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광훈의 산인만필(散人漫筆) <30>] “밤비 내릴 때 침상 마주하고 부슬부슬 빗소리 들으세”

홍광훈 2023. 9. 25.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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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애를 상징하는 박태기나무. 사진 홍광훈

소식(蘇軾·1037~1101)과 소철(蘇轍·1039~1112) 형제는 우의가 돈독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둘 사이에 오랜 세월 주고받은 시가 다른 문인들에게서는 예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수조가두(水調歌頭)’라는 유명한 사(詞)도 소식이 동생을 그리워하며 지은 것이다. 여기에는 서문이 붙어 있다. “병진(丙辰)년 중추절 날 샐 때까지 즐겁게 술 마시고 크게 취해 이 작품을 쓰다. 겸하여 자유(子由)를 그리워하다.” 명절에 멀리 있는 동생이 더욱 보고 싶어진 것이다. “좋은 절기 맞을 때마다 가족이 갑절로 그립다(每逢佳節倍思親)”는 왕유(王維)의 마음과 같다. 소식은 “푸른 하늘에 달이 있은 지 얼마나 됐는가, 나 지금 잔 멈추고 한번 물어본다(靑天有月來幾時, 我今停杯一問之)”는 이백(李白)의 ‘파주문월(把酒問月)’ 첫 구절을 인용하면서 달을 바라보는 감회를 펼친다.

홍광훈문화평론가, 국립대만대학 중문학 박사, 전 서울신문 기자, 전 서울여대 교수

“밝은 달 언제부터 있었는가? 술잔 잡고 푸른 하늘에 물어본다. 하늘 위 궁궐에서는 오늘 밤이 어느 해인지 모르겠나니. 나 바람 타고 돌아가려 하나, 저 구슬 누각 너무 높아 추위 못 이길까 또한 두렵도다. 일어나 춤추며 맑은 그림자와 놀기엔 어찌 인간 세상에 있는 만큼 하겠는가(明月幾時有? 把酒問靑天. 不知天上宮闕, 今夕是何年. 我欲乘風歸去, 又恐瓊樓玉宇, 高處不勝寒. 起舞弄淸影, 何似在人間)? 저 달 붉은 누각 돌아, 비단 창문에 낮게 걸려, 잠 못 이루는 사람 비춘다. 내게 무슨 원망이라도 있지 않을 터인데, 무슨 일로 늘 헤어져 있을 때에만 둥근가? 사람에게는 슬픔과 기쁨과 헤어짐과 만남이 있고, 저 달도 흐릴 때와 맑을 때와 둥글 때와 이지러질 때가 있음에, 이 일은 예부터 온전하기 어려웠나니. 그저 사람들이 오랫동안 천 리 멀리서 저 달 함께하기를 바랄 뿐이네(轉朱閣, 低綺戶, 照無眠. 不應有恨, 何事長向別時圓? 人有悲歡離合, 月有陰晴圓缺, 此事古難全. 但願人長久, 千里共嬋娟).”

형제는 아버지 소순(蘇洵)과 함께 역대 최고의 문장가들로 꼽힌다.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에 모두 이름이 오른다. 이런 예는 지극히 드물다. 조조(曹操), 조비(曹丕), 조식(曹植) 삼부자 정도가 있을 뿐이다.

소식이 중추절 밤에 술잔을 들고 달을 보며 멀리 있는 동생 소철을 그리워하고 있다. 사진 바이두

둘은 각각 21세와 19세에 나란히 과거에 합격했다. 과거 보러 먼 길 가면서 많은 고초를 겪었다. 타고 가던 말이 죽어 나귀로 갈아타기도 했다. 민지(澠池)에서는 노승의 배려로 절에 묵은 적이 있다. 그때 벽에 시를 적어 놓았다. 그 뒤 지방을 전전하면서 만날 기회가 많지 않았다. 수년 후 소철이 지난 일을 회상하는 시를 써서 소식에게 전했다. 소식도 ‘자유의 민지회구에 화답함(和子由澠池懷舊)’이라는 시를 지었다.

