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터스 골프장 벙커의 모래가 미국 반도체 패권의 비밀 병기라고? [김기철의 역사를 바꾼 사물들]

김기철 기자(kimin@mk.co.kr) 2023. 10. 1. 0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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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철의 역사를 바꾼 사물들 14 - 인류에게 살 곳을 제공한 작은 알갱이 , 모래.

마스터스 골프대회가 열리는 미국 조지아주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코스의 11~13번 홀을 ‘아멘 코너’라고 부른다. 하도 어려워서 세계적인 프로 골퍼들도 ‘아멘(amen)!’ 기도하는 심정으로 샷을 날려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난 2020년 대회에서 6번째 그린 자켓을 노리던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는 아멘 코너 12번 파3홀에서 셉튜플 보기(Septuple bogey), 그러니까 무려 7 오버파를 기록했다. 그린 앞 연못에 3번, 그린 앞뒤의 벙커에 2번 빠진 탓이다.

하얀 벙커가 인상적인 오거스타 내셔널 클럽의 모습
오거스타의 벙커는 골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다. 밀가루처럼 유난히 곱고 하얀 모래로 이루어져 있어서 폭파하듯이 내리쳐야 빠져나올 수 있다.

오거스타 벙커의 모래는 오거스타에서 북쪽으로 300km쯤 올라가면 나오는 노스캐롤라이나주 스프루스 파인에서 온 것이다.

애팔래치아 산맥 동쪽 골짜기(valley)에 자리한 스프루스 파인은 미국의 원조 ‘실리콘 밸리’다. 이곳에서 나는 석영(quartz)이라는 광물에서 순도 99.999999999%의 실리콘이 생산될 수 있었고 이것이 트랜지스터의 재료로 활용됐기 때문이다.

스프루스 파인에서 생산되는 석영에서 트랜지스터 등에 활용되는 고순도 실리콘을 뽑아 내고 남은 조각들은 새하얀 모래가 된다. 이 모래가 바로 오거스타를 상징하는 하얀 벙커의 모래로 쓰인다. 그러니까 최첨단 휴대폰에 들어가는 고순도 실리콘과 타이거 우즈가 마스터스에서 벙커샷을 날리던 벙커의 새하얀 모래는 모두 같은 고향을 두고 있다. 어떤 모래는 첨단 장비의 재료가 되고 어떤 모래는 골프장의 벙커가 된다.

‘모래성’ ‘사상누각’이라는 말처럼 모래는 무너지기 쉽고 부서지기 쉬운 상태를 상징하는 단어지만 인류 문명, 특히 현대 문명은 모래 위에 세워졌다. 현대의 도시야말로 모래성이고 우리를 연결해주는 것도 모래알들이다.

지금의 세계에서 모래를 모두 사라지게 하면 모든 건물과 도로는 무너져 내릴 것이고 모든 전자제품은 멈출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쓸 수도 없고, 여러분들은 이글을 읽을 수도 없다. 세상은 모래로 구성돼 있고 모래로 움직이고 있다.

로마 문명이 시간을 견딘 이유
이탈리아 사람들을 두고 흔히 ‘조상 잘 둔 덕분에 먹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로마의 유물들이 불러들이는 관광객이 로마의 주요 수입원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수천년 전에 꽃핀 세계 각 지역의 문명 중에서 유독 로마 문명의 유적이 지금까지 예전 모습 그대로 잘 남아 있다. 기원전 다른 문명의 유적 중에는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중국의 만리장성(지금 남아 있는 만리장성의 대부분은 후대에 쌓여진 것들이다) 등 돌로 된 거대 건축물 정도가 남아 있는데 반해서 로마의 건축물 중에는 여전히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들이 많다.

