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물’이란 소포가 왔다… 안 좋은 게 들어있어도, 일단 열고 본다[소설, 한국을 말하다]

박세희 기자 2023. 9. 25.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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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구병모
콘텐츠 과잉 - 상자를 열지 마세요
일러스트 = 의자 작가

AI(인공지능)는 우리 삶을 어떻게 바꿀까. 가속하는 저출산과 고령화, 사교육 광풍, SNS가 발신하는 끝 모를 욕망 속에서 한국인은, 또 한국 사회는 어디를 향해 가는가.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들이 이 질문에 답한다. 9월 4일부터 연재에 들어간 문화일보의 ‘소설, 한국을 말하다’는 문단에서 가장 첨예하고 활발하게 활동하는 소설가 15명이 들여다 본 ‘지금, 한국’을 짧은 소설에 담았다. 매주 월요일 한 편 씩 공개되며, 12월까지 계속될 예정.

개발회의에서 깨진 날의 퇴근길에 그것이 내게로 왔다.

깨졌다고 해서 그 방식이, 이것도 기획서라고 썼느냐든지 너는 그냥 일 그만두라고 모욕을 주는 건 아니었다. 요즘은 A4 용지에 출력하지 않고 각자의 태블릿 화면에서 공유된 PPT 화면을 보거나 줌 화상 회의를 하는 만큼, 기획서를 얼굴에 집어 뿌리는 고전 드라마 같은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간 미소와 함께 조용히 비아냥거리는 반문으로도 사람의 영혼을 죽일 수 있다. “혹시나 해서 묻는데 ○○씨는 그러니까…… 이게 정말 재밌고 참신하다고 생각해서 올린 거 맞지요? 와…… 요즘은, 이렇게들 생각하는구나. 조금 당황스러워서 그러는데, 뭐 계속해봐요. 일단 끝까지는 들어볼 테니까.” 그 같은 반응에 이미 주눅이 든 상태에서 발표를 마치면, “우리 하루에 영화만 몇 편이 쏟아져나오는지 알고는 있는 거지요? 이게 정말 먹힌다고 믿어서 지금, 이런 거 들고나오는 거지요?” 이런 식이었다.

고만고만한 물건들 가운데 확실하게 튀어야 했다. 튄다는 것도 지나치게 기이하거나 낯설어 소비자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방향이어서는 안 되었다. 확실하게 수익을 낼 수 있는 킬러 콘텐츠로 승부를 보아야 했다. 그걸 위해 거의 모든 시간을, 이미 생산된 수많은 콘텐츠를 검토하는 데 보냈다. 플랫폼마다 가입하여 과금을 하고 대량의 웹툰을 보고, 밥 먹는 것도 잊고 쇼츠를 보고, 스킵하지 않고 광고를 보고, 영화를, 예능을, 드라마 전 회차를 요약한 유튜브 방송을 보았다. 1분 30초를 넘기지 않는 쇼츠를 보면서 손가락으로 하나씩 밀어 넘기는 동안 어느새 잠자는 것도 잊고 세 시간이 훌쩍 지나가기가 일쑤였는데, 한편으론 마음이 급하여 세 시간짜리 영화는 볼 수 없는 아이러니가 반복되었다. 한 편의 영화를 깊이 있게 꼼꼼하게 들여다보기보다는, 다수의 콘텐츠를 있는 힘껏 한계치까지 뇌 속에 쓸어담고 입속에 구겨 넣는 것이 나의 성과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다. 그런 식으로 웹툰을 구독하다 보니 이게 그거 같고 그건 또 저거 같고, 이 전생이 저 환생 같고, 그 이 세계가 이 현 세계 같고, 모든 게 뒤섞였다. 개개의 작품은 선명한 빛이었는데, 그 빛을 모두 섞으니 흰빛이 되었다. 저마다 고유의 색깔이 두드러졌는데, 그 색이 모두 섞이니 검은색이 되었다. 개발회의 때마다 K-콘텐츠의 현황을 분석했지만 내가 내놓은 카드는 그 흐름에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편승하지 못한다는 명백한 사인을 받으면서, 인정해야 했다. 나는 이 시대의 흐름 속에서는 새롭거나 인기 있을 법한 무언가를 만드는 일과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때 빗속에서, 반지하 자취방 문앞에 놓인 상자를 보았다.

