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교실 간다” 하곤, 오늘도 한글 받아쓰기 눌러쓴 70살 영숙씨

신승근 2023. 9. 23.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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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커버스토리][한겨레S] 커버스토리 _ ‘야학의 변신’ 동부밑거름학교
기후 위기와 관련한 과학 지문을 강독한 뒤, 수업 내용을 복습하는 받아쓰기를 하고 있는 한글고급반 학생. 이정용 선임기자

받아쓰기가 시작됐다. 선생님이 받아쓸 문장을 읊는다. “3번.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초이’지?”

학생들이 한마디씩 한다. 선생님이 발음에 신경 쓰며 거듭 강조한다.

“뭐가 ‘초이’야? 최근은 가까워지는 거야. 근대, 최근 시점. 시장에서 파는 근대가 아니고.”

“헷갈리는데?”

“헷갈리라고 하는 거예요.”

받아쓰기는 계속된다. “눈에 띄는 이상기후 현상 중~.” “소리 나는 대로 쓰세요. 현상. 형상은 모양을 얘기하는 거예요. 중은 띄어 쓰고.”

“뒤에 무서운 사람들이 있으니 헷갈리지. 애매한 게 있어요.”

교실 뒤편에서 수업을 지켜보던 애먼 기자 핑계를 댄다.

“애매한 게 뭐죠? 글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흐름을 잘 이해하세요.”

지난달 23일에 찾아간 서울 광진구 뚝섬로 476(자양동) 낡은 건물 3층. 10평 남짓한 동부밑거름학교 교실에선 한글고급반 수업이 한창이다. 남학생 2명, 여학생 11명. 무척 진지하다. 느닷없이 휴대전화 벨 소리가 들린다. 김은선(62) 선생님이 목소리를 높인다.

“어? 이 소리가 어디서 나와? 진동이야, 진동!” 선생님은 거듭 주의를 시킨다. 그런데 학생들은 조금도 긴장하지 않는다. 되레 큰 웃음을 터뜨린다. 사제 간의 위계와 오래된 친밀감이 섞여 보인다.

받아쓰기는 계속된다. “눈에 띄는 이상기후 현상 중 하나가 폭염입니다. 해가 볕을 내리쬘 때….” 선생님은 중간중간 설명을 덧붙인다. “볕은 뭐야? 어떻게 하는 거? 뜨겁게 하는 거야. 빛은 뭐야? 비추는 거야.”

“평소와 다르게 불꽃을 일으킬 듯 사납게 내리쬐는 것을 폭염이라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지구는 더더욱….” 문장을 읽어주고 또 설명을 이어간다. “더더욱, 최상급이에요.”

김은선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묻듯 설명하고, 학생들은 귀를 쫑긋 세운다. “지구가 점점 뜨거워지니까 어떻게 돼? 지구가 아픈 거야. 어머님들도 체온이 36.5에서 37.5까지 최소한 이렇게 유지돼야 하는데, 지나치게 올라가면 어떻게 되지요? 어머님들도 아파서 비실거리듯 지구도 아픈 거야.”

한 남학생이 갑자기 방석을 들어 얼굴을 가린다. “안 찍혀요, 안 찍혀. 걱정 마세요.” 선생님이 진정시킨다. 기사에 필요한 수업 장면을 찍는 사진기자의 카메라가 자신을 향하고 있다고 생각해 고개를 숙이더니 아예 방석까지 꺼내 든 것이다.

서울 광진구 뚝섬로 동부밑거름학교에서 ‘어르신 학생들’이 김은선 선생님의 ‘한글고급반’ 수업을 듣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노래교실 간다’ 했는데, 이젠 당당히”

한글고급반 학생 13명은 모두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다. 얼추 60~70대는 돼 보인다. 김은선 선생님은 매주 월요일, 수요일 이들을 상대로 수업한다. 벌써 10년째다. 한글고급반은 초급반, 중급반과 달리 한글을 읽고 쓰는 게 목적이 아니다. 학생들이 현실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현상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글로 표현하는 데 집중한다. 이를 위해 과학, 역사 등 특별한 주제가 담긴 A4 용지 2장 분량의 지문을 강독하면서, 그 의미와 용어의 정확한 쓰임새는 물론 배경지식까지 전한다. 이날 수업에선 이상기후를 다룬 과학 지문을 강독했다. 이상기후의 의미, 원인, 해수면 상승, 봄가을이 짧아지고 겨울이 길어지는 현상, 극심한 가뭄과 폭염, 극소용돌이와 제트기류, 엘니뇨와 라니냐 현상까지 배웠다. 어르신들은 2시간 수업을 마무리하면서 배운 것을 복습하고,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물론 이상기후와 관련한 용어를 정확히 숙지하기 위해 받아쓰기를 한 것이다.