2000년을 버텨온 로마 콜로세움의 모습
로마가 흙과 나무가 아닌 모래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콘크리트는 뛰어난 ‘내구성’ 덕분에 수천 년 동안이나 건축 재료로 사용돼 왔다. 특히 고도의 건축술을 가진 고대 로마인들이 만든 ‘로마 콘크리트’는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단단하게 구조물을 지탱하고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콘크리트 건축물은 2000년 전에 지어진 판테온이다. 거대한 콘트리트 돔으로 덮여 있는 판테온의 지붕은 지금까지도 철근으로 보강하지 않고도 버티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구조물이다.

로마인들이 콘크리트 공법을 어떻게 개발했는지는 명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가설 중 하나는 나폴리 인근의 포주올리 지방에서 운좋게 점성이 있는 물질을 발견해서 그것을 모래와 섞어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물질이 바로 ‘포졸란’이라고 불리는 포주올리 지방의 화산재였다. 포졸란을 모래나 자갈 등과 섞어 사용하니 내구성이 뛰어난 재료가 됐다.

로마인들은 또 콘크리트의 구조적인 문제, 즉 수축과 균열을 해결하기 위해 반죽에 말의 털을 섞어서 사용하기도 했다.

<콘크리트, 지구를 덮다 (Concrete Planet)>의 저자인 로버트 쿠얼랜드는 “로마인들은 콘트리트의 생산과 사용법을 체계화했고, 커다란 거푸집을 짜서 튼튼하고 거대한 건축물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주택과 공공건물은 물론, 공중 목욕탕, 콜로세움, 판테온 등 로마가 자랑하는 건축물은 대부분 콘크리트를 사용한 모래로 지어졌다. 하지만 로마의 쇠퇴와 함께 로마 문명의 기초가 된 콘크리트 공법도 사람들에게 잊혀져 갔다. 그 이유에 대해 작가 마크 미오도닉은 <사소한 것들의 과학>에서 “아마도 콘크리트 공법이 사용되지 않게 된 이유는 근본적으로 그것이 산업의 성격을 띠기에 그만한 산업을 지탱해줄 제국을 필요로 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모래, 콘크리트로 완벽한 건축 재료가 되다
모래가 핵심 건축 재료로 다시 사용된 것은 1300년 후의 일이었다.

1750년대쯤 영국의 토목기사였던 존 스미턴은 플리머스 해안가에 등대를 짓고 있었다. 물속에 쌓은 화강암 덩어리들을 고정시킬 방법을 찾다가 석고 등을 활용한 수경 시멘트 제조법을 생각해냈다.

스미턴의 이 같은 시도가 계속 이어져 ‘로만 시멘트’라는 재료가 만들어졌다. 스미튼의 방식은 자연의 풍파에도 끄떡없다는 사실이 증명됐고 로만 시멘트가 널리 쓰이게 됐다. 템스강 아래로 건설된 터널이 바로 로만 시멘트를 활용한 건축물이었다.

1824년 조지프 애스프딘이라는 벽돌공은 ‘로만 시멘트’를 개선해서 새로운 시멘트 제조법 특허를 받았다. 석회석을 곱게 빻은 뒤 고온으로 굽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만드니 다른 시멘트보다 강도와 내구성이 비교할 수 없게 뛰어났다. 애스프딘이 만든 시멘트의 색깔이 영국 남부 포틀랜드에서 나는 석회석 색깔과 비슷하다고 해서 ‘포틀랜드 시멘트(Portland cement)’라는 이름이 붙었고 이것이 오늘날 사용하는 시멘트의 이름이 됐다.

포틀랜드 시멘트의 등장으로 콘트리트 사용이 늘어났지만 콘크리트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는 건축재료였다. 압축력은 강하지만 인장력은 약했기 때문에 고층건물이나 교각, 교량의 재료로 활용하는 데 한계가 분명했던 것이다.

1867년 프랑스의 자크 모니에라는 정원사가 커다란 나무를 심을 수 있는 화분을 만들다 콘크리트의 인장력을 늘릴 수 있는 돌파구를 찾았다. 콘크리트 안에 철망을 보강하는 방법이었다.