‘내용물’이라고 인쇄된 글자가 붙어 있는 상자를 보고, 그것이 무언지 바로 알아차렸다. 최근 본 쇼츠 가운데 이 상자에 대해 다룬 것들이 있었다. 수신자 주소 위로 ‘내용물’이라는 글자 외에 발신자가 명기되지 않은 소포 박스가 출몰하는데, 해외 쇼핑몰의 브러싱 스캠의 일종으로 추정만 가능할 뿐이며 실제로 피해를 본 사례는 없지만, 아무 데나 무작위로 배달된 1000여 개의 상자 안에서 한두 개쯤은 우리 환경에 맞지 않을 것이 분명한 데다 심어서 뭐가 돋을지 모를 씨앗도 나왔고, 그보다 더 수상쩍은 인화물질이 들어 있지 말라는 법도 없으니, 발견하는 대로 미개봉 상태로 경찰서에 제출해달라는 이야기가 돌았었다. 일부 유튜버들은 〈드디어 그것이 저에게도 왔습니다!〉 〈저도 해봅니다 ‘내용물’ 언박싱〉이라는 제목을 달고 동영상을 올리기도 했는데, 그중 절반은 직접 만든 가짜 상자라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졌고, 무엇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심지어 인간의 진심 여부와 마찬가지로 거기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조차도 실은 중요하지 않았는데, 일단 그걸로 조회 수가 올라가고 구독자 수도 소폭 상승하면 그만이었다.

현관에 우산을 던져놓고, 더는 올려둘 자리도 없는 식탁 끄트머리에 상자를 얹어놓았다. 여러 패턴으로 변주된 불특정 다수의 ‘내용물’과 다른 점이 있다면, 깨알만 한 글자로 주의사항이나 약관 비슷한 것이 적혀 있다는 점이었다. 빗물에 번졌지만 대강의 내용은 이랬다. ‘이걸 손에 넣은 당신은 창작력이 왕성해지고 무엇이든 만들 수 있게 됩니다.’

손에 넣는다는 것부터가 다소 막연하고, 전체적으로 광범위하고 추상적이며 믿거나 말거나 식의 안내문 한 줄이었지만, 그걸 보자 머릿속에서는 다음번 기획안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발신자가 불분명하고 발신 목적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소포가 도시전설처럼 퍼져나가는데 어느 날 주인공에게도 배달된 상자, ‘절대로 열지 마시오’라고 적힌 그것을 열었더니 안에는 작은 동물의 사체가…… 혹은 신원 불명의 신체 일부가…… 아니 아니, 이건 너무 뻔하다. 상자 안에는 작은 병이 한 개 들어 있는데, 똑같은 내용물이 담긴 상자를 받은 다섯 사람이 채팅으로 얘기를 주고받다 모였을 때 사건이 벌어지고…… 이것도 어디서 본 것 같다. 상자 안에는 드라이플라워가 한 묶음 들어 있고, 꽃에 얽힌 추억이…… 이건 너무 올드하다. 너무 많은 것을 보고 소비해버렸더니, 더욱 빠르게 더욱 많은 콘텐츠를 섭취하여 트렌드를 캐치하기 위해 한 권의 책 대신 한 줄의 로그라인 위주로 흡입하고 기획서를 게워내는 동안, 나는 무엇을 보았는지 또는 무엇을 안 보았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만약 영화가 아닌 소설이라면, 이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을 것이다. 텅 빈 상자, 무의미한 상자, 제로부터 시작하여 무엇으로든 채워나가야 하는 상자를 내려다보며, 주인공은 앞으로의 발전적이고 건설적인 삶을 다짐할 것이다. 이건 또 너무, 행복이 바로 옆에 있다는 파랑새 같은 이야기인데.

