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의 시선이 동양 여성을 그릴 때 [역사의 뒤 페이지]

조형근 2023. 9. 17.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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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의 시선으로 동양(오리엔트)을 묘사하던 온갖 담론과 지식, 문화적 재현물들이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위압하고 규율하는 하나의 스타일로 변화해갔다.
오페라 <나비부인>을 만든 이탈리아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

메이지유신 성공의 디딤돌을 놓은 사카모토 료마(1836~1867)는 일본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역사 인물 중 한 명이다. 도사번(지금의 고치현)에서 태어나 1853년, 검술을 배우러 에도(지금의 도쿄)로 갔다. 그해 7월8일, 페리 제독이 이끄는 미국 군함 네 척이 나타났다. 해안경비대원으로 차출된 료마는 군함을 직접 본다. 2010년에 방영된 NHK 대하사극 〈료마전〉에서의 묘사가 인상적이다. 거대한 배들이 지나가면서 일으킨 엄청난 물보라가 료마를 덮친다. 쓰러진 료마는 흑선의 위용에 넋을 잃는다. 당대 일본인들에게 서구의 위력이 얼마나 공포스러웠을지 잘 보여주는 연출이다.

그 무서운 배가 어떤 이에게는 환희의 전령선이었다. 이탈리아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1858~1924)의 오페라 〈나비부인〉(1904)에 나오는 배가 그랬다. 나가사키에 기항한 미국 해군 장교 핑커톤이 15세의 게이샤 초초상(蝶蝶さん, 나비부인)과 사랑에 빠져 결혼한다. 가난 탓에 게이샤가 된 그녀에게 핑커톤의 세계는 구원의 빛이다. 그런데 미국으로 간 그가 돌아오지 않는다. 그녀는 아이를 낳아 기르며 기다린다. 돌아올 리 없다며 재혼을 권해도 물리친다. 3년 후, ‘어느 갠 날(Un bel di vedremo)’을 간절하게 부르는 나비부인의 귀에 멀리서 군함의 대포소리가 들려오고, 드디어 핑커톤이 돌아온다. 미국에서 결혼한 ‘진짜’ 부인 케이트를 대동한 채. 나비부인은 케이트에게 아이를 부탁하며 자결한다.

〈나비부인〉은 동양 여성에 대한 서양 남성의 성적 환상이 노골적으로 표현된 작품이다. 오리엔탈리즘 취향의 전형이다. 푸치니는 〈토스카〉 초연을 보기 위해 런던에 머물던 1900년 6월 무렵, 〈나비부인, 일본의 비극〉이라는 연극을 보았다. 미국 해군 장교가 일본에서 게이샤와 결혼하고 자식도 낳지만, 진짜 아내와 결혼하기 위해 고국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였다. 영어가 짧은데도 푸치니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푸치니만 그랬던 게 아니다. “당시 서양 세계는 이 이야기에 미친 듯 열광했다(줄리언 헤일록, 〈푸치니, 그 삶과 음악〉).”

글로리아 오페라단이 공연한 <나비부인>의 한 장면. ⓒ예술의전당 제공

제국의 시대, 오리엔탈리즘의 시대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제국의 시대(1875~1914)라고 부른 시절이었다. 열강들의 팽창 경쟁은 식민주의 초기의 원거리 교역과 자원 약탈을 넘어 대규모 이주와 과잉 자본 수출로 나아가고 있었다. 서구의 시선으로 동양(오리엔트)을 묘사하던 온갖 담론과 지식, 문화적 재현물들이 이제는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위압하고 규율하는 하나의 스타일로 변화해갔다. 팔레스타인 출신 영문학자 에드워드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이름으로 포착한, 서구의 문화적 헤게모니가 극에 달한 시대였다.
〈나비부인〉에서 핑커톤은 노래한다. “양키는 온 세상을 떠도네/ 위험을 무릅쓴 채 돈벌이와 즐거움을 찾아/ ... / 그는 모든 장소, 모든 쾌락을 만끽하지/ 아름다운 소녀를 사랑하면서... 다음 달이면 자유로울 수 있지... 미국이여 영원하라.” 그에게 나비부인은 찰나의 쾌락에 불과했다. 서구 남성의 눈에 비친 동양 여성은 몸 파는 쉬운 여성이었다. 하지만 그녀들은 사랑을 바쳤다. 삶까지 바꿨다. 나비부인이 그랬다. 결혼 후 기모노 대신 서양 옷을 입었고, 조상의 위패를 치우고 예수상과 성조기를 올려놓았다.