“사람이 살면서 이르는 곳 무엇과 같은가 하니, 날아가던 기러기 눈 덮인 진흙 밟는 것과 같으리라. 진흙 위에 우연히 발톱 자국 남겼지만, 기러기 날면 동인지 서인지 어찌 다시 헤아리랴. 노승은 이미 죽어 새 탑 만들어지고, 망가진 벽에서는 옛 시를 볼 수 없으리라. 지난날 험한 길 가던 일 아직 기억하는가? 길은 멀고 사람은 지쳤는데 절뚝이는 나귀도 슬피 울었다네(人生到處知何似, 應似飛鴻踏雪泥. 泥上偶然留指爪, 鴻飛那復計東西. 老僧已死成新塔, 壞壁無由見舊題. 往日崎嶇還記否? 路長人困蹇驢嘶).”

소식이 43세 때 ‘오대시안(烏臺詩案)’이 일어났다. 황제에게 올린 글에 신법(新法) 강행을 넌지시 비방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고 탄핵당한 사건이다. 다른 시문에서의 증거들도 제시됐다. ‘오대’란 감찰 기관인 ‘어사대(御史臺)’의 별칭이다. 한나라 때 그 뜰의 잣나무에 까마귀 떼가 날아들었다는 데서 유래됐다. 소식이 참형될 위기에 처하자 신법의 주창자인 왕안석(王安石)까지 나섰다. 덕분에 100여 일 만에 풀려나 지방으로 유배됐다. 이 과정에서 소철도 모든 관직을 내려놓겠으니 형을 살려 달라고 탄원하는 글을 연이어 올렸다. 옥중의 소식은 죽음을 앞두고 유언과 같은 시를 동생에게 보냈다.

“성스러운 군주 하늘 같아 세상 만물 봄을 만났건만, 하찮은 신하 어리석고 어두워 스스로 몸을 망치누나. 백 년을 못 채우고 먼저 빚 갚으려 하니, 열 식구 갈 곳 없어 또 그대에게 누를 끼치네. 어느 청산인들 뼈를 묻을 수야 있겠지만, 훗날 밤비 속에 그대 홀로 상심할까 한스럽다네. 그대와 다음 세상에서도 형제가 되어, 이생에서 못다 한 인연 다시 이어가세나(聖主如天萬物春, 小臣愚暗自亡身. 百年未滿先償債, 十口無歸更累人. 是處靑山可埋骨, 他年夜雨獨傷神. 與君世世爲兄弟, 更結來生未了因).”

‘밤비'는 소철의 시 ‘소요당회숙(逍遙堂會宿)’ 서문에 그 사연이 적혀 있다. 형제는 어려서부터 함께 책 읽으며 하루도 떨어진 적이 없었다. 장성하여 헤어질 즈음 위응물(韋應物)의 시를 읽었다. 그중에 “비바람 부는 밤 다시 이처럼 침상 마주하고 잘 줄 어찌 알았겠나(安知風雨夜, 復此對床眠)”라는 구절이 있어 깊은 감명을 받았다. 형제는 빨리 관직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여생을 즐기자고 약속했다. 그 뒤 소식이 동생과 이별하며 건네준 시에 “언제나 부슬부슬 밤비 내리는 소리를 들을까(夜雨何時聽蕭瑟)”라는 구절이 있었다. 이후 7년 동안 만나지 못하다가 소철이 40세가 다 됐을 때 다시 만나 소요당에서 함께 잤다. ‘자유를 그리워하며 짓다(懷子由作)’라는 부제가 붙은 소식의 ‘만강홍(滿江紅)’ 사에도 “밤비 내릴 때 침상 마주하고 부슬부슬 빗소리 들으세(對床夜雨聽蕭瑟)”라는 약속을 못 지켜 아쉬워하는 대목이 보인다.

