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 ‘대선 치러야’ 압박…러시아 배후 공작?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민주주의 국가라면 전쟁 중에도 ‘선거’를 치러야만 할까.
서방의 전폭적 지원 아래 러시아의 침공에 맞선 전쟁을 1년7개월째 이어가는 우크라이나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일부 서방 정치인들이 전쟁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가 총선, 대선을 치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2월 말 러시아의 전면 침공 뒤 우크라이나 전역에는 계엄령이 선포됐다. 우크라이나 헌법은 계엄령 아래서는 모든 선거를 금지하고 있다. 원래대로라면 우크라이나는 내달 29일 총선을, 내년 3월 대선을 치러야 한다.
우크라이나가 전란 속에서도 선거를 강행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들 가운데는 네덜란드 정치인 티니 콕스 전 유럽평의회 의장이 있다. 그는 지난 5월 우크라이나 매체 유로피안 프라우다와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는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치러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계엄령이 유지되는 한 헌법에 따라 선거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라며 “그게 어떻게 가능할지는 우리(서방)한테 달린 일이 아니다. 당신들이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는 튀르키예가 지난 2월 대지진을 겪고도 5월 대통령 선거를 진행한 사례를 예로 들기도 했다.
이뿐 아니다. 린지 그레이엄 미 상원의원도 지난달 키이우를 방문해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우크라이나가 내년 선거를 치러야 한다면서 “나라가 공격받는 상황에서도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하길 원한다”라고 했다.
우크라이나는 이런 주장에 난색을 보이고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외상을 하거나 무기를 팔아 돈을 마련해서 선거를 치르지 않을 것”이라며 “하지만 당신들(서방)이 재정 지원을 해주고, 국회의원들이 동의한다면, 빨리 법안을 바꾸고 함께 위험을 감수하자”라고 우크라이나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해외로 피란을 떠난 우크라이나 시민 700만여명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투표소를 유럽연합 전체에 설치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하면서 “우리는 그런 기반 시설을 갖출 역량을 가지고 있지 않다”라고 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공정한 선거를 위해 “참관인을 최전선에 보내야 한다”라고도 말했다. 모든 유권자의 권리가 보장된다면 선거를 치르겠다는 입장이지만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현재 우크라이나 영토 5분의 1 정도가 러시아군 점령 아래에 있을 뿐 아니라 시민 수백만 명이 고향을 떠나 다른 나라나 도시로 피란을 떠난 상태다. 최전선에 배치돼 있는 군인들 수만 명의 경우 투표를 하기 쉽지 않다.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율리아 티모셴코 전 우크라이나 총리가 “전쟁 중 선거를 치르는 대가는 패배로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선거로 인해 자연히 발생하는 정치적 갈등은 러시아를 격퇴하기 위해 필요한 전 국가적 단합을 흐트러뜨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티모셴코 전 총리는 자신의 정당이 많은 의제에서 젤렌스키 대통령과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지만 전쟁 중 선거 강행에 대해서는 반대한다는 생각을 분명히 밝혔다.
우크라이나 내부에서는 이러한 주장이 나오는 배경에 러시아의 개입이 있다는 의혹을 제기한다. 한 우크라이나 보안 기관 관계자는 익명으로 워싱턴포스트에 “러시아가 비밀 채널을 통해 이를 추진하고 있다”라며 선거를 실시하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사회 내부에 분열을 조작하거나 조장할 기회를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리 리니와 조엘 바서만은 미국 외교 잡지 포린 폴리시 기고에서 “전국적인 공습 경보는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매우 흔하게 발생하며 20분에서 몇 시간까지 지속할 수 있다. 이로 인한 혼란 탓에 신뢰할 수 있는 투표, 개표, 집계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러시아는 아프가니스탄 선거에서 탈레반이 시도했던 것처럼 우크라이나 정치적 혼란을 극대화하기 위해 전국 투표소를 폭격 대상으로 삼는 게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8월 우크라이나 국회는 계엄령을 11월까지 90일 더 연장했다. 총선이 열리려면 헌법을 개정하거나 계엄령이 철회돼야 한다. 조 바이든 미국 정부는 선거 실시 여부는 우크라이나에 달린 문제라는 입장이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최근 키이우 방문 때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시민 사회 및 야당과 선거 일정에 대해서 협의할 것을 촉구했다.
베를린/노지원 특파원
z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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