콘크리트가 철근과 만나면서 비로소 건축재료로서 완벽해졌다.

1906년 4월 18일 새벽 강력한 지진파가 캘리포니아 해안을 강타해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대규모 지진과 함께 며칠간 화재가 이어졌다. 리히터 규모 7.8에 이르는 대지진이었다.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불리는 이 재앙으로 최소 3000여명이 희생됐고, 도시의 건물 80%가 붕괴돼 30만명의 사람들이 집을 잃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 인구가 41만명이었으니 사실상 대부분 시민들의 집이 사라진 것이다.

대지진은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당시 샌프란시스코는 미국 대륙에서 태평양으로 통하는 관문 항만으로 위상이 높아져 가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대지진으로 항만 시설이 파괴되면서 그 기능을 대부분 로스앤젤레스에 넘겨주게 된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도시가 파괴된 모습.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이 바꾸어 놓은 것 중 가장 중요한 변화는 건축 재료로서 콘크리트의 우수성을 사람들에게 각인시켰다는 것이다. 몇몇 콘크리트 건물들이 대지진을 견딘 덕분이다. 그중 대표적인 건물이 베킨스사의 창고였다. 기초부터 바닥, 벽면, 지붕까지 모두 콘크리트로 지어진 이 건물이 이재민들을 위한 대피소로 사용되면서 콘크리트 건물이 얼마나 튼튼한지 널리 알려지게 됐다.

미국 지질조사국이 실시한 지진 피해 보고서 작업에 참여했던 미국 공병단의 존 슈얼 대위는 보고서에서 “철근 콘크리트가 지진 충격 속에서 보여준 성능은 부인할 수 없다. 단일한 콘크리트 구조체는 지진 단층 위에 놓여 있지만 않다면 심각한 지진 충격에도 안전하다”고 주장했다.

당시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기업가이자 발명가였던 토머스 에디슨 역시 샌프란시코 대지진 이후 콘크리트 전도사로 나섰다. 지진 발생 후 뉴욕의 한 행사장에서 “다음번에는 어떤 놀라운 발명품을 선보일 계획이냐”는 질문을 받고 에디슨은 “콘크리트 주택”이라고 답했다. 에디슨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 콘크리트 가구, 콘크리트 피아노까지 만들겠다고 했다.

에디슨의 상상이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콘크리트가 도시를 뒤덮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모래 사용량이 폭증했다. 1902년 미국에서 사용된 모래와 자갈은 45만 2000톤이었으나 7년 후에는 5000만톤이 넘었다.

뉴욕의 마천루는 사실 롱아일랜의 모래가 있어서 가능했고 시카고는 미시간호 바닥의 모래를 긁어 모아서 만들어졌다.

고속도로의 탄생
1919년 여름, 미 육군 게티스버그 군사훈련소에서 행정업무를 맡고 있던 젊은 대위는 국방부의 공문 하나를 읽게 됐다. 미국 대륙을 횡단하는 수송대 자원병을 모집하는 공문이었다. 당시 미국 육군은 보급이 확대되고 있던 자동차를 군사 작전 입무에 투입할 수 있을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대륙횡단 작전을 계획했다.

젊은 대위는 주저없이 수송대에 자원했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유럽에서 발발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을 뿐 아니라 동기생들이 전쟁 참전으로 훈장을 받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던 젊은 대위는 책상 앞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대륙횡단 작전에 지원한 것이다. 그 젊은 대위가 나중에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자 미국의 대통령이 되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였다.

