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유치원 보내야 할까’···전직 강사들이 말하는 ‘유아 대상 영어학원’의 실상

남지원 기자 2023. 9. 28.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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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김상민 기자

가을은 유치원에 갈 나이인 만 3~5세 아이를 둔 학부모들이 ‘일유’와 ‘영유’ 사이에서 고민에 빠지는 계절입니다. 유치원 유아모집이 있는 11월이 오기 전에 아이를 일반 유치원에 보낼지, 영어유치원에 보낼지 결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영어유치원을 선택하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영어에 노출시켜 영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일반 유치원보다 영어유치원이 교육적으로 우수할 것 같아서, 영어유치원부터 시작해 사립초, 특목고, 명문대로 이어지는 길을 걷도록 하기 위해, 영어유치원을 안 보내면 나중에 뒤처질까 봐…

이제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만 ‘영어유치원’은 사실 ‘유치원’이 아닙니다. 정식 명칭은 ‘유아 대상 영어학원’이죠. 유치원은 유아교육법에 따라 설립된 ‘학교’로 정부의 관리감독을 받지만, 유아 대상 영어학원은 말 그대로 사설학원입니다. 교사 자격이나 시설 기준, 교육과정, 급식의 질, 교습비 등에 대한 규제가 훨씬 느슨합니다. 실제로는 아침부터 오후까지 운영되고, 점심과 간식을 제공하는 등 보육기능을 수행하지만 유치원이나 어린이집과 달리 관리의 사각지대에 있는 셈입니다.

영어유치원은 아이들의 건강한 성장과 발달을 위해 꼭 보내야 하는, 혹은 보내는 것이 좋은 기관일까요. 의견이 갈립니다. 영어유치원이 비싼 만큼 얻을 수 있는 것이 많다고 하는 학부모들도 있습니다. 초등학교 이후 단계에서 ‘영유’ 출신의 영어 실력이 ‘일유’ 출신보다 월등하다는 이들도 많습니다. 실제로 학부모들의 수요가 몰리면서 하루 4시간 이상 교습하는 유아 대상 영어학원은 2018년 562개에서 지난해 811개로 4년 만에 44.3%나 늘었습니다. 학령인구 감소로 전국에서 어린이집과 유치원이 줄폐원하고 있는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하지만 ‘영어유치원 신화’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지난 4월1일 전직 유아 대상 영어학원 강사 4명과 실시한 비공개 간담회를 실시해 학원 근무 시절 겪었던 문제점에 대한 증언을 취합했습니다. 이 간담회 내용은 8월21일 영유아사교육포럼 10주년 기념 컨퍼런스에서 공개됐습니다. 이들은 길게는 2년까지 유아 대상 영어학원에서 근무하며 경험한 문제점을 이야기했습니다. 교사의 전문성도, 급식과 시설의 질도 떨어지며 아이들의 언어와 사회성, 긍정적인 정서발달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입니다. 컨퍼런스에서 공개된 보고서에 나온 강사들의 말을 그대로 옮깁니다.

“아동발달에 대한 이해가 없어요” 원어민 교사들의 비전문성

강사들은 대체로 원어민 교사들의 전문성이 떨어진다고 말했습니다. 유아 대상 영어학원 강사는 유치원·어린이집과 달리 유치원 정교사, 보육교사 자격증이 필요없습니다. 영어만 잘하면 아동 발달에 대한 이해가 없어도 사실상의 유치원 교사 역할을 할 수 있는 셈이죠. 유치원에 다니는 아동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 필요한 상호작용이나 일상생활지도 등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대학에 다니고 있거나 졸업한 외국인들이 왔어요. 교육적 수준은 높았는데 아동의 발달에 대한 이해가 없어요. 아이들의 말을 못 알아들으니까 반응을 해 줄 수가 없는 거예요.”

“원어민 교사들이 아이를 대하는 걸 보면 강압적으로 대하는 교사도 있었고, 아이들이 먹기 싫어하는 음식을 먹이다 실제로 토한 아이도 있었어요”

“혹시 대학에서 유아교육을 전공하느냐고 했더니 안 했대요. 영어만 구사할 줄 알면 원하는 곳에 취업이 되는 거죠. 그 선생님은 3주 뒤에 그만둔다고 하길래 왜 그만두냐 했더니 원장이랑 싸웠대요. 얼마나 일을 하셨냐고 했더니 3개월간 일을 했대요. 그래서 자긴 다른 영어학원에 갈 거라고 하더라고요. 다음 선생님은 1년간 한국에 여행을 왔다가 아르바이트 식으로 오전만 뛰고 간대요.”