〈나비부인〉의 원작은 무엇일까? 푸치니가 본 연극은 미국의 변호사 겸 작가 존 루서 롱의 단편소설 〈나비부인〉(1898)을 극작가 데이비드 벨라스코가 각색한 것이었다. 사실상의 원작은 프랑스 해군 장교인 피에르 로티(1850~1923)의 자전적 소설 〈국화부인〉(1887)이다. 로티는 43년간 해군에 복무하며 가는 곳마다 나눈 현지 여성과의 로맨스를 책으로 펴내 유명해졌다. 1885년, 프랑스 함대가 나가사키에 머물 때 17세의 게이샤 기쿠상(菊さん)과 계약 결혼한 이야기를 토대로 쓴 책이 〈국화부인〉이다. 소설은 대성공했다. 그 영어 번역본에 기대 롱이 〈나비부인〉을 썼다.

프랑스 해군 장교 피에르 로티는 자전적 소설 〈국화부인〉을 썼다.

음악도 오리엔탈리즘의 예외는 아니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제11번(1783) 3악장, 세칭 ‘터키행진곡’이나, 오스만튀르크의 궁정을 소재로 한 오페라 〈후궁으로부터의 도피〉(1782)는 유명하다. 시간이 지나고 시선이 확장되면서 무대는 튀르크에서 인도로 옮겨갔다. 조르주 비제는 오페라 〈진주조개잡이〉(1863)에서 스리랑카인들의 야만적 신앙이 낳은 비극적 사랑을 노래했고, 레오 들리브는 오페라 〈라크메〉(1883)에서 인도 브라만 승려의 딸 라크메와 영국 장교 사이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그렸다. 그녀는 자결한다. 〈라크메〉는 로티가 타히티 여성과 나눈 사랑 이야기 〈로티의 결혼〉(1880)에서 영감을 얻었다. 타히티를 지상낙원으로 묘사한 〈로티의 결혼〉을 읽은 폴 고갱은 타히티로 향했고, 13세 소녀 테하나마와 살면서 이국적인 그림을 그렸다.

튀르크와 인도를 거쳐 오리엔탈리즘의 시선이 닿은 곳이 일본이었다.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로 진입하겠다던 일본이었지만, 막상 서구인의 눈에 일본은 여전히 미개하고 신비한 동양의 소국이었다. 열강들과 조약을 맺던 무렵 일본은 관세자주권을 인정받지 못했고, 외국인은 치외법권을 누렸다. 불평등조약의 개정을 마친 것이 1911년이었으니 반세기가 넘도록 일본은 서구에 대해 외교적 불평등 관계에 놓여 있었다.

나비부인에 이어 등장한 동양 여성 캐릭터가 중국의 직업여성 ‘상하이 릴’이다(〈시사IN〉 제828호, ‘누가 양공주를 멋대로 규정하는가’ 기사 참조). 할리우드 영화 〈상하이특급〉(1932)에서 전설적인 여배우 마를레네 디트리히가 처음 그 역을 연기했다. 로맨틱 코미디 〈풋라이트 퍼레이드〉(1933)에 등장하는 상하이 릴에게 미국 해병대원 켄트가 외친다. “당신은 나비 같아요.” 릴이 화답한다. “오, 제발 저를 큰 기선에 태워줘요. 당신과 함께 바다 건너로 데려다줘요.” 〈나비부인〉이 없었다면 나올 수 없는 가사들이다.

