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고쳐 쓰는 게 당연하죠”…'수리할 권리' 찾는 사람들

이지현 기자 2023. 9. 18.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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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서울 잠수교에 마련된 '뭐든지 수리소'에 박숙현(52) 씨가 망가진 블렌더를 들고 찾아왔다. 〈사진=이지현 기자〉

“서비스센터에서는 고치는 것보다 새 제품을 사는 게 싸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부품값이 새 물건보다 비싸겠어요. 말이 안 되죠. 그래서 고쳐 쓰러 왔어요. 물건이 망가지면 고쳐 쓰는 게 당연하잖아요.”(박숙현 씨·52세)

지난 17일, 박숙현 씨는 망가진 블렌더(믹서기)를 들고 서울 잠수교를 찾았습니다. '뭐든지 수리소'를 찾아온 겁니다. '뭐든지 수리소'는 차 없는 잠수교 축제 한 쪽에 마련된 부스입니다. 망가진 소형 전자제품을 수리하는 곳이죠. 서울환경연합이 주최한 행사입니다.

4년 넘게 쓴 블렌더를 고쳐 쓰는 이유를 묻자 박 씨는 “완전히 작동이 안 되는 건 아니고, 버튼을 누르지 않아도 저절로 작동되기에 고쳐 쓰고 싶었다”면서 “사실 버리고 새것을 사는 게 편하긴 하지만, 조금 고장 난 걸 버리기엔 아까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대로 버리면 플라스틱, 스테인리스가 섞여 있어 재활용도 안 된다”며 “직접 하나하나 분해해서 버려야 하는데, 그러느니 고쳐서 좀 더 쓰는 게 나을 것 같았다”고 했습니다.

블렌더가 망가진 원인은 단순한 접촉 불량. 전문 엔지니어가 블렌더를 분리해 간단한 수리 과정을 거치자 1시간여 만에 정상 제품으로 돌아왔습니다.

박 씨는 “말끔히 고쳐진 걸 보니 속이 시원하다”고 했습니다.

블렌더가 망가진 이유는 단순 접촉불량. 블렌더는 1시간여 만에 정상 작동했다. 〈사진=이지현 기자〉

평소에도 여러 물건을 고쳐 쓰고 있다는 박 씨. 얼마 전에는 코팅이 벗겨진 프라이팬을 사설 수리업체에 가지고 가 고쳤습니다. 프라이팬에 다시 코팅을 입힌 거죠. 망가진 우산도 수리센터에서 고쳐 다시 쓰고 있습니다.

“고쳐 쓰는 건 소비자 권리”…'수리할 권리' 주목받는 이유



박 씨처럼 구매한 제품을 소비자가 직접 수리하거나 사설 업체에 가지고 가 수리해 다시 쓰는 걸 '수리권'이라고 합니다.

제품이 고장 났을 때 업체 자체 서비스센터에서 수리를 독점하는 사례들이 나오면서 생긴 개념이죠.

대표적인 게 스마트폰입니다. 스마트폰이 고장 나면 보통 업체 서비스센터에 수리를 맡기는데, 이때 비싸게는 수십만 원이 넘는 수리비가 나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소비자가 부품을 구해 직접 제품을 고치거나, 더 싼 수리업체를 찾아가 수리할 수 있도록 하는 '수리할 권리'가 최근 국내외를 막론하고 주목받고 있습니다.

이날 잠수교를 찾은 시민들도 모두 '수리할 권리'를 강조했습니다.
지난 17일 서울 잠수교에 마련된 '뭐든지 수리소'에 김규영(42)씨가 들고 온 망가진 선풍기. 〈사진=이지현 기자〉

김규영(42) 씨는 7년 쓴 선풍기 버튼이 잘 눌리지 않아 수리소를 찾아왔습니다. 새 제품을 살까 생각했지만 이대로 버리면 재활용도 어렵고 환경에도 좋지 않을 것 같아 고쳐 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김 씨는 “이런 전자제품은 물론이고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같은 기기들도 망가지면 비싼 돈을 내고 고쳐야 하지 않냐”며 “그럴 때 업체에서는 오히려 새 제품으로 교체하도록 유도하는 경우도 많다”고 했습니다. 그는 “제품을 파는 건 제조업체 마음이지만, 제품이 망가지면 고쳐 쓰는 건 소비자들의 권리”라며 “저렴하고 쉽게 고쳐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6년 동안 사용한 미니 선풍기를 고치러 온 서도은(43) 씨는 “간단하고 작은 제품이라 쉽게 고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면서 “그런데 와서 열어보니 내부 구조가 꽤 복잡하고 쉽게 고칠 수 없게끔 만들었더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서 씨가 가져온 미니 선풍기는 수리가 불가능했습니다.

서 씨는 “물건이 고장 나면 쉽게 고쳐 쓸 수 있어야 하는데, 애초에 고쳐 쓰기 어렵게 만드는 것도 문제인 것 같다”고 했습니다.

