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유를 예술로 구원한 잔다르크를 만난다

김슬기 기자(sblake@mk.co.kr) 2023. 9. 27.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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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세대 섬유예술가 이신자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회고전
태피스트리·염색·드로잉 등
1950~2000년대 대표작 망라
‘노이로제’(1961) [국립현대미술관]
네 아이가 태양을 마주하고 있다. 행복한 표정으로 놀이를 하는 아이들의 꿈을 표현한 이 작품은 면캔버스에 천을 붙이거나 화학섬유로 수를 놓고, 쇠망(쇠판)에 염료를 찍어 만들었다. 회화가 주류이던 시기, 섬유로 작업을 하는 작가는 긍정적인 작품의 의미와 달리 주변의 냉담한 반응에 낙담해 ‘노이로제’라 이름을 붙였다. 1961년 제10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 추천작가로서 출품한 이 작품은 한국 섬유예술의 태동을 알렸다.

길이 없어서, 길을 만들었다. ‘한국 섬유예술의 선구자’ 이신자(93)의 예술은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뚜벅뚜벅 걷는 여정이었다. 경북 울진 출신으로 서울대 응용미술학과를 졸업한 작가는 젊은 시절부터 캔버스와 물감 대신, 실과 섬유에 매료됐다. 섬유 예술 외길을 걸으며 1972년 국내 최초로 태피스트리 작업을 선보인 이신자의 대규모 회고전이 내년 2월 18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열린다.

‘이신자, 실로 그리다’는 이신자의 작품세계가 형성되는 과정을 4부로 나누어, 작품 90여 점 및 아카이브 30여 점을 엄선했다. 각 시기별 한국 섬유미술사의 변천사와 작가의 작품세계 변모상을 함께 반추한다. 구순이 넘은 나이에도 열정적으로 전시 준비에 참여한 작가는 “한국에서 실과 바늘을 사용하는 자수는 병풍이나 작은 소품만 만드는게 주류였다. 1970년대 외국에 가서보니 정말 다채로운 표현이 있더라. 나는 자수 전공도 아니고 섬유미술도 배워서 한 게 아니다. 나도 회화와 견줄 작업을 해야겠다 싶어 큰 작품을 만들고 이것저것 마음대로 했을 뿐인데 여기까지 왔다”라고 회상했다.

‘기구 I’(1985) [국립현대미술관]
이번 전시는 1955~1969년에 만든 잘 알려지지 않았던 초기작을 소개한다. 작가는 실로 짜고, 감고, 뽑고, 엮는 다양한 방법으로 자유롭고 대담하게 내면화된 자연의 정서와 정경들을 담아냈다. ‘장생도’(1958) ‘도시의 이미지’(1961) ‘노이로제’(1961) 등이 소개된다. 이 시기에는 온갖 쓴소리를 들어야 했다. 작가는 “한국 자수는 이신자가 다 망쳤다는 말을 들었고, 전통 공예를 하는 사람들은 발가락으로 만들었느냐는 말을 했다”라고 털어놨다.

초기 실험을 거쳐 작가는 어릴 적 할머니의 베틀에서 익힌 직조의 과정을 토대로, 틀에 실을 묶어 짜는 최초의 태피스트리 작업을 완성했다. 1972년 국전에서 국내 첫 태피스트리로 발표한 ‘벽걸이’는 아쉽게도 행방을 찾을 수 없지만 이어지는 대표작인 ‘숲’(1972) ‘원의 대화 I’(1970년대) ‘어울림’(1981) 등을 만날 수 있다. 전통적 태피스트리의 단조로움을 피해 올 풀기로 독특한 표면 질감을 유발하는가 하면, 이미 짜인 실을 밖으로 돌출시키는 부조적 표현으로 입체적인 질감을 형성한 작품이다.

1980년대 섬유예술 전성기를 이끈 시기의 작품은 남편 장우상 화백의 병상을 지키고, 자녀들을 키우면서 개인적으로 겪은 슬픔과 절망 등의 감정이 담겨 종교적 색채가 짙게 묻어난다. 원형 전시실의 중앙에는 길이 19m의 대작으로 태피스트리 수묵화인 ‘한강, 서울의 맥’을 설치해 눈길을 끈다. 1990년대 이후 한국적 추상으로 보이는 ‘산의 정기’ 시리즈를 통해 어린 시절 울진 앞바다에서 본 바다 풍경과 산을 담아내 자연의 영원한 생명력을 표현했다.

김성희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이번 전시를 통해 공예계를 이끌어 나갔던 이신자만의 독창성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삶과 예술에 대한 관심이 촉발되고, 삶과 예술이 지닌 동시대적 의미를 재고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산의 정기’(1996)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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