한글고급반 학생 황영숙 할머니는 1953년생, 올해 70살이다. 학교에 다니지 못해 한글을 읽고 쓸 줄 몰라 평생 가슴앓이를 하다 남편의 권유로 4년 전 동부밑거름학교를 찾았다.

“못 배운 게 정말 힘들었어요. 맞아서 몸에 생긴 상처만 아픈 게 아니에요. 딸자식들이 결혼을 하고 사위들은 나한테 문자를 보내는데, 한글을 모르니 답장을 안 했죠. 딸이 ‘엄마 이 서방이 인사말 보냈는데 왜 답장을 안 해줘?’ 하고 묻고, 사위는 ‘어머니는 문자를 안 보신다’고 하는데, 그때 완전히 무너진 거죠. 남편은 내가 말귀를 다 알아들으니 국민학교 3학년까지는 다녔을 것이라고 생각했대요. 내가 아예 못 다녔다고 하니, ‘먹고사느라 못 챙겨 미안하다’며 동부밑거름학교를 알아봐 준 거죠.”

그는 한글을 다 깨친 뒤 텔레비전 위에 “여보 사랑합니다”라고 써놨다. 남편은 “미리 알아보지 못해 후회스럽다”고 장문의 편지를 써주었다. 부부는 밤새 끌어안고 눈물바다가 되도록 울었다.

“자식들이나 주변에서 알아챌까 봐 한글 배우러 가면서도 노래교실 간다, 영어 배우러 간다고 했는데 이제 당당하게 말해요. 나 같은 엄마들은 한 사람이라도 빨리 여기로 오라고요.”

동부밑거름학교는 서울시교육청이 지정한 문해교육기관이다.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한글을 몰라 문자메시지도 보내지 못하고, 은행이나 병원에서조차 움츠렸던 이들에게 일상생활에 필요한 한글을 정확히 쓰고 읽고 이해할 수 있게 돕는 곳이다. 초등학교·중학교 학력인정 과정도 운영한다. 초등학교 과정 1학급, 중학교 1·2·3단계 한 학급씩 모두 4학급을 운영하고 있다. 2011년부터 시작한 초등학교 과정은 주 3회 2시간씩 40주의 수업을 3년 동안 이수하면 초등학교 졸업 학력을 인정한다. 2016년부터 운영한 중학교 과정은 1·2·3단계(1·2·3학년)로 나뉘는데 단계마다 1년에 주당 10시간 이상, 연간 40주의 수업을 받아야 한다. 국어·영어·수학·사회·과학·미술 등 6과목을 배워야 하고 중간·기말고사도 치른다.

공용 공간 한쪽에 마련한 교무실에서 선생님들이 수업 준비를 하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동부밑거름학교는 교무실 겸 공용으로 쓰이는 중앙 공간을 중심으로 교실 3개가 배치돼 있다. 좁은 공간에서 황영숙 할머니를 비롯한 학생 90여명이 배움을 이어가고 있다. 김은선 선생님이 진행하는 한글고급반을 비롯해 한글 초급·중급 과정을 다니는 학생이 60여명으로 가장 많다. 이들 가운데 7명은 초등학교 학력인정 과정을 밟고 있다. 중학교 과정엔 31명이 등록했다. 1단계(1학년) 11명, 2단계(2학년) 10명, 3단계(3학년) 10명이다. 20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가장 큰 교실에서 요일별로 중학교 수업을 한다. 이곳에 등록한 학생도 대부분 어르신이다.

1954년생인 구복순 할머니는 동부밑거름학교 중학교 3단계 학생이다. 영어 수업을 듣기 위해 기다리던 구복순 할머니는 “초등학교만 마치고 생계를 위해 안 해 본 일 없이 다 했다. 그러다 몸이 상해 치료를 받고 쉬면서 뒤늦게 중학교 졸업장을 따야겠다는 용기를 냈다”고 했다. 6과목을 3년간 이수하고 중간·기말고사도 다 치르고 출석 일수도 착실히 채웠다. 내년 2월이면 중학교 졸업장을 받는다. 그는 서울특별시 평생교육진흥원에서 개최한 전국 성인문해시화전에서 진흥원장 상도 받았다. 구복순 할머니는 고등학교·대학교까지 마치는 게 목표다.

