다. 파시즘이 얼마나 끔찍했던가 인류의 기억을 되살려야 한다고 편 선생은 생각한다.

편 선생이 아끼는 히틀러 책이 있다. ‘히틀러 Ⅰ’과 ‘히틀러 Ⅱ’(이언 커쇼 지음, 이희재 옮김 | 교양인 | 2010년)다. 역사학자가 쓴 책이지만 좋은 번역 덕분에 술술 읽힌다.

책상 한편에는 두꺼운 책 ‘1945’(마이클 돕스 지음, 홍희범 옮김 | 모던 아카이브 | 2018년)가 서 있다. 나치가 몰락한 뒤 이어지는 내용이 돕스의 ‘냉전 3부작’이다. 마이클 돕스의 입담은 대단하다. 냉전의 주요 순간을 우리가 직접 겪는 것 같다.

AI 2041
리카이푸·천치우판 지음, 이현 옮김 l 한빛비즈 l 2023년

편 선생의 책상에는 인공지능에 대한 책도 있다. 옛날 이념 서적을 쓰던 편 선생이 인공지능에 관심을 가지다니? 하지만 놀랄 일이 아니다. 편 선생이 옛날에 공부하던 책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생산력이 늘면 생산관계가 달라지고 사회가 변화한다’고 말이다. 편 선생은 마음 한구석에서 아직도 세상을 바꿀 기대를 하는 걸까?

새로 등장하는 인공지능이 민주주의의 친구가 될지, 민주주의에 위협이 될지 또한 편 선생은 궁금하다.

‘AI 2041’이라는 책은 구성이 튄다. 인공지능 때문에 2041년에는 우리 사는 세상이 어떻게 바뀌어 있을까? 쟁점과 쟁점마다 과학소설(SF) 단편과 해설하는 글을 나란히 붙였다. 천치우판이 소설을 짓고, 구글과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일한 리카이푸가 해설을 썼다. 과학소설만 읽거나 해설만 읽는 것보다 잘 읽힌다. 어떤 쟁점은 과학소설보다 해설하는 글이 재밌기도 하다.

2041년은 지금과 다르면서도 닮았다. 인공지능의 발달 때문에 사회와 제도가 바뀌기 시작하는 참이다. 생명보험과 인공지능의 이런 결합은 어떤가? 건강하게 오래 살 행동을 하면 보험금을 깎아주고, 위험한 행동을 하면 보험금을 올린다면? 합리적인 듯 보이지만 바람직하지 않다. 못사는 친구를 만나러 가난한 동네에 들어갈 때마다 보험금이 뛰기 때문이다. 인간 사회의 편견을 인공지능이 물려받는다. ‘AI 2041’ 책에 생각할 거리가 많다.

헨리 키신저와 친구들이 쓴 ‘AI 이후의 세계’(헨리 A. 키신저·에릭 슈밋·대니얼 허튼로커 지음, 김고명 옮김 | 윌북 | 2023년)라는 책도 읽는다. 한때 편 선생은 ‘제국주의자’라며 키신저를 꺼렸다. 지금은 그의 통찰과 입담에 마음을 열었다. ‘AI 이후의 세계’는 통찰은 기대대로인데 입담은 아쉽달까.

편 선생이 주위에 권하는 책이 있다. ‘비전공자도 이해할 수 있는 AI 지식’(박상길 지음, 정진호 그림 | 반니 | 2023년)이다. 어려운 이야기도 있지만 글과 그림이 친절해 잘 읽힌다. 요즘 화제인 챗지피티(ChatGPT)의 원리도 풀이돼 있다.

초단편 소설 쓰기
김동식 지음 l 요다 l 2021년

편 선생이 읽는 세번째 책이 흥미롭다. 김동식 작가의 ‘초단편 소설 쓰기’다. 그러고 보니 옛날에도 ‘변증법적 유물론’ 따위를 짧은 우화로 풀어낸 책들이 있었다. 편 선생도 이런 글을 쓰려는 걸까?

아닐 것 같다. 김동식 작가는 경고했다. “요즘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소설은 독자를 계몽하겠답시고 가르치려 드는 소설이 아닐까? 글에 메시지를 넣는 것은 좋지만, 메시지만을 위한 글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독자는 바보가 아니다. 글에서 계몽 의지가 엿보이는 순간 지체 없이 분노한다.” 편 선생은 이 구절에 모나미153 볼펜으로 밑줄을 쳐두었다.

편 선생도 이제는 안다. 이야기는 이념을 실어 나르는 도구가 아니다. 그 자체로 즐거운 거다.

읽는 일도 즐겁지만 쓰는 일도 즐겁다(마감만 밭지 않다면 말이다). “이 책 한 권으로 초단편 작가가 될 순 없겠지만, 초단편 쓰기라는 취미를 얻을 순 있다고 믿는다.” 김동식 작가는 초단편 쓰기가 좋은 취미라 했다. 편 선생도 취미로 초단편 소설을 쓰려는 걸까?

애서가로 자처하는 우리도, 한가위 동안 꼭 벽돌책을 읽으려고 씨름할 필요는 없다. 긴 연휴 동안 두꺼운 책을 읽는 대신 짧은 이야기 한편을 써보는 것은 어떨까. 움베르토 에코의 말처럼 인간은 이야기를 좋아하는 동물이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친절한 작법서도 많이 나왔다. 직접 이야기를 짓는 일도 옛날처럼 어렵고 막막하지 않다. 창작을 경험하면 나중에 남의 이야기를 읽을 때 글 보는 눈이 또 다를 터이다.

