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게임’의 역설, 프랑크푸르트학파가 묻다

한겨레 2023. 9. 18.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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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이론 100주년 학술대회 참관기
신자유주의 비판마저
콘텐츠로 소비하는 시대
‘위기에 대한 이론’ 방향성 모색
프랑크푸르트대학 인근 서점의 모습. 주로 파시즘과 극우주의 관련 서적들로 채워져 있다.

올해는 일명 ‘프랑크푸르트학파’라고 불리는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의 창립 100주년이다. 이를 기념하여 9월13일부터 15일까지 독일 프랑크푸르트 괴테대학교에서 국제학술대회가 열렸다. ‘비판이론을 미래화하기’(Futuring Critical Theory)라는 제목의 이번 학술대회에서는 40여 명의 학자들이 발표와 토론을 맡고 수많은 청중이 찾아와 성황을 이루었다.

사회연구소의 이론적 전통은 20세기의 역사적 사건들과 함께 성장해왔다. 1918년 혁명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적 격동 속에서 급진화된 지식인들은 자신들을 조직화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1923년 5월 이른바 ‘마르크스주의 작업주간’이라는 행사가 열려 이 자리에 루카치, 칼 코르쉬 등 독일어권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이 결집했다. 이를 계기로 연구소의 설립 행보에 박차가 가해졌다. 유태계 독일인 지식인인 펠릭스 바일은 부유한 상인인 아버지를 설득해 자금을 확보하고, 역사학자 칼 그륀베르크를 초대 소장으로 초빙해 공식적으로 연구소가 문을 열었다.

1923년 5월 루카치, 칼 코르쉬 등 독일어권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이 결집한 ‘마르크스주의 작업주간’ 당시 사진.

1931년에는 막스 호르크하이머가 연구소장으로 취임한다. 그는 에리히 프롬,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테오도어 아도르노 등 젊고 유능한 유대계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을 규합했다. 그러나 1933년 독일에서 나치 정부가 집권하자 연구소는 기나긴 망명생활을 시작한다. 망명 와중인 1937년 호르크하이머의 논문 ‘전통이론과 비판이론’이 연구소가 발간하는 ‘사회연구지’에 게재되면서 이들의 이론은 이른바 ‘비판이론’으로 불리게 되었다. 1968년 전 세계를 뒤흔든 학생시위의 와중에는 연구소와 학생운동 사이에 갈등이 분출했고, 이 갈등의 여파 속에 아도르노의 갑작스런 죽음은 연구소의 한 세대가 막을 내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후 연구소를 실질적으로 이끈 것은 20세기 철학과 사회학의 거장으로 분류되는 하버마스였으며, 2001년에는 악셀 호네트가 연구소장으로 취임해 이른바 3세대로 분류되는 이론가들을 이끌었다. 이번 100주년 학술대회는 호네트의 은퇴 이후 연구소와 비판이론을 이끌고 있는 4세대 이론가들이 중심이 되어 치러졌다.

2021년부터 사회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는 사회학자 슈테판 레세니히 교수의 개막 축사가 말하듯, 이 행사는 우리가 직면한 위기를 어떻게 이론화할 것인가를 규명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전통적으로 비판이론은 ‘위기’에 대한 이론이었다. 초기 비판이론이 나치즘과 파시즘이라는 세계사적 야만을 규명하는 역할을 수행했다면, 100년이 지난 오늘날 전 세계는 불평등과 경제 위기, 인종주의와 혐오의 확산, 우익 포퓰리즘과 권위주의 정치세력의 부상뿐만 아니라 기후 재난이라는 또 다른 파국적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나아가 비판이론은 새롭게 등장한 이론적 흐름들과의 교류와 통섭을 이뤄야 할 과제를 가지고 있다. 탈식민주의, 퀴어 페미니즘, 신유물론 등의 흐름은 전통적인 비판이론의 패러다임에 전환이 필요함을 시사하고 있다.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포스터.

