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도 전에 낙석 '쾅' 겁없는 대학생들의 해외원정 생존기

조윤서 성균관대 산악부 2023. 9. 22.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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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패치 스파이어의 스노패치 루트(17피치, 5.8)
등반 중인 민건이 뒤로 장엄한 부가부산군이 펼쳐진다.

신인상을 받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신인상은 딱 한 번만 탈 수 있는 귀중한 상이다. 다만 그것을 당당하게 받을 수도 있고, 앞으로 잘하라는 채찍질로 여길 수도 있다.

이렇게 복잡미묘한 감정인 것은 우리의 첫 원정이 성공과 실패가 중첩돼 있는 상태기 때문일 것이다. 원정기라 쓰고 생존기, 혹은 반성문이라 읽는다. 아직 어느 것이 성공이고, 실패인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스노패치 루트 시작지점에서 바라본 풍경. 크레바스가 어마어마하다. 빙하를 배경에 두고 등반한다는 건 정말 가슴 뛰는 일이다.

부가부, 북미 최고의 알파인 등반지

새벽 4시, 눈을 떴다. 어슴푸레한 달빛에 의지해 텐트 밖으로 나갔더니 높게 뻗은 침엽수림 사이로 군데군데 눈이 덮인 바위산이 보였다. 그렇지. 여긴 캐나다다. 북한산이 아니라 부가부, 인수봉이 아니라 스노패치 스파이어(3,084m), 취나드A가 아니라 스노패치 루트다. 우리가 오늘 올라야 할 곳이었다.

캐나다 부가부주립공원Bugaboo Provincial Park은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북미에선 가장 유명한 알파인 등반지 중 하나다. 빙하로 둘러싸인 화강암 봉우리들이 잔뜩 솟아 있어 등반가에겐 천국이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봉우리에 수백 미터에 달하는 수많은 등반루트가 개척되어 있다.

1피치를 오르는 상준이(위)와 경태(아래). 이 사진을 찍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낙석을 맞았다.

7월 26일부터 8월 11일까지 함께한 우리 원정대는 특이하게도 구성원 모두 재학생이다. 경험 많은 졸업생에게 의존하지 않고 성숙한 알피니스트로 성장하기 위해 의기투합했다. 부가부는 우리 산악부의 핵심동력이 될 주장급 주니어 산악인으로 한 계단 성장하기 위한 발판으로 적격이었다.

그중 스노패치 스파이어는 이곳의 가장 대표적인 봉우리 중 하나일 뿐 아니라, 정상에서 전체 산군을 탁월하게 조망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도 클래식한 루트로 손꼽히는 스노패치 루트(17피치, 5.8)를 '부가부 맛보기'용 첫 등반지로 선정했다.

오전 5시 30분, 노란색 블랙다이아몬드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섰다. 케인산장까지 단숨에 올라섰다. 여명이 산자락을 에워싸듯 빛을 밝히고 있었다. 스노패치 스파이어는 그 붉은빛을 그대로 흡수한 듯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스노란 이름에 걸맞지 않는 묘한 광경이었다.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낮은 초목들이 깔려 있는 케인산장 주변을 지나면 메마른 바위와 푸석한 모래로만 이루어진 땅에 도달한다. 그때부터가 시작이다. 어프로치의 시작이자, 우리 원정의 시작.

케인산장을 갓 출발한 산악부 1년차 전요한. 다리가 얇다고 불평하곤 하는데 그 얇은 다리로 너무 잘 걸어 놀라웠다.

우리 원정대에서 가장 온화하다고 자평하는 나는 그 여유에 걸맞게 걸음 또한 다소 느긋하다. 나는 이 타고난 걸음걸이를 내심 자랑스러워했건만, 산악부에 입부한 2021년 이후로는 줄곧 원망해 왔다. 늘 뒤처지기 일쑤였던 나는 이번 원정에서만큼은 다른 모습을 보여 주겠다고 다짐했었다. 러닝과 런지, 지구력 클라이밍 등 다양한 방법으로 하체 근육을 훈련했고, 얼떨결에 11kg이나 감량해 버렸다.

의기양양하게 스노패치 스파이어로 향하는 어프로치길을 올려다보았다. 바위와 모래? 그저 사뿐사뿐 걸어가면 되겠다 싶었다. 5분 뒤, 나는 생각했다. '길'이라는 단어는 그 땅에 과분했다. 발을 딛는 족족 바스라지고, 흔들리고, 무너졌다.

2팀 선등자 규호(왼쪽)와 확보를 보는 상준(오른쪽). 이 작은 테라스에 오기 위해 짧은 다운클라이밍을 해야 했는데 꽤 아찔했다.