어르신들이 초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6과목을 들어야 하는 중학교 과정을 밟는 건 쉽게 결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황영숙 할머니도 초등학교 학력인정 과정은 이미 끝마쳤다. 그런데 중학교 과정에 등록하지 않고 4년째 한글고급반 수업을 듣고 있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도 가긴 가야지요. 교복은 꼭 입어보고 싶고요. 하지만 아직 영어가 자신이 없어요. 영어 수업을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아서 계속 고민 중이에요.”

“우리 정체성, 기본 정신은 여전히 야학”

지금은 교육청이 지정한 문해교육기관 몫을 하는 동부밑거름학교의 뿌리와 정체성은 야학이다. 무려 55년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 시작은 1968년 천막 야학인 ‘성수재건학교’였다. 사회 재건과 국민의 문해력 증진을 위해 2년 과정의 학교로 출발했다. 2년 뒤인 1970년엔 ‘동부직업소년기술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젊은이들에게 글과 함께 직업 기술을 가르쳤다.

1973년부터 1992년까지 20년 동안 대한민국 대표 야학인 동부야학으로 명맥을 이었다. 1970년 11월 전태일 열사가 분신하고 청계피복노조가 3년 뒤 ‘청계피복 새마을 노동 교실’이라는 노동야학을 만든 뒤,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어린 노동자들이 자신의 현실을 인식하고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돕는 야학이 전국에서 생겨났다. 동부야학도 그 흐름에 함께했다. 성수동에 밀집한 철공소·제화점에서 일하는 어린 노동자들은 힘겨운 노동을 마친 뒤 야학을 찾았고, 대학생 자원봉사자들이 그들을 가르쳤다.

야학의 맥을 이어오던 동부밑거름학교가 서울시교육청이 지정한 성인 문해교육기관이 된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동부밑거름학교 대표를 맡은 한상배(72) 선생님은 “우리 정체성, 기본 정신은 여전히 야학”이라면서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학력인정기관 공모에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다시 태어난다면 대학원까지 다니고 싶다’는 바람을 적은 한 학생의 글. 이정용 선임기자

“동부야학 시절엔 대학생들이 선생님으로 찾아오고, 성수동 주변 공장에 다니는 젊은이들이 배우러 왔지만, 지금 대학생들은 취업 준비에 아르바이트에 제 살길 찾기 바쁘죠. 눈으로 보시면 잘 알겠지만 배움에 목말라하는 이들도 이제 대부분 어르신입니다. 우리가 무슨 큰 봉사활동을 한다고 생각지 않아요. 그저 야학의 기본 정신을 잊지 않고, 배우려는 이들을 위해 학교를 지속하는 것입니다.”

동부밑거름학교 55년 역사는 1950~60년대 천막 야학, 70~80년대 노동야학, 90년대 이후 장애인과 어르신 문해교육기관으로 변천해온 한국 야학의 역사가 온전히 녹아 있다. 한상배 선생님은 20여년째 동부밑거름학교를 지키고 있다. 50대 초반인 2000년대 초 교사를 구한다는 전단을 보고 이곳을 찾은 게 인연의 시작이었다.

사실 동부밑거름학교는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몸부림쳤다. 1992년 9월엔 보증금을 마련하지 못해 임시휴교에 들어가는 등 문을 닫을 뻔한 일도 있었다. 다행히 많은 이들의 도움으로 1993년 1월 어렵사리 다시 동부야학의 문을 열 수 있었다. 1995년엔 성수 지역에 있는 여러 야학 단체들과 통합해 ‘동부교육·정보센터’를 만들었다. 당시 통합 노력에 관여한 남상욱(57) 선생님은 “장기적으로 지역 주민을 위한 도서관을 꿈꾸며 힘을 합쳤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했다. 참여 단체들 사이에 이견도 있었고, 구청에서 주민도서관을 만드는 등 변화하는 환경도 영향을 미쳤다.