상하이는 화려한 국제도시였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먹잇감을 나눠먹기 위한 열강의 공동기지이기도 했다. 1949년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하자 상하이 릴에 대한 서구의 상상력은 근거지를 잃었다. 대신 발견한 곳이 사이공이다. 뮤지컬 〈미스 사이공〉(1989)은 프랑스 작곡가 클로드 미셸 쇤베르그가 잡지에서 본 사진 한 장에서 출발했다. 사진 속 베트남 여성은 떤선녓 공군기지의 출국 게이트에 아이를 맡긴 후 떠나고 있다. 귀국한 미군 아빠에게 아이를 보낸다는 사연이었다. 아이의 미래를 위한 이 궁극의 희생에 깊은 인상을 받은 그는 작사가 알랭 부브릴과 함께 오페라 〈나비부인〉의 줄거리를 참조하여 뮤지컬을 완성했다. 그리고 대성공을 거뒀다.

2006년 한국에서 초연된 뮤지컬 <미스 사이공>의 헬리콥터 탈출 장면.

남베트남의 패망이 다가오던 무렵이다. 전역 후 미국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재입대해 베트남에 돌아온 해병 크리스가 사이공의 클럽에서 전쟁 중 고아가 된 17세의 바걸 킴을 만난다. 둘은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지만 미군 철수가 닥친다. 크리스는 떠나고 킴은 남는다. 킴은 아이를 낳고 홀로 키우며 힘든 나날을 견딘다. 부모가 정해준 정혼자 투이가 찾아와 결혼을 강요하고 아이를 죽이려 한다. 킴은 크리스의 권총으로 투이를 죽이고 방콕으로 탈출한다. 킴의 소식을 알게 된 크리스가 아내 엘렌과 함께 방콕에 와서 킴을 만난다. 킴은 아이를 부탁하는 말을 남기고 권총 자살한다.

베트남전쟁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배경으로 한 탓일까? 크리스는 핑커톤처럼 가벼운 인물이 아니다. 그의 노래 '왜 신은, 왜(Why God, Why)'는 고뇌로 가득하다. “집으로 돌아갔을 때/ 아무도 전쟁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 사람들이 TV로 아는 전쟁은/ 내가 겪은 것과는 상관이 없었어/ 그래서 돌아왔어.” 그에게 베트남은 끝내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베트남, 너는 대답하지 않겠지/ 끝없는 질문만 던질 뿐/ 베트남, 난 화난 게 아냐/ 하지만 여기 있는 모든 건 왜 무의미할까?”

크리스에게는 해독되지 않는 기호인 베트남이 킴과 동료 바걸들에게는 지긋지긋한 현실이었다. 킴과 지지가 탈출의 꿈을 노래하는 '내 마음 속의 영화(The Movie in My Mind)'를 들어보자. “든든한 해병의 품에 안겨/ 이 삶에서 벗어나리/ 이곳을 떠나리/ 너무나 먼 세상/ 삶이 가혹하지 않은 곳/ 내 마음 속의 영화라네.”

반면 동양 남성인 킴의 정혼자 투이는 공산주의에 투철하고 외국인을 증오하는 단선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아이를 죽이려 들 만큼 잔인하다. 이 도저한 증오가 어디서 왔는지는 질문되지 않는다. 크리스는 베트남에서 어떤 대답도 듣지 못했다지만, 처음부터 들을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닐까?

베트남전쟁은 20세기의 가장 부도덕한 전쟁 중 하나였다. 프랑스의 식민지 인도차이나에 2차 세계대전 시기에 일본이 진주한다. 베트남인에게 가혹하던 프랑스군은 전투도 없이 일본군의 온순한 포로가 됐다. 일본 패망 후 다시 통치하겠다며 나서자 일본군과 싸운 호찌민(1890~1969) 등 독립운동 세력과 베트남인들이 맞섰다. 급기야 남북이 분단되고 전쟁이 터졌다. 1954년, 호찌민의 북베트남이 승리했다. 관련국들이 모여 2년 내 자유총선거 실시에 합의하지만, 미국과 남베트남 정부는 거부한다. 선거로는 질 게 뻔했다. 프랑스를 대신한 미국은 응오딘지엠 독재정권을 지원하며 분단을 고착화했다. 정권은 부패했고, 나라를 지킬 마음이 없었다. 이 작은 전쟁에 미국은 2차 세계대전 때만큼 전비를 썼다. 그리고 졌다.