캐나다 땅은 흐른다

우리 원정대의 첫 번째 실수라면 이것이다. 줄곧 참고해 왔던 가이드북에선 이 지형을 'Grade 4 Climbing' 이라고 표기해 뒀다. Grade 4 Climbing이란 필수적으로 자일을 사용해야 하는 단계 바로 직전, 손과 발을 이용해 오를 수 있는 가장 고난도의 암릉 지역이다. 기술을 꽤 요하는 지형이었는데, 나를 포함한 63, 64기 대원들은 이에 대한 경험과 훈련이 부족했다.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지구온난화의 영향인지 오랜 기간 눈과 얼음으로 덮여 있었던 상당수 구간마저 급작스럽게 불안정한 흙바닥을 드러내고 있던 터라 걷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시간이 점점 지체되기 시작했다.

"그래, 머나먼 캐나다에선 땅이 흐르기도 하는구나! 그럴 수 있지."

나는 내 좁은 식견을 탓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애플비 캠프 앞에 있는 두 개의 호수. 실제로 올라가면 고도감이 엄청나다.

이정표 역할을 하는 케언cairn을 따라 걷길 두 시간 반, 마침내 스노패치 스파이어에 붙을 수 있었다. 앞장섰던 규호와 호준이는 이미 등반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서둘러 배낭 속 자일을 꺼내고 장비를 착용했다. 규호-상준-나로 이루어진 2팀은 안자일렌으로 등반하기로 했다. 루트가 워낙 쉽기도 했고 어프로치에서 지체된 시간을 만회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렇게 규호와 상준이를 차례로 올려 보내고 1팀 마지막 민건이와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던 때였다. 갑자기 퍽 소리가 나며 내 고개가 앞으로 홱 꺾였다. 주먹 두 개만 한 크기의 낙석이 내 뒤통수를 가격한 것이다. 눈물이 날 줄 알았는데 쌍 콧물이 나왔다. 대자연의 돌팔매질에 나는 흥분해 민건이에게 "야 대박, 나 방금 낙석 맞는 거 봤냐!"라고 소리쳤고, 민건이는 "와 누나! 방금 머리 깨질 뻔 했어요!"라고 소리쳤다. 머리가 얼얼해 경황이 없어 당시엔 천진하게 넘겼지만, 헬멧을 쓰고 있기에 망정이지 첫 벽에 붙지도 못하고 큰일 날 뻔했다. 등반에선 늘 긴장을 풀면 안 된다.

새하얀 빙하를 배경으로 1피치를 올랐다. 루트는 사실상 리지에 가까웠고 몇몇 구간은 상준이와 동시에 올랐다. 인상 깊었던 것은 난데없이 바위 중턱에서 세차게 흐르는 물줄기를 발견한 일이다. 스노패치의 눈이 몽땅 녹아 흐르는 것이었다. 거긴 언제나 눈이 있을 줄 알았는데, 씁쓸한 마음을 뒤로하고 패치 옆 슬랩 구간 약 300m를 안자일렌으로 내달렸다.

아무리 쉬운 것이라도 여러 차례 반복되면 지친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14피치 즈음이었다. 시간은 오후 5시, 등반을 시작한 지 12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도무지 끝날 기미가 안 보였다. 게다가 마지막 세 피치는 루트 파인딩도 어려워 선등자들도 꽤 애를 먹었다.

스노패치 스파이어 정상뷰. 왼쪽이 피존 스파이어, 오른쪽이 하우저 타워다.

정상은 '인간 세상의 끝자락'

나는 사실 아까 낙석을 맞고 죽었고, 생전에 열심히 살지 않은 죄로 나태지옥에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몸을 움직이던 차였다. 가장 앞서가던 호준이의 무전이 귓전을 때렸다.

"정상이다!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다!"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다'는 그 한마디에, 별안간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온 몸의 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심장이 거세게 뛰고 웃음이 실실 나기 시작했다.

정상에서 찍은 기념 사진. 사진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김호준. 뒷열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조윤서, 최규호, 문상준, 최민건, 전요한, 김경태.

그리고 스노패치 스파이어의 정상은 정말로 그랬다. 인간 세상의 끝자락에 닿은 느낌이었다. 8개월 동안 책에서만 보던 피존 스파이어, 하우저 타워, 보웰 빙하지대를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청명한 하늘 아래서 7명의 대원들은 환호하며 부기를 꺼내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우리 원정대의 첫 성취였다.

나는 저 멀리 보이는 하우저 타워를 보며 속으로 소원을 빌었다.

'내일이면 저길 가야 하니 빨리 내려가서 자게 해주세요.'

간절함이 부족했는지 내 소원은 절반만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나는 '내일 내려가서 자게' 된다.

다음은 내 하강일지다.

하강하기 직전, 날이 벌써 저물었다. 오른쪽 봉우리는 피존 스파이어.