편 선생은 재치 있는 문장을 좋아한다. 수사학을 소개하는 ‘문장의 맛’(마크 포사이스 지음, 오수원 옮김 | 비아북 | 2023년)을 읽는다. 마크 포사이스는 ‘걸어 다니는 어원 사전’을 쓴 작가다. 아는 것이 많고 입담이 훌륭하다. 가끔 무리한 유머를 시도하지만, 늘 진지한 편 선생은 이 또한 부럽다.

오디세이 세미나
대니얼 멘델슨 지음, 민국홍 옮김 l 바다출판사 l 2019년

네번째 책은 ‘오디세이 세미나’다. 편 선생이 한가위에 이 책을 읽는 이유는 연휴에 고전 문학을 읽고 싶어서만은 아니다. 가족에 관한 책이기 때문이다.

“많은 일을 겪은 오뒷세우스.” 시인 호메로스는 그를 이렇게 불렀다. 혼란한 세상을 몸으로 헤쳐나간 사람, 그의 모험담이 ‘오뒷세이아’다. 미국의 문학 평론가 대니얼 멘델슨이 서사시 ‘오뒷세이아’를 대학에서 강의한다. 그런데 여든 넘은 그의 아버지가 뜻밖의 부탁을 한다. 아들의 수업을 청강하러 강의실에 오겠다는 것이다. ‘오디세이 세미나’는 아버지가 아들의 강의를 듣는 이야기다.

특히 마음에 사무치는 점이 있다. 낯설고 어려운 서사시 ‘오뒷세이아’ 또한 알고 보면 가족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작품 첫머리는 행방불명된 아버지 오뒷세우스를 찾겠다며 아들 텔레마코스가 모험을 떠나는 장면. 끝내 오뒷세우스가 돌아오려는 곳도 가족의 곁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각자 모험하는 서사시를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읽는다. 지은이 멘델슨은 자기 집안 이야기를 서사시 ‘오뒷세이아’와 버무려 담담하게 풀어낸다.

추석은 가족의 명절. 그런데 요즘 가족은 옛날과 다르다. 편 선생과 친구들 집집마다 요양병원에 모신 어르신이 있다. 삶의 방식은 바뀌었지만 가족의 빈자리를 볼 때 드는 애틋한 마음은 옛날과 같다. 한가위에 편 선생은 가족을 생각하며 ‘오디세이 세미나’를 읽는다.

책은 술술 잘 읽힌다. 다만 호메로스가 지은 시 구절을 우리말로 옮길 때 그리스어 원전 번역을 참고했다면 좋았을 텐데 아쉬움이 있다.

원전 번역은 천병희 선생의 옛 번역 ‘오뒷세이아’(숲)가 유명하다. 이준석 교수의 새 번역 ‘오뒷세이아’(아카넷)도 곧 출판될 것이다. 어떻게 벌써 아냐고? 지금 북 펀딩을 한다. 편 선생도 북 펀딩에 참여해 책을 기다린다.

에픽테토스 강의 1·2, 에픽테토스 강의 3·4
에픽테토스 지음, 김재홍 옮김 l 그린비 l 2023년

한때 편 선생과 뜻을 같이하던 친구들. 몇은 보수정당에 갔고 몇은 삶에 치여 연락이 끊겼다. 미국 싫다며 푸틴을 편드는 이도, 북한에 실망했다며 일본 하는 일은 뭐든 좋다는 이도 있다.

됐다. 다른 사람 일로 명절에 마음 상해 무엇 하랴. 편 선생은 고대 철학자 에픽테토스를 읽으며 위로를 받는다.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들과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들”을 구별하라고 에픽테토스는 말했다. 죽음이나 사회적 지위나 남의 평판 따위는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 집착해봐야 어리석은 일이다. 마음만 상할 뿐이다.

“에픽테토스가 일관되게 전하는 메시지는 자기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을 애초에 바라지 말라는 것”이다. ‘에픽테토스의 인생수업’(오기노 히로유키 지음, 가오리·유카리 만화, 황혜숙 옮김 | 삼호미디어 | 2020년)은 읽기 편안한 입문서다. 에픽테토스의 철학을 만화와 버무려 술술 읽히게 풀어놓았다.

에픽테토스를 좋아하는 편 선생은 이번 연휴, 원전에 도전한다. 두꺼운 책 ‘에픽테토스 강의’가 올해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왔다. 원전을 번역한 김재홍의 말이 뭉클하다. “작업을 시작하고 속도가 붙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나에게 신체의 병인 ‘뇌경색’이 닥쳐오고 말았다.” 자기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며, 옮긴이는 더욱 에픽테토스에 매달렸다고 한다. “요사이 세상일에 마음 상한(?) 분이 많은 듯하다. 이 책이 혹시 ‘육체의 가시’를 안고 사는 사람들이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바란다.”

편 선생의 책상에는 이런 책들이 올라 있다. 한가위 긴 연휴 동안 독자님도 각자 읽을 책을 골라두셨을 터이다. 한때 우리 또한, 책이 세상을 구할 수 있다고 믿던 편 선생이었으니.

김태권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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