차량 81대(트럭, 오토바이, 구급차, 야전 취사장 등)로 구성된 대륙횡단 수송대는 1919년 7월7일 워싱턴DC를 출발했다. 그런데 출발 4시간만에 식당차를 연결하는 장치가 파손됐다. 비포장 도로를 달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군인 시절 아이젠하워 장군의 모습
문제는 자동차의 성능이 아니었다. 길이었다. 아이젠하워는 공문서에 “캘리포니아에 도착할 때까지 사실상 포장도로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었다”고 기록했다. 하루 5km도 이동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툭하면 트럭의 차축이 나가고 팬벨트와 브레이크가 고장 났다. 아이젠하워는 “자동차나 버스나 트럭에는 미래가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우여곡절 끝에 임무를 완수한 수송대는 이런 내용의 보고서를 올렸다. “군사적 목적으로 자동차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차의 품질 개선도 필요하지만, 엉망인 도로를 개선하는 것이 급선무.”

자동차의 보급이 확대되면서 포장도로도 증가했다. 1904년 미국 포장도로의 총 길이는 230여km에 불과했지만 1926년에는 84만km를 넘어섰다. 포장도로 1.6km(1마일)를 건설하는데 대략 모래 2000톤이 들어갔다는 것을 감안하면 미국에서만 얼마나 많은 모래가 사용됐는지를 알 수 있다.

젊은 시절, 도로의 중요성을 절감했던 아이젠하워는 훗날 대통령이 된 후인 1956년 6월 29일, 연방 고속도로법에 서명했다. 총연장 77,017㎞, 거미줄처럼 촘촘한 오늘날 미국의 ‘주간(州間) 고속도로(Interstates Highway)’ 망은 이 법 제정으로 깔리기 시작했다. 아이젠하워가 이 사업에 투여한 모래와 자갈만 15억톤이 넘는다. 이 정도 양이면 지구에서 달로 이어지는 2차선 도로를 왕복으로 만들고도 남을 양이었다.

아스팔트 도로든, 콘크리트 도로든 세계의 모든 도로는 이제는 모래와 자갈로 이루어져 있다. 국제에너지기구는 2050년이면 전세계에 포장도로가 2414만km가 더 놓일 것이라고 예측한다. 지구 전체가 모래로 만들어진 거미줄에 둘러싸일 것이라는 얘기다.

인류가 모래에서 뽑아낸 보물, 유리
인류가 제일 먼저 모래에서 뽑아낸 보물은 유리였다. (김기철의 역사를 바꾼 사물들 10 - ‘관찰’과 ‘실험’을 가능하게 해준 유리 편(https://www.mk.co.kr/news/culture/10810344) 참조)
실험실의 모습. 관찰과 실험을 바탕으로 하는 인류의 과학 발전은 유리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인류는 고대 페니키아인들이 모래톱에서 우연히 발견한 유리 제조 기술을 발전시켜 모래로 유리를 만들고 그 유리로 망원경과 현미경, 그리고 비커와 시험관을 만들고, 이를 도구 삼아 과학을 발전시켰다. 모래로 만들어진 길 위를 달리는 자동차의 유리도 모래로 만들어졌고 모래로 만들어진 빌딩의 창문도 모래에서 왔다.
가장 흔한 재료로 가장 가치 있는 물건을 만든 인류
윌리엄 쇼클리는 1945년 처음으로 반도체 현상을 이론화하면서 ‘고체 상태 밸브’라는 이름을 붙였다. 쇼클리는 실리콘 조각에 전기장을 적용하고 제거하는 장치를 만들었다.

쇼클리는 벨연구소에서 동료 과학자들과 함께 이 현상에 대한 연구를 더 진행시켜 1948년 ‘트랜지스터’라는 이름의 물건을 세상에 내놓았다. ‘타임’지는 당시 ‘작은 뇌세포’라는 커버스토리 제목으로 이 뉴스를 전하며 트랜지스터가 가져올 변화의 방향을 정확하게 예측했다. 이 트랜지즈터가 집적에 집적을 더 한 끝에 오늘날 세계 기술 전쟁의 핵심인 반도체가 됐다.

반도체는 유리에 이어 인류가 모래에서 찾아낸 가장 중요한 발명품이다. 세상에서 가장 흔한 물질인 모래에서 티지털 혁명의 핵심 원소를 발견한 것이다.