그러면 도대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남들이 이미 다 했을 법한 고만고만한 상상력과 바탕을 가졌을 뿐인 내가, 무엇으로 K-콘텐츠의 흥성에 이바지하지? 그러다가 생각은 급기야 이런 데까지 가닿았다. 그런데 그것이 흥한다고 나한테 좋을 건 뭐지? 어차피 내가 육신을 갈아 넣어서 보기 좋은 물건을 만들어낸다 해도, 그것으로 부와 명예를 누리는 사람들은 극히 한정되어 있으며, 간혹 그것이 세계적인 화제몰이를 할 것 같으면, 국력 향상이니 문화 강국이니 하며 숟가락이나 얹으려 드는 높은 분들은 따로 계실 텐데 말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질문을 하기보다 당장의 기획서가 급했으므로, 나는 너무 멀리까지 뻗어 나간 생각의 줄기를 거두고 눈앞의 상자에 집중했다. 이 상자가 내게 온 것은 우연이 아닐 터였다. 거기 무언가 좋지 않은 게 들어 있다고 한들, 닫힌 게 눈앞에 있으면 일단 열고 보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었다. 현존하는 수많은 스릴러 영화 이전에, 푸른 수염 같은 고릿적 동화들도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열기부터 해야 이야기가 시작된다. 뭐라도 전개된다.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현실의 인간은 어쩌든 간에 이야기 속 인물이 그걸 고이 들어다 신고한다는 선택지는 없는 법이었다. 이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는 인물, 열어서는 안 되는 걸 열고 꺼내서는 안 되는 내용물을 꺼내는 인물들의 행위로 성립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간주하고 나니 문득 이 상자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콘텐츠가 들어 있는 마법의 보석함이라는 생각에 이르며, 이걸 열어서 안에 담긴 내용물을 취하거나 먹거나 입거나 어떤 형태로든 쓴다면 빛나는 무언가를, 설령 빛까지는 나지 않더라도 그런대로 쓸만한 것을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샘솟았다. 샘솟는다는 건 거짓말이고 낯선 아이템을 습득할 때는 으레 그것의 효능을 믿어야 한다는 일종의 다짐, 익사 직전에 지푸라기를 잡는 것과 닮은 심정이라고 해도 좋았다.

나는 상자 모서리를 만지작거렸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이 현실 아닌 한 편의 콘텐츠 안이고, 그중에서도 소설이라고 한다면 어떨까. 이 상자는 진부하게도 텅 비어 있어서, 거대 규모와 고예산의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고갈되어온 노동자의 허무를 불러일으킬까. 황금기나 호황기라는 찬사가 쏟아지는 이면에서 실상은 언제라도 소진되어 빈약해질 수 있는 콘텐츠의 속성과 운명을 일깨워줄까. 그게 아니라면 뚜껑을 여는 순간 원한, 복수, 증오, 질투가 튀어나오고 마지막에 굼벵이 같은 희망만 남게 된 판도라의 상자처럼…….

무언가를 시작하고자 한다면, 열어야 했다.

나는 칼끝을 상자의 이음부에 푹, 찔러 넣었다.

소설이라면 바로 이 장면에서 끝났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는 짤막한 콩트의 세계니까, 이것은 위트 있고 장난을 좋아하는 친구의 깜짝 선물이며, 안에서는 허무와 폭력과 희망 대신 그저 당 보충을 위한 여러 가지 간식이 나올 것이다. 내게는 창의성도 재능도 트렌드를 읽는 눈도 없지만, 콘텐츠는 어쨌든 계속되어야 하므로.

■ 작가의 말

구병모 작가는 ‘콘텐츠 지상주의’에 의문을 제기한다. 작가의 문제의식은 우리 사회에서 콘텐츠에 대해 언급하는 방식과 그 지향점이, 어떤 귀한 정보와 정서를 제공할 것인가보다는 얼마나 화제성을 불러일으키고 높은 수익을 거둘 것인가에 집중되는 데 있다. 이는, 한 편의 소설을 두고서 그것이 썩 괜찮은 문학이라고 인식하기보다는 영화화하기 딱 좋다는 말부터 먼저 떠올리는, 이제는 아예 처음부터 영화화를 목적으로 한 소설을 써달라는 제안이 들어오는 숱한 주객전도의 경험에서 비롯됐다. 작가의 이야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콘텐츠 노동 종사자들에게 공정하게 성과가 배분되는지, 사람을 계속 갈아 끼울 수 있는 부속품처럼 돌리고 있지는 않은지 묻는다. 그리고 이는 비단 콘텐츠 노동 종사자들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 구병모는…

1976년생. 2009년 ‘위저드 베이커리’로 데뷔한 이후 ‘아가미’ ‘파과’ 등을 썼다. 김유정문학상 등 수상.

박세희 기자 saysay@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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