1966년 남베트남 구치 북동쪽에서 미국 육군 헬기가 대원들을 작전 지역으로 공수하고 있다.

전쟁을 기억하는 방법

왜 졌을까? 결국 남베트남인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베트남 인구의 80%가 농민이었다. 대지주가 토지를 장악하고, 고율의 소작료로 농민을 착취했다. 농지개혁 요구에 저항하던 지엠 정권은 1956년, 불평등이 극심한 메콩강 삼각주 지역에서 마지못해 농지개혁을 시도했다. 농촌 인구의 0.025%에 불과한 대지주 2500명이 쌀 생산 농지의 40%를 소유한 지역이었다. 농지 소유 상한선을 100헥타르(약 30만2500평)로 잡았다. 남한, 일본, 타이완 농지개혁에서의 상한선인 3정보(약 9000평)의 33배가 넘었다. 개혁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극소수 대지주의 이익만 결사 보위하는 정부를 위해 결사 투쟁할 사람은 없었다.

베트남전쟁은 미국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 상처를 봉합하는 데 문화적 재현의 역할이 컸다. 〈지옥의 묵시록〉(1979)처럼 ‘비판적인’ 영화와 소설들이 상처받은 병사들의 영혼을 위로했다. 전쟁의 제국주의적 성격에 대한 성찰은 거의 없었다. “미국 대중들 사이에 미군 병사에 대한 연민이 높아지면서... 애국심의 부활을 도왔다. 1980년대 이후 미국이 점점 호전적으로 변한 근원에는 이런 애국심이 도사리고 있다.” 베트남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란 보트피플 출신 작가 비엣 타인 응우옌의 비판이다(〈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베트남과 전쟁의 기억〉). 2012년 3월29일, 오바마는 이렇게 전쟁을 미화했다. “베트남전쟁은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과 피부색 그리고 종교적 신념을 지닌 채, 매우 힘겨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함께 의무를 다했던 이들의 이야기다. 온 나라 구석구석에서 사랑하는 조국에 봉사하기 위해 따뜻한 가족의 품을 떠나야 했던 미국인들의 이야기다.”

워싱턴 DC의 베트남 참전용사 추모비 ‘검은 벽’에는 전몰자 5만8000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베트남전쟁에 종군한 영국 사진작가 필립 존스 그리피스는 통계수치를 계산해본다. “미국 전몰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워싱턴 DC의 추모비는 약 137m다. 같은 간격으로 베트남 전몰자들의 이름을 새겨 넣은 추모비를 만든다면 아마 15㎞에 이를 것이다.” 베트남 사람 300만명이 그 전쟁에서 죽었다. 〈미스 사이공〉도, 〈지옥의 묵시록〉도, 오바마도 침묵하는 사실이다.

1964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군 32만5000명이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 5000여 명이 전사하고, 1만2000여 명이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통받았다. 미국 다음으로 전쟁에 깊이 개입한 나라가 한국이다. 왜 침략전쟁에 연루되어야 했는지 아직도 묻기 어렵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에서 베트남전쟁 참전 군인에게 경의를 표하자 베트남 외교부가 항의했다. 자국 전몰자를 추념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며 한국 여론이 들끓었다.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비판하는 한국에 대응하는 일본의 논리와 같다. 전쟁의 성격은 외면한 채로. 인터넷 여론은 한 술 더 떴다. “키워줬더니 베트남 따위가 건방지다”라는 식의 댓글이 난무했다. 진보적이라는 커뮤니티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타자에게 입힌 상처를 기억할 때만, 우리가 입은 상처도 보듬을 수 있다. 그 균형을 잡기 전까지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조형근 (동네 사회학자)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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