“화장실 지도라는 개념이 없고 그냥 애들이 화장실 가고 싶다고 표현하면 제가 데리고 가요. 점심 먹기 전에 저는 손을 씻겼는데 다른 반은 다 안 씻더라고요. 양치질은 칫솔이 있는 친구는 하고 없는 친구는 안 했어요. 복도에서는 걸어다녀야 한다 같은 교육을 전혀 안 시켜서 제가 애들한테 이야기를 해줬거든요.”

“담임이라는 개념이 없고 원어민 강사는 나 그냥 여기 와서 동화책만 읽으면 돼, 유튜브로 동요 몇 번 들려주고 이렇게 하면 돼, 그냥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고.”

“친구들끼리 대화를 안 하더라고요” 언어·사회성 발달 괜찮을까
신문규 교육부 기조실장이 지난 8월18일 서울 강남구 소재 유아 대상 영어학원에서 게시물을 살펴보고 있다. 교육부 제공

언어발달의 결정적인 시기인 만 3~5세 아동을 영어만 사용하는 환경에 과도하게 노출시키면 오히려 모국어 발달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지적도 많습니다. 낯선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 환경에서 의사소통이 어려워지면 사회성 발달에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실제로 언어와 사회성 발달 지연, 부적응 경험으로 부정적 자기인식이 생기는 문제 등을 목격했다는 강사들의 증언이 있었습니다.

“제가 유치원에서 일할 때 만 5세 아이들은 한국어로 두 문장 이상을 말할 수 있었어요. 자기가 왜 그랬는지 원인까지 다 말할 수 있었는데, 영어 학원에서 영어로 말하는 건 다른 문제였던 것 같아요. 한국어로 저한테 얘기할 때는 체계적으로 얘기를 잘 하는 친구가 원어민한테는 얘기를 못 하고, 하더라도 친구 이름을 얘기하면서 ‘앵그리!’ (라고 말했어요)

“(영어유치원에서는) 친구들끼리 대화를 그렇게 많이 안 해요. 애들이 막 조잘조잘해야 하는데 그런 게 많이 없어서 안타까웠어요”

“아이들끼리 뭉쳐서 뭔가 같이 해보고 놀이하고 친해질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마련해줘야 하는데 그냥 한 공간에만 몰아놓고 알아서 영어만 하면 되니까… 좀 안타까웠어요”

“한 유아는 처음 왔을 때는 잘 웃고 잘 울고 그런 아이였는데 점심시간 후 영어랑 중국어 진행이 되니까 아이가 점점 표정을 잃어가더라고요. 걔가 (다른 기관으로) 옮길 때는 틱 장애가 오고 그랬어요.”

“어린 연령일수록 대부분 힘들어 하고요 좀 연령이 있는 아이들도 그나마 눈치껏 하지만 처음에는 10명 중 7명이 좀 힘들어해요.”

부실한 교육과정, 검증되지 않은 교재

유치원·어린이집에 다니는 만 3~5세 아이들은 국가수준 공통 교육과정인 누리과정을 적용받습니다. 누리과정은 국책연구소 주관으로 꾸려진 연구진이 현장 의견수렴, 전문가 자문 등을 거쳐 수년간의 연구를 통해 만들고 정부 심의까지 통과한 결과물입니다. 하지만 유아 대상 영어학원은 이런 틀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서울시 유아대상 영어학원을 조사한 결과 교습시간이 하루 9시간36분에 달하는 기관도 있었다고 합니다. 영유아기 발달특성을 고려해 유치원과 어린이집에서는 교육과정을 바깥놀이 1시간을 포함한 4~5시간으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강사들은 교육과정 운영이 자의적이고 분절적이며, 교재도 검증되지 않았다고 지적했습니다.

“(수업마다) 선생님들이 계속 바뀌었는데 단편적인 것들만 하다 보니 경험이 연속적으로 이뤄진다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제가 느꼈을 때는 다 분절돼 있어요. 1시간 하고, 뭐 1시간 하고 이런 식으로 돌아가다 보니까 아이들이 놀이에 빠진다거나 뭘 몰입하거나 이런 게 부족했었던 것 같거든요”

“전문 교재로 (수업을) 하지 않았어요. 그냥 본인들이 준비한 프린트로 했었고.”

“아이들이 글씨도 못 읽는데 거기 있는 글씨(영어) 보면서 이걸 어떻게 하는지 어떻게 알아요. 그냥 감으로 스티커 붙이고 점이랑 점이랑 연결 짓고 자기들끼리 이렇게 하는데 안 되는 거죠”

“저는 보여주기 식이란 생각밖에 안 들었거든요. 월 200씩 내면서 프린트물을 달랑 한 장 양면으로 돼 있는 거 가져오는 걸 보고 애를 계속 보낸다는 것도 저는 의아했었거든요.”