그렇다고 세상의 모든 모래로 첨단 핵심 소재를 만들 수는 없다. 모든 모래로 집을 지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첨단 전자 장비에는 고품질 재료가 필요한데 현재 지구상에 알려진 가장 순정한 실리콘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스프루스 파인 인근의 돌산에서 얻는다. 그러니까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수백만 대의 디지털 장비 안에는 스프루스 파인의 작은 모래 알갱이가 들어 있는 셈이다. 오거스타 내셔널클럽 벙커의 하얀 모래와 고향이 같은 모래들이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회의에서 실리콘 웨이퍼를 들고 발언하는 모습
다른 모래에서도 물론 순도가 높은 실리콘을 구할 수 있다. 사염화규소나 삼염화실란을 화학적인 처리를 하면 순도가 높은 폴리실리콘이 나온다. 이 폴리실리콘을 도가니에 넣고 가열하는 과정을 통해서 실리콘의 순도가 높아진다. 하지만 문제는 폴리실리콘을 가열하는 도가니에 다른 물질이 포함되어 있으면 실리콘이 바로 오염돼 버린다는 점이다. 도가니 자체가 순수한 석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이야기다. 여기에 사용되는 재료 역시 스프루스 파인에서 나오는 석영이다. 세계 대부분의 실리콘 공장에서는 스프루스 파인에서 나온 석영으로 만든 가열장치를 사용한다.

스프루스 파인 석영은 톤 당 1만 달러에 팔린다. 석영 광석은 기계와 폭약으로 땅에서 채굴해 분쇄기로 보낸다. 거기서 자갈돌 크기의 석영이 쏟아져 나온다. 가공 처리 공장에서 석영 돌이 미세한 모래로 분쇄된다. 거기에 물과 화학 물질이 첨가되면, 실리콘과 기타 광물이 분리된다. 이렇게 추출된 실리콘은 마지막 공정을 거쳐 분말 형태로 부대에 담기고, 정련 공장으로 보내진다. 나머지 가루는 골프장 벙커의 하얀 모래로 사용된다.

기술이 발전했지만 인간이 자연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미국에서 반도체 기술이 태동했지만 스프루스 파인의 순도 높은 석영이 없었다면 이 기술이 산업화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의 혁신 엔진인 실리콘 밸리는 샌프란시스코 옆에 있지만 실제 혁신 산업을 지탱하는 실리콘은 바로 노스캐롤라이나 스프루스 파인에서 나온다. 이곳이야 말로 말 그대로의 실리콘 밸리인 셈이다.

21세기 지정학을 바꾼 모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외교 정책의 중심은 중동이었다. 중동의 석유 자원 확보가 미국 산업과 세계 패권 유지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석유의 지정학’을 바꾸어 놓은 것이 바로 ‘셰일 혁명’이다. 대량의 셰일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21세기 미국 외교에서 중동의 중요성은 낮아졌다.

사실 땅 속이나 바다 속에 ’셰일 오일‘이 존재한다는 것이 확인된 것은 오래된 일이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경제성 있게 채취할 수 있는가였다.

2000년 텍사스의 석유 사업가 조지 미첼은 수압파쇄법을 개선해서 땅속의 셰일가스를 끌어올리는 방법을 개발했다. 그가 사용한 방법은 모래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시추관을 통해서 모래를 고압으로 분사하여 주변부 셰일층을 부순 뒤, 분사된 모래가 균열 부위에 끼어 들어가 암석이 열려있도록 유지 시켜주고 그 틈새로 가스를 뽑아내는 것이었다.

미국의 셰일 에너지 시추 시설
이처럼 모래를 사용한 수압파쇄법의 도입으로 미국 내 셰일 가스 생산량은 2000년 90억 입방미터에서 2016년 4500억 입방미터로 증가했다.

수압파쇄용 시추관에도 엄청난 양의 모래가 사용된다. 시추관 한곳에서만 2만5000톤의 모래가 쓰인다고 한다. 문제는 아무 모래나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이다. 일단 석영 함유량이 95%가 넘을 정도로 단단해야 하고 가스가 틈새로 잘 빠져 나오기 위해서는 모래의 입자가 둥글어야 한다.