‘야간 수업’ 30년 봉사하는 현직 교사도

결국 천막 야학인 성수재건학교를 세운 지 30년 만인 1998년 3월 ‘동부밑거름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한글교실을 시작했다. 전통적 의미의 야학에서 한글을 모르는 어르신을 주요 학생으로 받아들이는 큰 결정을 한 것이다. 물론 동부밑거름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한글교실을 시작한 뒤에도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는 야학의 정신은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낮에는 초·중등 학력인정 과정 수업을 하면서, 생업 때문에 낮에 배움을 이어갈 수 없는 이들을 위해 매일 저녁 7~9시 야간 수업을 지금도 하고 있다. 현직 초등학교 교사인 남상욱 선생님은 30여년을 이곳에서 활동한다. 경기도 한 초등학교로 전근을 갔지만, 그는 지금도 매주 목요일 밤 자양동 동부밑거름학교까지 찾아와 어르신 학생들을 가르친다.

2003년부터는 지역에 사는 이주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한글교실도 운영하기 시작했다. 2004년에는 지역 저소득층 가정 아이들과 함께하는 공부방도 열었다. 그러나 지속되지 못했다. 이주노동자를 위한 한글교실은 이주여성 노동자들이 아이를 낳고 정착하면서 어려움에 직면하는 역설적 상황에 직면했다. “필리핀·중국·베트남 이주여성이 한글학교를 다닌 지 1~2년 뒤에는 어린아이를 낳아 데려오면서 육아방 기능도 해야 했는데, 계속 감당할 공간도 여력도 없었어요. 한동안 이주여성이 수업을 받을 때 다른 선생님들이 아이를 돌봤지만 지속하는 게 불가능했지요.”(한상배 선생님)

초·중등 학력인정 과정을 온전히 운영하는 것도 벅찬 게 현실이다. 현재 동부밑거름학교에는 교사 16명이 있다. 한글·글짓기·영어 교실과 초등학교 학력인정 과정에 6명, 중학교 학력인정 과정에 10명의 교사가 배정돼 있다.

학교 운영 비용을 구청의 임대료 지원 외에 후원금 등으로 충당해야 하는 동부밑거름학교에선 김은선(왼쪽부터)·한상배·박진만 선생님이 상근하며 수업은 물론 청소까지 직접 한다. 이정용 선임기자

하지만 상근자는 한글고급반을 맡은 김은선 선생님뿐이다. “우리 학교에서 유일하게 4대 보험이 되는 선생님”이라고 했다. 문해교육기관으로 지정되면서 교육청에서 학력인정 과정 수업을 진행하는 선생님들에게 시간당 3만원의 강의료를 지급하고, 광진구청에서 월 임대료 70만원을 지원한다. 나머지 상근자 비용, 각종 학용품과 사무용품 구매 비용은 선생님의 자발적 기부금과 학생·졸업생의 후원금으로 충당해야 한다. 결국 상근자인 김은선 선생님 외에 대표인 한상배 선생님, 초등 학력인정 수업을 하는 박진만(67) 선생님까지 3명이 사실상 상근하면서 학교 운영과 관련한 모든 일을 처리한다.

중등학력 문해교육 교원 연수를 마친 한상배 선생님은 대표와 중학 과정 국어 교사를 겸하며 학생 모집 등의 학사 업무는 물론 청소 등 허드렛일까지 한다. 은행에서 명예퇴직한 뒤 광진구청에 봉사활동을 신청해 2012년부터 동부밑거름학교와 인연을 맺은 박진만 선생님은 2018 초등학력 문해교육 교원 연수를 마치면서 초등 과정 수업을 진행할 자격을 갖췄다. 그 역시 학교의 소식지인 ‘새물내’ 편집 등 많은 일을 처리한다. 박진만 선생님은 “이 지역에 살고 있고, 생계유지가 어렵지 않아 사명감을 갖고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영어·과학 등 다른 과목은 외부 강사에게 의존한다. 과목별로 일정 기간 교원 연수를 마쳐야 수업을 할 자격이 생기는데, 동부밑거름학교 형편에선 모든 과목 선생님을 상시 채용할 수 없다. 결국 동부밑거름학교뿐 아니라 서울 지역 학력인정 문해교육기관을 돌면서 수업을 하는 강사진이 수업 시간에 맞춰 동부밑거름학교를 찾는다.

