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물이라도 팔게” VS “우리 농민은”…우크라 재건 ‘경고등’

이병도 2023. 9. 2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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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가족'이 '폴란드 우산'을 쓰고 '러시아 미사일'을 막고 있는 이 그림, 러시아의 침공에 맞선 우크라이나와 폴란드의 우호를 상징해왔습니다.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폴란드는 군사 지원부터 난민 수용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다음 차례는 폴란드'라는 위기의식도 작용했습니다.

그런데 이 '우정'에 최근 금이 갔습니다. '먹을거리', 농산물 수입과 관련된 분쟁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균열은 우리나라와도 관련이 적지 않습니다.

■ 젤렌스키 , '정치적 연극' 직격…폴란드 발끈 "더 이상 무기 안 보낼 것"
직접적 계기는 이번 유엔총회였습니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지난 19일 총회연설에서 러시아의 흑해곡물협정 탈퇴와 해상 봉쇄를 규탄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치적 연극으로 결속을 표현한 우리의 유럽 친구들 중 일부가 우크라이나로부터 농산물 수입을 제한함으로써 러시아 배우를 위한 무대 마련을 도왔다."

우크라이나 농산물 수입을 제한하고 있는 유럽연합 3개국, 폴란드와 헝가리, 슬로바키아가 '정치적 연극을 했다', '러시아를 도왔다'고 비판한 겁니다.


군대만 안 보냈을 뿐, 무기 지원에 앞장서 온 폴란드는 발끈했습니다. 우크라이나 대사를 초치해 "강력히 항의"했습니다. 한발 더 나아가 마테우시 모라비에츠키 폴란드 총리는 '국방 현대화'를 이유로 "우크라이나에 더 이상 무기를 이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 "곡물이라도 팔게 해달라" VS "우리 농민 다 죽는다"
균열의 발단이 된 '농산물 분쟁'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우크라이나는 '유럽의 빵 바구니', '세계의 곡창'으로 불리는 곡물 수출 대국입니다. 한반도 2배 면적인 농경지에서 연간 6천~7천만 톤의 곡물을 생산하고, 4천~5천만 톤은 수출해왔습니다. 옥수수는 세계 수출 3위, 보리는 4위, 밀은 5위입니다. (2020년 기준, 유엔식량농업기구 FAO)

이 곡물 수출의 90%를 해상 운송해왔는데, 전쟁이 나면서 큰 차질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우크라이나는 철도 등 육로와 다뉴브강 수로를 통한 대체 운반로를 찾았는데, 이번엔 부작용이 생겼습니다. 값싼 농산물이 밀려들면서 동유럽 국가에서 농산물 가격이 폭락했던 겁니다.

이를 막겠다며 유럽연합은 지난 5월, 폴란드 등 5개국에서 우크라이나 농산물을 판매하지 못하고 경유만 하도록 제한했다가, 이달 15일 수입 금지 조치를 해제했습니다. 그런데 폴란드와 헝가리, 슬로바키아는 EU의 결정에도 자국 농민을 보호하겠다며 '금수(禁輸)' 조치를 유지했고, 이에 우크라이나는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하기로 했습니다. 전쟁 중에 곡물 수출에 사활이 걸린 우크라이나와, 자국 농민 보호가 우선이라는 동유럽 3국의 입장이 충돌한 겁니다.

우크라이나 곡물 선적 모습


■ '발언 오해' 다시 손 맞잡았지만 불씨는 여전

폴란드 총리의 '무기 지원 거부 선언'이 서방 진영의 균열로까지 확대할 조짐을 보이자, 같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NATO) 회원국인 옆 나라 리투아니아가 즉각 중재에 나섰습니다. 유엔총회 참석을 계기로 뉴욕에 있던 기타나스 나우세다 리투아니아 대통령이 21일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과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초청해 3국 회담을 가진 겁니다. 폴란드를 통한 곡물 운송 절차를 단순화하되, 대신 리투아니아를 통한 운송을 늘리자는 리투아니아의 제안을 검토해, 가능한 한 빨리 이 문제를 해결하자는데 3국이 합의했습니다. 조만간 실무 회담이 열릴 예정입니다.

왼쪽부터 기타나스 나우세다 리투아니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 출처: 리투아니아 대통령 SNS


두다 폴란드 대통령은 '무기지원 중단' 발언 진화에도 나섰습니다. 폴란드 방송 TVN24와 인터뷰에서 "총리는 군대 현대화를 위해 구매하고 있는 새 무기를 우크라이나에 이전하지 않겠다는 의미였을 것으로 생각한다"면서 "우리가 미국과 한국으로부터 새 무기를 받으면 현재 우리 군에서 사용하고 있는 무기를 방출하고, 아마도 이 무기를 우크라이나에 이전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의 TVN24 방송 인터뷰 화면 갈무리.


하지만, 두다 대통령도 '자국 농민 보호'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명확히 했습니다. 같은 인터뷰에서 두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를 물에 빠진 사람으로, 폴란드를 구조대원으로 비유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를 잡는다고 하고, 실제로 익사하는 사람은 무엇이든 붙잡고 있다고 합니다. 익사하는 사람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방식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절박한 우크라이나 사정은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함께 죽을 수는 없다는 겁니다. 다음 달 총선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갈등은 격화될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SNS에는 '총리 발언이 와전됐다'는 두다 대통령의 발언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지푸라기 발언' 동영상은 일파만파 퍼지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편과 폴란드 편으로 의견이 갈리고 있습니다.

■ 우리에게 미칠 영향은?…전쟁 장기화, 재건 참여 '노란불'

우크라이나와 폴란드의 갈등은 당장 전쟁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동안 미국과 독일 , 영국 등 서방은 폴란드를 무기 지원 경로 중 하나로 이용해왔습니다. 언제 미사일이 떨어질지 모르는 우크라이나보다는 '나토 우산'을 쓰고 있는 폴란드가 훨씬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무기 제공이 원활하지 않으면 그렇지 않아도 지지부진한 '반격'이 더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전쟁으로 치솟은 물가가 다시 안정되길 바라는 국제사회로선 달갑지 않은 일입니다.

앞으로 있을 우크라이나 재건사업도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전쟁으로 도로와 철도, 에너지 등 각종 기반시설이 파괴된 우크라이나보다는, 모든 시설이 안정적인 폴란드가 '재건사업의 전초 기지'가 될 수 있습니다. 정부가 폴란드에 공을 들여온 이유이기도 합니다. 지난 7월 윤석열 대통령은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뒤 공동언론발표에서 "한국과 폴란드가 우크라이나 재건에 있어서 최적의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점에도 공감했다"고 밝혔습니다.

한-폴란드의 우크라이나 재건협력 양해각서 체결식. 윤석열 대통령과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이 배석한 가운데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과 야드비가 에밀레비츄 폴란드 우크라이나 개발협력 전권대표가 서명했다. 2023.7.13.(현지시간), 폴란드 바르샤바 대통령궁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의 갈등이 격화돼 '분쟁'으로 접어든다면, 당장 전쟁 장기화는 물론, 우리나라 기업의 재건사업 참여에도 차질이 빚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의 유럽 상황을 예의주시해야할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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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 기자 (bdlee@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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