미국에서 이런 조건을 갖춘 모래는 위스콘신주 등 몇 개 지역에 한정됐다. 셰일가스 열풍이 불면서 덩달아 수압파쇄용 모래 확보가 또 다른 형태의 자원전쟁이 됐다.

이토록 작고 흔한 알갱이에 달린 미래
아파트와 빌딩, 고속도로, 유리와 반도체. 모래는 인간이 물 다음으로 많이 소비하는 자원이다. 유엔환경계획(UNEP) 보고서에 따르면 ‘골재’를 포함한 인간의 모래 사용량은 지난 20년간 약 3배 증가해 2019년 기준 연간 최대 500억톤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한명당 하루 사용량이 18㎏에 해당하고, 지구를 폭 27m, 높이 27m로 두르기에 충분한 양이라고 한다.
사하라 사막, 고비 사막 등 지구 곳곳에 존재하는 사막을 보면 모래는 무한히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모든 모래가 사용 가치가 있는 모래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중동의 사막에 가득한 모래들은 대부분 건축 재료로 가치가 전혀 없다. 사막 모래는 바람이나 물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모래 알갱이들이 부딪히면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모서리가 둥글게 깍여 있다. 둥근 물체는 각진 물체에 비해서 결합력이 떨어진다. 시멘트와 섞였을 때 강도가 강화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런 이유로 알갱이가 둥근 사막 모래는 건설용으로 부적합하다.

전 국토의 90% 이상이 사막인 사우디 아라비아가 세계 최대의 모래 수입국 중 한 곳이라는 아이러니가 이런 사실을 증명한다.

유엔환경계획은 ‘모래와 지속 가능성:위기를 피할 10가지 권고’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모래에 대한 인류의 의존도를 감안할 때 모래를 전략적 자원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래가 건축물과 각종 구조물을 짓기 위한 골재, 반도체·디스플레이 제조와 같은 첨단산업의 소재 등으로 활용되는 것을 넘어 지구의 환경과 생태계 서비스 유지에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과도한 모래 채취에 따른 이런 기능의 약화는 인간의 안전을 위협하고 어업과 관광 산업에 의존하는 주민의 생계에까지 타격을 줄 수 있다. 문제는 앞으로 인구 증가와 도시화에 따른 모래 수요가 계속 늘어날 것이라는 점이다.

인간과 지구의 지속 가능성은 어쩌면 이토록 흔하고 하찮은 작은 알갱이, 모래를 어떻게 확보하고 관리하느냐에 달려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시인 정끝별처럼 모래에게 질문해야 한다.

‘모래는 뭐래?’

모래는 어쩌다 얼굴을 잃었을까?모래는 무얼 포기하고 모래가 되었을까?모래는 몇천번의 실패로 모래를 완성했을까?모래도 그러느라 색과 맛을 다 잊었을까?모래는 산 걸까 죽은 걸까?모래는 공간일까 시간일까?그니까 모래는 뭘까?쏟아지는 물음에 뿔뿔이 흩어지며모래는 어디서 추락했을까?모래는 무엇에 부서져 저리 닮았을까?모래는 말보다 별보다 많을까?모래도 제각각의 이름이 필요하지 않을까?모래는 어떻게 투명한 유리가 될까?모래는 우주의 인질일까?설마 모래가 너일까?허구한 날의 주인공들처럼
역사의 행로를 사람들이 결정하는 것 같지만 사실 지구 위의 여러 생물들과 자원, 물건들이 결정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김기철의 역사를 바꾼 사물들>은 인류 역사의 방향을 결정한 사물들과 그것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람들의 분투에 얽힌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드릴 예정입니다. 기자 페이지(https://media.naver.com/journalist/009/75254)를 구독하면 빼먹지 않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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