빠듯한 살림살이지만 동부밑거름학교를 멈추지 못하는 건 55년 야학의 역사가 이곳에 있고, 문해교육이 꼭 필요한 이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선보는 자리에서 문맹을 숨기려고 신문을 보는 척했는데 신문을 거꾸로 들어 딱지를 맞은 이, 공장에서 알파벳으로 상품을 분류해야 하는데 영어를 몰라 설움받은 이, 시가 식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상표를 읽지 못해 무시당한 이, 저마다 배움에 한이 맺힌 이들이 동부밑거름학교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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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 없는 3층 교실’의 어려움

65살 홍기남씨. 그는 지난달 23일 수업 때 얼굴 노출을 꺼려 방석과 마스크로 자신을 가렸다. 1주일 뒤인 30일, 수업이 끝난 뒤 그를 다시 만났다. 주변 사람은 물론 가족도 모르게 5년째 동부밑거름학교에 다닌다고 했다. “자기들이 나보다 더 모르면서 내가 국민학교도 못 나와 한글을 배우러 다니는 걸 알면 무시당하니까 피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1주일에 세 차례 아침 7시30분에 서울 강서구 집을 나선다. 5년째다.

“글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 학원도 다녀봤지만 다 영업 수단으로 생각했어요. 여기 동부밑거름학교는 다르더라고요. 병원·은행 업무도 힘들고 핸드폰 문자를 주고받는 게 가장 큰 고충이었는데 이제 자신 있어요. 한글뿐 아니라 역사·영어도 가르쳐줘 이젠 거의 다 하는데, 아직 조금 부족한 게 있어 그걸 채우고 있어요.”

그는 중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얻기 위해 검정고시에 도전할 생각이다. 동부밑거름학교에 중학교 학력인정 과정이 있지만, 생업 때문에 주당 10시간씩 40주 과정을 3년 동안 진행하는 건 무리라고 판단했다. 그는 오전 수업을 마치면 일터로 향한다. “국회의원 월급이 1천만원이 넘는다고 하던데, 여기 한달에 1천만원씩만 지원하면 선생님들이 얼마나 더 잘할 수 있겠어요? 학교도 더 좋은 데로 옮길 수 있고….” 그는 정치인과 교육청에 이 말을 꼭 전하고 싶다고 했다.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 3층에 자리한 동부밑거름학교. ‘어르신 학생’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학교를 1층으로 옮기는 게 가장 큰 바람이다. 이정용 선임기자

동부밑거름학교의 가장 큰 걸림돌은 ‘엘리베이터 없는 3층’ 위치와 낡은 시설이다. 과거 동부야학 시절과 비교하면 많이 좋아졌다지만, 구청에서 운영하는 복지관 등에 견줘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시설이 낙후해 있다. 학교 운영을 계속하려면 초·중등 과정 학생 수를 충원해야 한다. 해마다 학생 모집을 위해 구청·복지관 등에서 설명회를 연다. 많은 이들이 배움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동부밑거름학교를 방문한다.

하지만 좁은 교실, 낡은 책상과 의자, 좌변기 없는 화장실, 엘리베이터 없는 3층이라는 위치를 둘러본 뒤 대부분 지원서를 쓰지 않고 돌아간다. 배움은 둘째치고 낡은 시설의 불편함, 특히 3층까지 오르내리는 게 힘겹다는 이유다. 설명회를 하러 나갔던 복지관에서 20명이 한꺼번에 찾아왔지만 단 한 사람도 등록하지 않고 발길을 돌린 일도 있었다. 충격을 받은 동부밑거름학교는 교실 의자를 싹 바꿨다. 접근성이 좋은 독립 공간으로 이전을 위해 후원금 일부를 차곡차곡 적립하고 있다. 하지만 쉽지 않다.

“우리가 가장 원하는 건 1층에 학교를 마련하는 것이에요. 과거 젊은이들이 드나들던 야학과 달리 대부분 학생이 60~70대 어르신인데, 3층까지 올라오실 수 없거든요. 그래서 배움을 포기하고, 어렵사리 이 학교에 다니더라도 뒷걸음질로 계단을 오르내리는 건 정말 힘겹죠. 하지만 1층은 임대료가 확 올라가기 때문에 솔직히 저희 힘만으로는 현실화할 것이라 생각할 수 없어요.” 한상배 선생님은 “매주 수요일 2시간씩 운영하던 작가반도 강사를 고용할 수 없어 휴강 중”이라고 덧붙였다. 동부밑거름학교는 그만큼 많은 이들의 따듯한 후원이 절실하다. 뒤늦게 배움의 열정을 불사르고 있는 어르신 학생들은 지식을 나누고 젊음으로 활기를 불어넣을 대학생 자원봉사자도 기다리고 있다.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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