- 저녁 9시 하강 시작. 새벽 1시 복귀를 예상했다. 크라우스 매카시 루트로 하강했는데 도중에 헤드랜턴을 꺼내 써야 했다. 5번 정도 하강하고 다운클라이밍 하려 했는데 알고 보니 한 번 더 하강해야 했다. 위에서 장비를 회수하면서 내려온 규호가 6피치 하강 지점을 찾으며 내려왔다. 옆에선 경태가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찬바람이 점차 거세졌고 미리 준비해간 비상담요를 꺼내 체온을 유지했다.

필사적인 야간 하강.

- 12시, 하강 완료. 이제 스노패치피존 콜Snowpatch-Pigeon Col에서 하강할 차례였다. 가이드북을 꼼꼼히 숙지했음에도 어둠 속에서 하강 포인트를 찾자니 결코 쉽지 않았다. 낙석이 후두둑 떨어지는 모래, 바위 사면을 줄줄이 건너 한참을 헤매고 나서야 겨우 찾았다. 민건이가 점점 졸기 시작했다. "너 이러다 죽는다"며 거의 윽박지르다시피 깨웠다. 나는 물이 너무 마시고 싶었다. 30m 하강 두 번, 60m 외줄 하강 두 번.

정상 직전. 루트에 볼트가 없어 앵커를 만들어 올라갔다.

- 2시 하강 완료, 그리 길지 않은 빙하구간을 건너기 위해 크램폰을 착용했다. 돈을 아낄 요량으로 페츨 제품을 카피한 중국 제품을 샀는데, 이게 우리 원정대의 두 번째 실수였다. 장비에 돈 아끼지 말자. 앞서간 호준이가 크레바스를 피해 이리저리 길을 찾았고, 모두가 이를 따라 안전하게 빙하를 건넜다.

- 3시. 어프로치가 끝났던 지점 즈음에 도착했다. 이때 잠시 정신이 돌아와 부랴부랴 카메라를 꺼내들고 영상을 찍었었다. 지금 다시 보니 제 세상을 만난 사람 마냥 조잘대고 있다. 나는 오히려 각성한 상태였던 것 같다.

가민 위성통신기로 시간을 확인하자 새벽 2시 27분을 가리키고 있다.

- 우리가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구르며 올라온 지역을 밤중에 내려가는 일은 절대 쉽지 않았다. 어디에 홀린 것 마냥, 지났던 길도 몇 번이고 다시 오르락내리락 했다. 반경 1km 정도 되는 구간을 거의 뱅뱅 돌다시피 했다. 탈진했다. "물 한 모금만 마시면 소원이 없겠다"고 중얼거렸는데, 규호가 3분의 1정도 물이 남은 날진을 건넸다. 최후의 순간을 위해 아껴놨었단다. 이런 사람이 대장을 하는구나 싶었다. 한 모금씩 물을 나눠 마신 후발대(나, 상준, 민건, 규호)는 계속 서로의 상태를 확인하고 챙기면서 어둠 속을 걸었다.

- 4시. 내 뒤를 따라오던 민건이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헤드랜턴 배터리가 다 돼서 휴대폰 플래시에 의지해 걷던 참이었는데 휴대폰을 바위 사이로 떨어뜨렸단다. 그 순간 분노가 치미는 듯 했지만 그 분을 쏟을 시간도 사치였다. 빨리 찾기나 하자는 생각에 거대한 바위들을 낑낑대며 밀고 들고 옮겨서 겨우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는데 모두가 사라지고 둘만 남겨졌다.

마지막까지 아끼고 아낀 물을 건네준 규호. 끝까지 침착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 솔직히 그냥 죽는 건가 싶었다. 불빛이라곤 머리 위의 달빛과 별빛뿐. 일단 살고 봐야겠다 싶어서 물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갔다. 빙하가 녹은 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정수도 되지 않은 물을 그 자리에서 1리터쯤 흡입했다. 그리고 하나 남은 초코바를 민건이와 나눠 먹었다.

- 5시 반쯤 여명이 올라왔다. 그제야 지형이 눈에 좀 들어왔다. 가파른 능선을 조금 타고 오르자 케인산장으로 가는 길이 보였다. 씩씩하게 앞장서는 민건이 뒤에서 나는 안도감에 눈물을 훔치며 그 길을 걸었다.

- 7시, 볼더야영장에 도착했다. 규호와 요한이가 우리를 맞이해 줬다. 다들 5시 반쯤 캠프에 도착해 아침을 먹고 우리를 기다리다 못해 자러 들어갔단다. 경태와 상준이도 나, 민건이와 떨어진 이후 길을 헤맸으나 씩씩하게 알아서 텐트로 무사 귀환했단다.

이날 이후 우리 원정대에는 암묵적인 룰이 생겼다.

'감히 뭔가를 예상하려 하지 말자.'

<다음 호에 계속>

월간산 9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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