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산행기] 장맛비를 뚫고 오른 부산 금정산

박영민 서울시 강남구 논현로 2023. 9. 21.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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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산 고당봉에서의 필자. 여름 장마 속 금정산은 구름에 갇혀 있었다.

금정산은 낙동강이 흘러 바다와 만나는 곳에 우뚝 솟아있는 부산의 진산이다. 부산광역시 금정구, 북구와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에 걸쳐있다. 높이는 801.5m로 부산에서 제일 높은 산이며, 부산을 대표하는 산이다.

금정산에는 오래전부터 다산을 기원하는 성스러운 장소로 여겨진 금샘이 있다. 가뭄이 이곳에서 들면 기우제를 드렸다고 한다. 정상인 고당봉은 금정산의 주봉으로 부산 전경과 부산 앞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지난번 광주 무등산에 다녀온 후 곧바로 다음 목적지인 금정산 산행 준비를 한다. 여러 산행 자료를 찾아보는데, 일기예보를 보니 산행 예정일에 부산 지역에 폭우가 예보되어 있다. 장마 시즌의 힘든 우중 산행이 될 것 같아 걱정된다.

안개에 갇힌 금정산

산행 당일, 비가 퍼붓는 꿈에서 깨어 보니 새벽 4시다. 창밖 너머로 본 하늘은 조용하다. 잠자리를 정리하고 산행 준비를 마친 뒤 수서역으로 향한다. 이번엔 나 홀로 산행이다. 처음 혼자 산행할 때는 두려웠지만 몇 번 하고 나니 홀가분하게 산행에 집중할 수 있어 요즘은 나 홀로 산행을 즐기는 편이다.

오전 6시 30분, 부산행 SRT 고속열차가 수서역을 떠나 오전 9시 5분 부산역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부산 하늘은 아직 잠잠하다. 지체하지 않고 곧장 금정산으로 향한다. 노포역으로 가는 1호선 지하철을 타고 범어사역에 내린다. 여기서 90번 버스로 갈아타고 범어사에 도착해 산행을 준비한다.

범어사부터 금정산 산행의 시작이다. 범어사 왼쪽 산어귀에 들어서니 고당봉과 북문 이정표가 산객을 반겨준다. 오늘은 범어사를 가운데 두고 시계 방향으로 대성암과 금강암을 지나, 금정산성 북문에서 고당봉 정상에 오른 후 내원암으로 하산할 예정이다.

고당봉으로 오르는 길. 하늘을 가린 오래된 고목들과 크고 작은 화강암 바윗길로 이어진 등산로가 나온다. 말로만 듣던 범어사 돌바다 길이다. 조금씩 내리는 비가 바위 아래로 스며든다. 자세히 귀를 기울이니 암괴류 아래로 계곡물이 흐르는 소리도 들린다.

후드득, 후드득 내리는 장맛비에 떨어진 노각나무 하얀 꽃이 산길에 누워 있다. 혹시라도 이 예쁜 꽃을 밟을까 노심초사하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긴다. 오르는 길 중간중간 바위 계단 구석에 자리 잡은 꽃고비와 큰까치수염의 하얀 꽃이 지친 산객의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쉬지 않고 오르니 점점 숨이 찬다. 숨도 돌릴 겸 행동식으로 가져온 찹쌀떡과 사과를 먹으며 미끄러운 바위 계단을 오르고 있는데, 돌연 길이 편안해진다.

잠시 후 호젓한 길 뒤로 안개비에 감추어진 금정산성 북문이 위용을 드러낸다. 이 문을 지나니 금정산 탐방지원센터가 나타난다. 약수터가 보여 가까이 가니 '음용불가'라고 쓰여 있다. 시원한 약수를 마시지 못해 아쉽다.

시계는 오전 11시 50분을 가리키고 있다. 고당봉 0.8km 이정표 옆의 고당샘을 지나 오른쪽으로 산허리를 가로지르니 얼마 가지 않아 '금샘 가는 길'이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금정산에 금빛 물고기 한 마리가 오색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놀았다는 금샘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안개 자욱한 길, 얼마나 들어갔을까. 갑자기 커다란 바위가 길을 가로막는다. 바위 위로 로프 하나가 매어져 있다. 스틱을 가방에 넣고 양손으로 로프를 잡아 화강암 바위를 기어오른다. 안개 때문에 주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올라온 곳을 내려다보니 높이를 알 수 없는 낭떠러지 같아 두 다리가 후들거린다. 스산한 바람까지 부니 괜히 더 긴장된다. 떨리는 마음을 다잡고 고개를 들어보니 9m 높이의 수직 바위가 보인다. 그 바위 꼭대기에는 조그맣게 물이 고여 있다. 금샘이 분명하다.

플래카드 뒷면에는 김재수 대장의 명언을 적어놓았다.

꿈꾸는 이에게 열린 하늘

바위 꼭대기에 올라 금샘을 구경한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어 곧바로 발걸음을 돌린다. 올라온 길을 되돌아가 고당봉 정상으로 향한다. 가파른 나무데크길이 이리저리 이어진다. 정상에 왔겠거니 하면 또 나무계단이 이어진다. 몸이 지칠 때쯤 좁은 바위 계단 위로 뻥 뚫린 하늘이 보인다. 드디어 금정산 정상이다.

정상 아래의 할미사당을 지나자, 바람이 불면서 안개가 걷히더니 고당봉 정상석이 보인다. 바람이 많이 불어 사진 찍기 힘들었는데, 친절한 부산 산객의 도움으로 간신히 플래카드를 들고 인증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플래카드에는 예전에 히말라야 랑탕을 함께 걸은 김재수 대장의 명언 '꿈꾸는 사람에게 기회가 온다'는 문구를 적어 놓았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누이의 권유로 클라이밍을 시작했다던 김재수 대장. 플래카드에 적힌 문구를 보고, 자일과 함께 금정산 암벽을 수없이 오르내렸을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고당봉 정상석을 뒤로 하고 내원암 쪽으로 하산한다. 급경사의 원형 철계단을 내려설 때가 12시 40분 경이었는데, 서서히 안개가 걷히면서 금정산 정상의 멋진 화강암 바위가 모습을 드러낸다.

로프를 잡고 좁은 바위 사이로 내려가니 푸른색 산수국이 나를 반겨준다. 산수국을 뒤로하고 범어사까지 쭉쭉 내려간다. 범어사까지 이어지는 3.4km 편안한 하산길을 걷다 소원탑을 만난다. 아마 이곳을 지나는 수많은 산객이 안전과 자신의 소원들을 빌었을 것이다.

범어사 근처에 이르자 전나무 숲길이 나온다. 큰 사찰 뒤에는 대들보 교체용으로 전나무를 많이 심었다던데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범어사 일주문과 불이문을 지나 보제루를 통과하니 대웅전이다. 이곳에 잠시 멈춰 지장보살님께 동기들과 부모님의 극락왕생을 빌었고, 약사여래불께는 아픈 동기들의 쾌유를 기원했다. 그리고선 조용히 절을 빠져나와 부산역으로 향한다.

오후 4시 40분, 수서행 고속열차에 몸을 싣는다. 새벽부터 시작된 산행이 끝나가고 있다. 금정산이 서울에서 오느라 고생했다고 따스하게 품어주어 장마철 우중 산행도 안전하게 마칠 수 있었다.

SRT는 쏟아지는 비를 뚫고 거침없이 서울을 향해 내달린다. 오랜 산행의 긴장이 풀려서일까? 차창 너머로 내리는 비처럼 스르르 잠이 쏟아진다.

월간산 9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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