이런 맥락에서 이번 대회에서 눈에 띄는 몇 가지 특징들이 있다. 첫째는 ‘취약성’(vulnerability)과 ‘의존성’(dependency)의 재발견이다. 프랑크푸르트학파 비판이론의 전통은 개인과 주체의 합리성, 자율성, 독립성을 강조하는 서구 근대 계몽적 전통과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독립적인 주체의 자율적 합리성은 개인이 전체주의에 동조하지 않고 비판적 의식을 취할 수 있는 근본 자세라고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번 대회의 첫 키노트 발표자인 철학자 에스텔 페라레즈는 취약성을 보완해야 할 한계로만 고찰하는 전통적인 비판이론을 넘어, 취약성이 주체 형성의 조건이며, 이는 곧 행동, 보호, 돌봄에 대한 요청을 통한 새로운 정치적인 것의 발명으로 이어져야 함을 주장했다. 의존성에 대한 강조 역시 중요한 주제로 등장했다. 철학자 타티아나 라구노 니베스는 인간의 상호행위는 인간의 주체적 의존성을 보여주며, 인간과 자연의 상호관계는 인간의 객관적 의존성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따라서 인간의 자기충족성이라는 가상에서 벗어나, 우리의 의존성을 조직하고 재설정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비판이론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사회학자 카타리나 호페는 자연이 처한 위기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비이성과 타자를 격하시키는 이분법을 넘어서 합리성과 의존성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해야 하며, 이것은 물질을 독립적 개체가 아니라 관계적 존재로 고찰하는 신유물론과 비판이론의 연결가능성을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 100주년 학술대회에서 대담을 하고 있는 마틴 자르, 라헬 예기, 마틴 제이의 모습.

둘째는 비판이론 전통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한 논쟁이다. 대회 첫날에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역사를 담은 ‘변증법적 상상력’의 저자 마틴 제이와, 베를린 훔볼트대학의 철학과 교수인 라헬 예기가 대담을 나눴다. 진행자는 프랑크푸르트대학 철학과 교수인 마틴 자르였다. 흥미롭게도 라헬 예기와 마틴 자르는 모두 악셀 호네트의 뒤를 잇는 비판이론의 4세대 학자들이지만, 예기가 헤겔주의적 바탕 위에 독일 비판이론의 정통을 계승하는 학자라면, 자르는 스피노자와 니체의 전통에서 프랑스의 후기구조주의를 접목한 정치철학을 연구한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 자르는 비판이론의 100년 역사가 동시대 다른 이론들과의 교류를 등한시한 고독의 역사가 아니었는가 질문을 던졌고, 라헬 예기와 마틴 제이는 이에 비판이론의 역사를 옹호하는 답변을 제시했다. 예기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적 사회이론’ 전통을 옹호하면서, 동시대의 다른 이론들은 ‘비판적’이지 않은 사회이론이거나 ‘사회이론’이 아닌 비판적 이론이었다고 주장했다. 또 그녀는 비판이론의 지적 전통을 내재적 비판과 부정주의와 같은 헤겔과 아도르노의 전통에서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마틴 제이는 비판이론은 언제나 폐쇄적이지 않았으며 상이한 흐름들의 짜임 관계 속에서 열려 있는 이론적 연합이었음을 주장했다.

셋째는 대회의 미래지향적 성격이었다. 비판이론을 ‘미래화하기’라는 대회 주제에 부합하듯, 대부분의 발표자들은 젊은 차세대 연구자들로 채워졌고, 프랑크푸르트 연구소의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였음에도 연구소의 과거 역사나 대표 이론가의 이론적 전통을 다룬 발표는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하버마스, 호네트와 같은 연구소의 전통을 상징하는 생존해 있는 학자들이 기조강연을 하거나 인사말을 건네는 흔한 광경도 찾아볼 수 없었다. 대회는 신진 학자들의 교류의 장이었으며, 발표자들은 비판이론의 고전적 이론가들을 종종 인용했지만 대부분 현재의 위기를 개념화하기 위한 주제들을 다루었다.

나는 둘째날 ‘(반)정치적 정서로서 공포를 이해하기: 권위주의적 자본주의의 비판이론을 향하여’라는 주제의 발표를 진행했다. 발표 내용 중에는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조건이 만들어낸 사회의 해체 과정을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 빗대어 설명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청중에서는 이에 관해 ‘드라마의 내용은 신자유주의화된 관계들에 대한 비판이지만, 현실에서는 많은 이들이 케이(K)-드라마의 글로벌한 성공에 대해 열광하며 신자유주의적 관계들이 강화되고 있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이 있었다. 나는 이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말해주는 예리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주체화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마저 콘텐츠로 소비하는 시대를 낳고 있다.

오늘날 비판이론은 정치적, 사회적, 생태적 위기의 한복판에서 이 거대한 위기와 파국과 대결하지 않을 수 없다. ‘현존하는 모든 것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이라는 비판이론의 오랜 모토가 여전히 필요한 이유다. 이번 학술대회는 그러한 비판이론의 ‘미래’가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었다.

프랑크푸르트/글·사진 한상원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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