소식이 노년에 쓴 시에 “내 나이 스물 되도록 친구가 없었으니, 그때는 온 천하에 자유 하나뿐이었다(我年二十無朋儔, 當時四海一子由)”라는 구절이 있다. 이러한 형제의 정의는 소식이 죽을 때까지 변치 않았다. 이를 두고 ‘송사(宋史)’의 저자는 ‘소철전(蘇轍傳)’의 끝에서 다음과 같이 찬탄한다. “철은 그 형과 함께 나아가고 물러남에 같지 않은 것이 없었다. 환난 속에서는 우애가 더욱 두터워져 조금의 원망도 없었으니 근고(近古)에 보기 드물었다.”

‘시경’의 ‘당체(棠棣)’편에 “형제혁어장, 외어기모(兄弟鬩於牆 外禦其侮)”라는 구절이 있다. “형제는 담장 안에서 다투더라도 바깥의 모욕을 당하면 함께 막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형제가 없으면 형제 있는 사람이 부럽기 마련이다. ‘논어’에는 사마우(司馬牛)가 “남들은 모두 형제가 있는데 나만 없다”며 슬퍼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자하(子夏)가 “사해 안의 모두가 형제니 군자가 어찌 형제 없다고 근심할까”라고 위로한다.

그러나 세상사에서 형제가 있음으로써 더 많은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적지 않다. 권력이나 이득 앞에서 반목을 넘어 골육상잔(骨肉相殘)의 지경에 이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를 가장 상징적으로 잘 표현한 시가 조식의 ‘칠보시(七步詩)’다. 형제간의 알력을 솥 안에서 익는 콩과 솥 밑에서 타는 콩깍지에 비유하면서, “본래 같은 뿌리에서 나왔는데 어찌 핍박이 이리 심한가(本自同根生, 相煎何太急)”라고 하소연한다.

삼국시대 위(魏)의 여안(呂安)과 여손(呂巽) 형제는 혜강(嵇康)과 절친한 사이였다. 특히 여안은 혜강이 보고 싶으면 천 리 길 마다 않고 수레 몰아 찾아갈(千里命駕) 정도였다. 여안의 아내는 미색이 빼어났다. 형 여손이 흑심을 품고 제수에게 억지로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다음 간음했다. 사실을 안 여안은 형을 고소하고 아내를 내보내려 했다. 아내는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여안은 이 일을 혜강에게 알렸다. 혜강은 집안의 명예를 생각해서 고소를 취하하라고 타일렀다. 여안이 그 말대로 하자 여손이 오히려 어머니를 때린 불효자라며 동생을 무고했다. 실권자 사마소(司馬昭)가 여안을 감옥에 가두었다. 혜강이 여손에게 편지를 보내 호되게 꾸짖었다. 이 틈에 혜강에게 원한이 있던 종회(鍾會)가 중상 모략해 혜강과 여안이 참수당하게 만들었다.

남북조 시대 오균(吳均)이 지은 ‘속제해기(續齊諧記)’에 ‘자형(紫荊)’ 이야기가 실려 있다. 세 형제가 유산을 나누는데 마당의 박태기나무 한 그루까지 삼등분하자고 했다. 그러자 나무가 갑자기 말라버렸다. 큰형이 한 뿌리에서 나온 나무를 셋으로 나누자고 해서 나무가 죽은 것이라며 슬퍼했다. 이에 형제들이 재산을 나누지 말자고 하자 나무에 다시 생기가 돌았다. 이로부터 박태기나무는 형제애의 상징이 됐다.

우리 사회는 세상이 살기 어렵다는 이유로 결혼 기피 현상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결혼해도 아이를 하나만 낳거나 아예 낳지 않으려는 경향도 늘어나는 추세다. 이대로라면 앞으로 형제애라는 개념조차 생소하게 될 것 같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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