관리되지 않는 시설·환경·급식, 유아에게 적합할까

유치원과 어린이집은 유아교육법과 영유아보육법 등 관계법령에 따라 엄격한 시설기준을 적용받습니다. 급·간식 식단과 조리법, 재료 수급 등도 유치원은 교육청의, 어린이집은 지자체의 관리를 받고 있죠. 하지만 유아 대상 영어학원에는 이런 기준이 없습니다. 강사들은 급식의 질이 낮고 영양이 부족하며 기관 환경도 유아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한 번은 갈비찜이 나왔는데 양념 국물만 너무 많은 거에요. 건더기는 없고 반 아이들이 24명이었는데 다 먹을 수 있는 고기 덩어리가 아닌 거예요. 그때 제일 많이 화가 났어요.”

“이게 아이들이 먹을 수 있는 간인가 싶을 정도로 너무 짜거나 아예 간이 안 돼 있거나 그러기도 했고, 오후 간식 같은 경우 절편 같은 떡을 구워서 나올 때가 있었는데 어른인 저도 씹기 힘든데 아이들은 어떻게 씹지 할 정도로 딱딱하기도 했어요”

“저희 학원도 영양을 신경쓰는 게 아니라 애들이 좋아하는 맛있는걸 많이 줬어요. 식사 만들어주시는 분이 뭔가 구성해서 원장님께 얘기하면 ‘아 이거 맛있겠네요’ 이렇게 되는 형식이었고 따로 체계적으로 영양사가 칼로리 계산이나 이런 것들을 한 건 아니고”

“교실 환경도 책상 놓고 의자 앉고, 놀잇감이나 이런 거 전혀 없고 말 그대로 학원 교습소처럼 운영되는 거죠.”

“깔끔하고 되게 좋았지만 이게 과연 만 3~5세 아이들에게 적합한가라고 봤을 때는 전혀 적합하지 않았어요. 낙서도 하고 좀 놀아야 되는데 그런 것이 전혀 없이 말 그대로 그냥 영어만 가르치기 위해서 있던 거라 아이들의 발달적 특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환경이었어요.”

“놀이 시설이 없어서 제가 깜짝 놀랐어요. 바깥 놀이터도 없고 실내 놀이터도 없어요. 아이들이 진정한 신체활동할 수 있는 공간은 전혀 있지 않고.”

정부가 지금까지 유아 대상 영어학원 관리에 소극적이었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그동안 ‘영어유치원’을 대상으로 한 규제는 ‘유치원’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정도에 그쳤습니다. 유아 대상 영어학원들은 ‘유치원’ 명칭만 사용하지 않은 채 사실상 유치원처럼 기관을 운영해 오며 지속적으로 성장해왔고요.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지난 6월26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사교육 경감 대책 발표를 마친 후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조태형 기자

하지만 지난해 사교육비가 역대 최대치를 기록하고 정부가 ‘사교육 카르텔과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유아 대상 영어학원 열풍에도 교육부가 칼을 빼든 분위기입니다. 교육부는 지난 6월 사교육 경감대책을 발표하면서 교습과목을 ‘실용 외국어’로 등록한 뒤 예체능이나 한글을 가르치고 급식을 제공하는 등 학원을 단속하기로 했습니다. 유아 대상 영어학원이 사실상 유치원처럼 운영되지 않도록 유아교육법 개정을 추진하겠단 방침도 밝혔습니다. 규제와 관리의 사각지대에서 성장해 온 유아 대상 영어학원의 문제점들이 앞으로 해결될 수 있을까요.

사교육걱정없는세상과 함께 전직 강사들을 면담하고 보고서를 쓴 김명하 안산대 유아교육과 교수는 “서열화된 대학 입학을 통해 유치원부터 시작되는 인지중심교육, 경쟁중심교육이 ‘헬조선’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대학 서열과 입시를 위한 경쟁교육이 존재하는 이상 미시적 정책만으로는 유아기부터 시작되는 경쟁교육의 문제를 개선하기 어렵다는 것이죠.

“유아동 및 청소년기는 인지교육과 경쟁교육에 매몰되며 손상되고, 청년기는 취업 경쟁과 전반적 노동환경 악화로 인한 피로와 소외에 시달리며, 중장년기는 자녀 양육으로 피로가 쌓이는 생애주기의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저출생은 이 악순환의 관점에서 사유되어야 한다.” 김 교수가 쓴 보고서의 마지막 단락 중 일부분입니다.

남지원 기자 somni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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