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표심 노렸던 대출규제 완화···가계부채 폭등, 집값 반등에 ‘만신창이’

유희곤 기자 2023. 9. 17.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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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당국이 가계대출 폭등에 5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주담대)과 특례보금자리론을 규제하기로 하면서 금융정책이 정치권 요구와 부동산 정책에 동원돼 만신창이가 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지난 정부와 여당에서 청년표심을 잡기 위해 장기 모기지론(주담대)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윤석열 정부는 이를 도입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시장에 ‘빚내서 집사라’는 시그널을 주면서 ‘디레버리징(부채축소)’기회를 놓치고, 가계대출이 5개월째 증가하는 결과를 빚었다. 부동산 시장도 하락 속도 조절이라는 기대와 달리 일부 지역의 가격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금융당국이 부랴부랴 50년 만기 주담대 한도를 낮추고 정책금융상품 공급도 일부 중단했지만 “타이밍을 잘 잡은” 소비자만 혜택을 보게 됐다는 비판이 나온다.

■주택 가격 폭등에 등장한 초장기 모기지

17일 금융권에 따르면 50년 모기지 상품의 필요성이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은 2년6개월 전이다. 한국주택금융공사가 40년 만기 상품을 출시한 2021년 7월보다 4개월 앞선 시점이다.

이낙연 당시 더불어민주당 상임선대위원장은 4·7 재보선을 일주일여 앞둔 2021년 3월31일 부동산 가격 폭등을 사과하면서 “청년과 신혼 세대가 안심대출을 받아 내 집을 장만하고 그 빚을 갚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50년 만기 모기지 대출 국가보증제’를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다음 날 은성수 당시 금융위원장은 “상황이 바뀌면 (50년 만기 주담대를) 연구해 볼 만하다”고 화답했다. 당시는 가계부채가 폭증하던 시기로 2021년 4월에는 전월 대비 25조4000억원이 증가했다.

지난해 5월 윤석열 정부가 출범하고 3개월 뒤 주택금융공사는 50년 만기 주담대 상품을 전격 출시했다. “대출 초기에 상대적으로 소득이 적은 청년층의 월 상환 부담을 완화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명목이었다. 한국은행이 잇따라 금리를 올리며 본격적으로 가계부채 관리에 나서던 것과는 다른 방향이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경제학자는 “집값이 급등하면서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등 대출 규제를 정상적으로 적용하면 젊은층의 ‘내 집 마련’이 어렵다보니 초장기 모기지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면서 “현 정부가 청년층을 잡으려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공무원들이 지난 정부에서 나온 얘기를 캐비닛에서 꺼낸 것”이라고 말했다.

■뒤늦게 규제하며 은행 핑계

금융위원회는 지난 14일 관계부처 합동 ‘가계부채 현황 점검회의’ 열고 은행 등의 5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의 기본 산정 기한을 40년으로 제한하기로 했다. 8월 전 금융권 가계대출이 전월보다 6조2000억원 늘면서 5개월째 증가세를 보이자 내놓은 대책이다.

금융위는 ‘정부가 50년 만기 주담대를 장려했던 게 아니냐’는 지적에 “정책 모기지 상품은 소득이 낮은 청년층의 주거 실수요 애로 해소를 위해 설계됐지만 시중은행 상품은 다주택자도 이용할 수 있고 집단대출이 절반을 넘는 등 DSR 규제를 우회하는 수단으로 사용됐다”며 시중은행에 책임을 돌렸다.

민간 금융사의 50년 만기 주담대는 올 초 한화생명(1월11일)이 처음 출시했다. 농협은행(7월5일)을 시작으로 시중은행도 잇따라 50년 만기 상품을 출시했지만 당시에 금융당국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금융당국은 뒤늦게 “‘차주의 상환능력이 명백히 입증될 때만’ 50년 만기를 적용하라”며 규제에 나섰지만 “이도저도 아닌 규제”이자 “경영권 침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이와 함께 금융당국은 연소득에 상관없이 9억원 이하 주택을 담보로 5억원까지 대출받을 수 있는 특례보금자리론도 공급을 일부 제한하기로 했다. “올해 한시적으로 39조7000억원 공급을 목표로 하고 필요하면 주택저당증권(MBS)을 추가로 발행해 재원을 마련하겠다”는 입장을 바꾸고 연소득 1억원 초과 차주 또는 시세 6억원 초과 9억원 이하 주택을 대상으로 하는 일반형을 오는 26일까지만 판매하기로 했다.

이윤수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는 “정부가 올해 부동산 규제를 잇따라 풀면서 사실상 ‘빚내서 집사라’는 시그널을 줬다가 갑자기 대출 조이기에 나섰다”면서 “미리 준비했다가 ‘타이밍’(적기)을 잘 잡은 사람들만 혜택을 본 셈”이라고 말했다.

■부동산 시장 다시 과열 조짐

금융당국이 대출규제를 완화했던 이면에는 부동산 연착륙이라는 또 다른 정책목표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부동산 가격 급락으로 역전세와 건설사의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 부실 우려가 커지면서 정부는 빠른 속도의 집값 하락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정부가 대출규제를 풀면서 전국의 집값 하락은 멈췄다. 하지만 이제는 강한 반등 조짐이 보이고 있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8월 전국 아파트값은 전월보다 0.23% 오르며 두 달 연속 상승했다. 수도권은 0.26%에서 0.45%로 상승폭이 커졌고, 지역도 0.04% 오르며 지난해 4월(0.03%) 이후 16개월 만에 상승 전환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경제학자는 “집값 하락의 중단이 아니라 가격 급등 이전 수준으로 집값이 일정하게 하락하는 것을 ‘부동산 연착륙’ 정책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은행이 지난 14일 발표한 통화신용정책보고서에서 인용한 국가 비교 통계사이트 ‘넘베오(NUMBEO)’ 자료를 보면 한국의 소득 대비 주택가격배율(PIR)은 올해 26.0배에 달했다. 연간 평균 가계소득을 한 푼도 쓰지 않고 26년 모아야 집을 살 수 있다는 뜻이다. 주요국의 PIR 중위값이 11.9배라는 것을 감안하면 한국의 집값은 여전히 높다.

정화영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통화긴축기에 정책당국은 부동산시장 연착륙에 적극적으로 대응했으나 최근 부동산가격이 상승할 것이라는 기대로 주택담보대출 증가세가 빨라지고 있다”면서 “주택시장 연착륙과 가계부채의 안정적 관리는 상충할 수 있어서 정책 균형을 맞춰야 하고, 가계도 고금리 여건이 장기화할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희곤 기자 hul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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