팁: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로 [김용석의 언어탐방]

한겨레 2023. 9. 26.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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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석의 언어탐방]미국에서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에게 팁이 긴요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의 최저임금은 봉급과 팁을 합산한 것으로 보장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제도와 관습은 지난 100년 동안 미국인의 의식과 심리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뭔가 있어 보이려고 또는 진정 감사의 뜻으로 주는 팁이 기계적 ‘당연함’이 될 때, 곧 강요된 의무처럼 될 때 사람의 마음은 불편하고, 어색하고, 곤란해진다.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김용석 | 철학자

십년쯤 전 미국 대학에 방문교수로 있을 때 일이다. 은퇴한 심리학과 명예교수 한분이 철학과에 자주 들러 세미나에 참여하고 사적인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내 전공과 다른 분야 전문가에게 귀동냥도 할 겸 그와 식사 자리를 함께하곤 했는데, 팁 문화에 관해 물어본 적이 있다. 그는 “팁을 주고받는 일이 여전히 사회적 어색함을 만들어낸다”고 했다. 내가 ‘사회적 어색함’(social awkwardness)이라고 옮긴 그의 영어 표현에는 불편, 곤란, 당황 등의 의미가 함께 들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미국식 팁 문화를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호텔, 레스토랑, 택시 등 직종에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에게 감사의 표시로 주는 돈’이란 뜻의 원래 영어 표현(gratuity)은 문어체가 되었고, 일상 회화에서는 팁(tip)이 일반적인 구어체다. 현대사회에서 팁 문화는 미국, 캐나다 등 북미 지역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유럽에서 북미로 건너간 생활양식이 새로운 환경에서 변형 발전한 것이다. 원래 서구에서 팁 문화가 어떠했는지 알아보는 데에는 팁에 해당하는 다른 유럽 언어의 뿌리를 살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독일어로는 ‘트링크겔트’(Trinkgeld), 프랑스어로는 ‘푸르부아르’(pourboire), 에스파냐어로는 ‘프로피나’(propina)가 영어의 팁에 해당하는데, 이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술 한잔할 소량의 돈’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독일어는 ‘마시다’와 ‘돈’의 합성어이고, 프랑스어는 ‘마시기 위하여’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에스파냐어는 ‘술을 마시다’라는 라틴어의 직접 영향을 받았다.

이런 표현들은 서양 중세 때 주막이나 객관 등에서 손님이 시중드는 하인에게 술 한잔 사고는 그 값을 그곳 주인에게 지불하는 관습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나아가 상류 계층 사람들이 하인들에게 자신의 너그러움을 나타내기 위해 술 한잔할 정도의 돈을 주는 일반적 관습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팁에 해당하는 이탈리아어 ‘만차’(mancia)에서 우리는 중세의 고풍을 좀 더 특별히 감지할 수 있다. 만차는 옷소매를 뜻하는 ‘마니카’(manica)에서 나왔다. 마상 시합에서 중세 기사들은 자신을 응원하는 귀부인으로부터 명예의 상징으로 소맷자락을 받았다. 현대인은 ‘옷소매를 떼어 주다니?’라며 의아해할 수 있다. 지금 우리 의복과 달리, 당시 옷소매는 아주 특별했다. 소매는 특별한 만큼 옷으로부터 ‘독립적 위상’을 지녔고, 금실로 봉제하거나 보석으로 장식하기도 했다. 소맷자락은 특별한 봉제 때문에 필요에 따라 떼어 낼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귀족들의 허영과 사치를 읽어낼 수도 있다.

기사도 정신과 귀부인의 애정을 담은 ‘고귀한’ 단어가 어찌하여 세속화되었는가, 아쉬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기사와 귀부인의 입장에서 그럴 뿐이다. 그런 단어가 상류 계급 사람들이 하인에게, 나아가 서비스를 받는 사람이 그 제공자에게 주는 팁을 뜻하는 말로 변이되어 가는 길은 멀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언어의 세속적 진화는 줄기차다. 만차 또는 팁은 중세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중적 기능을 해왔다. 상류 사회 사람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확립하기 위한 수단으로 팁을 폭넓게 활용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 나름대로 팁을 주는 것이 하층 계급 사람들에게 ‘사회적 연대감’을 표시하는 방식이라는 관념을 정착해왔기 때문이다. 팁이란 말을 통해서도 우리는 인간 사회의 모순을 볼 수 있다.

팁의 역사는 다양하고 길다. 유럽 사람들이 이른바 ‘신대륙’에 세운 나라가 미국이니, 유럽 문화가 미국으로 옮겨 가는 것은 당연지사다. 18세기 말 독립국임을 선언한 뒤 19세기 미국인들은 유럽 여행을 훨씬 더 자주 했다. 뭔가 ‘있어 보이려는’ 것은 인지상정인지라, 미국인들은 뭔가 귀족적이고, 있어 보이려는 데에 팁 문화가 제격이라고 여겼던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삶의 양식은 평등하고 민주적인 사회를 지향하는 미국의 건국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19세기 말까지 팁 문화는 미국에서 단단히 자리 잡지 못했다.

역사학자들은 1919년 제정된 금주법이 호텔과 레스토랑 업종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주류 판매 수입 및 팁 문화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업종이었다. 1933년까지 지속된 법에 따라 주류 판매 수입을 잃게 된 이들은 팁이 종업원의 임금을 상당 부분 보충하는 방식을 대환영했다. 업주 부담금이 고객에게 전가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미국에서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에게 팁이 긴요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의 최저임금은 봉급과 팁을 합산한 것으로 보장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제도와 관습은 지난 100년 동안 미국인의 의식과 심리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뭔가 있어 보이려고 또는 진정 감사의 뜻으로 주는 팁이 기계적 ‘당연함’이 될 때, 곧 강요된 의무처럼 될 때 사람의 마음은 불편하고 어색하고 곤란해진다. 미국인들조차 팁 문화를 개선하려고 한다.

한편 19세기와 20세기 초 유럽에서는 전근대적 왕과 귀족의 시대가 지나갔을 뿐만 아니라, 노동운동의 활성화로 노동자의 존엄과 권리에 대한 인식이 확산하면서 팁 관습은 사그라지게 되었다. 공식적으로 서비스 비용을 전체 가격에 투명하게 포함해서 고객에게 제시하거나, 각자 감사의 마음을 자발적으로 표시하는 정도의 문화가 남게 되었다.

이제 문제는 우리나라에서 미국식 팁 문화를 수입하려는 시도에 관한 것이다. 문화적 교류는 소중하나, 역사적 모순의 상처를 지닌 삶의 양식을 도입할 때에는 숙고하는 것이 좋다. 영어 팁의 어원은 불확실하나, 대체로 ‘가볍게 톡톡 두드리다’는 뜻의 탭(tap)과 연관 있는 것으로 본다. 팁은 그 단음절 어감이 주듯이 가볍고 작은 것이어야 하나, 왜곡되면 무겁고 큰 짐이 된다. 앞서 언급한 명예교수는 비뚤어진 팁 문화는 오히려 “마음을 궁핍하게 만든다”고 했다. 일상생활에서 ‘당연한 것들’의 억압 때문에 마음이 쪼그라들어서야 되겠는가. 마음이 한가위 보름달 같을 때, 우리는 평안하고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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