지난 17일 서울 잠수교에 마련된 '뭐든지 수리소'에 한 시민이 가지고 온 워크맨. 〈사진=이지현 기자〉

최근 수리할 권리는 소비자권리 차원에서뿐 아니라 환경 측면에서도 주목받고 있습니다.

물건을 대량 생산해 대량으로 소비하고 대량으로 폐기하는 악순환은 온실가스 배출을 늘려 지구 온난화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품수명을 늘려 '덜 만들고 덜 쓰고 덜 버리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자는 겁니다.

유럽환경국(EEB)은 유럽 내 모든 스마트폰 평균 수명을 3년에서 4년으로 1년 늘리면 2030년까지 연 210만톤의 이산화탄소를 저감할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내놓기도 했죠. 100만 대 이상의 자동차가 1년 동안 배출하는 이산화탄소량과 같은 수준입니다.

'수리할 권리' 법안 만드는 미국…프랑스는 '수리가능성 지수' 도입



이미 해외에서는 수리권에 대한 논의가 활발합니다. 물론 나라마다 법이나 규정이 달라 수리권을 보장하는 정도는 다르지만 소비자들이 좀 더 쉽게 제품을 고쳐서 다시 쓸 수 있도록 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지난 2021년에는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소비자의 수리권을 보장하도록 하는 행정명령을 내렸습니다. 미국 여러 주에서도 전자제품이나 농기계 등이 고장났을 때 수리에 필요한 매뉴얼을 소비자에게 제공하고 사설 업체에서 직접 수리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죠.

미국 콜로라도 주지사가 지난 4월 '수리권' 법안에 서명했다. 〈사진=로이터/연합뉴스〉

업체들의 태도도 바뀌고 있습니다. 미국 최대 농기계 업체인 존 디어는 미국농민연맹과 양해각서를 맺고 농민들이 제품을 자가 수리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전까지는 농기계 제어 소프트웨어에 잠금 장치를 걸어놔 본사 허가 없이는 아예 수리가 불가능했습니다.

스마트폰 제조사들도 미국 안에서 소비자들의 수리권을 강화하고 있죠. 수리권에 반대 의견을 보여왔던 애플은 지난해부터 스마트폰 제품 핵심 부품을 판매하고 수리용 도구를 대여하는 서비스를 시작했습니다. 최근엔 캘리포니아의 수리권 법안을 지지한다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삼성전자도 지난해부터 미국에서 수리 부품을 판매하고 수리를 위한 매뉴얼을 제공하기 시작했습니다. 삼성전자는 올해부터 한국과 유럽 등에서도 자가 수리 프로그램을 도입했죠.

유럽연합(EU)은 수리권을 통해 폐기물을 줄이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EU는 지난 2020년 '순환경제실행계획'을 발표했습니다. 그 일환으로 최근에는 휴대폰과 태블릿의 배터리를 도구 없이, 또는 구매 시 함께 제공되는 도구나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도구로 교체가 가능하도록 하는 내용의 법안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프랑스는 2021년부터 전자제품에 '수리가능성 지수'를 도입했죠. 0~10점까지 수리가 얼마나 쉬운지 점수를 매겨 제품에 표시하는 겁니다. 소비자들은 이 지수를 보고 제품을 선택할 수 있는 겁니다.

논의 더딘 한국…국회에도 수리할 권리 법안 발의됐지만 계류


지난 17일 서울 잠수교에 마련된 '뭐든지 수리소'. 〈사진=이지현 기자〉

한국에서의 논의는 아직 더딥니다. 이제 막 수리할 권리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정도죠.

국회에서는 지난해 말 '자원순환기본법'을 전부개정해 '순환경제사회 전환 촉진법'을 만들었습니다. 이 법 20조에는 '제품 생산, 수입업체는 제품의 지속가능한 사용을 위해 제품이 조기에 폐기되지 않고 수리되어 사용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법 시행은 내년 1월 1일부터입니다. 또 수리할 권리를 보장해야 하는 제품군이나 업체가 의무적으로 확보해야 하는 부품의 종류 등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국회에도 수리할 권리를 보장하는 법안이 두 건 발의되어 있습니다. 특히 강은미 정의당 의원은 '수리할 권리에 관한 법률안'이라는 이름의 법안을 발의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2021년 발의된 법안들은 관련 상임위에 계류된 채 아직 제대로 논의조차 이뤄지지 못하고 있죠.

수리할 권리에 대한 제도적 뒷받침이 적다 보니 국내에서는 환경단체 등에서 수리할 권리를 알리고 제품을 수리할 수 있는 행사를 마련하는 정도입니다.

서울환경연합은 이번 '뭐든지 수리소'에 이어 다음 달(10월) 21일 '국제 수리의 날'을 맞아 전자제품과 그 외 물건들을 수리하는 행사를 진행할 계획입니다.

서울환경연합 관계자는 “지금도 물건을 수리하고자 하는 시민들의 문의는 계속되고 있다”면서 “전자제품뿐 아니라 자동우산 등 다양한 제품에 대해 문의가 들어오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올해 10월 한 차례 더 수리소를 연 뒤 내년부터는 정기적으로 수리 행사를 여는 것을 계획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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