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소기호 53번’ 자줏빛 방역의 추억 [주기율표 위 건강과 사회]

김명희 2023. 9. 16.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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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놀라운 행동력을 발휘했다. 보건소 화장실 세면대에 베타딘이 가득 담긴 세숫대야를 놓아둔 것이다. 베타딘이 무엇이냐. 온 국민이 알고 있는 바로 그 소독약, ‘빨간약’이다.
원소기호 53번인 아이오딘은 1811년 처음 발견되었다. 살균작용 외에도 우리 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시사IN 이명익

홀로코스트 생존 유대인, 화학자, 작가. 프리모 레비의 정체성은 여럿이다. 오래전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그의 책 〈주기율표〉를 읽었을 때, 세상에 뭐 이렇게 밍밍한 글이 다 있나 고개를 갸우뚱했다. 한참 시간이 흘러 〈이것이 인간인가〉 〈휴전〉 〈지금이 아니면 언제〉 〈고통에 반대하며〉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같은 작품들을 읽고 난 뒤 이 책을 다시 펼쳤을 때, 나는 아무도 시키지 않은 반성문을 썼다. 이토록 꾹꾹 눌러쓴 ‘생(生)의 이야기’를 내가 미처 몰라봤구나. 그러고는 내가 마주했던 (때로는 유쾌하고, 때로는 분노를 자아내던) 한국 사회의 어떤 장면들도 이렇게 세상에 ‘초연한’ 원소의 속성과 엮어 곱씹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 달에 한 번꼴로 이어갈 글들은, 적절한 표현일지는 모르겠으나 오랫동안 흠모해오던 작가 프리모 레비에게 바치는 내 방식의 오마주라고 할 수 있다.

프리모 레비가 쓴 책 <주기율표>.

휴대전화가 아직 귀했던 세기말의 여름. 힘들게 휴가 일정을 맞춰 후배들과 지리산 종주길에 올랐다.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곡소리를 내가면서 엉금엉금 오르내리기를 3일. 마침내 천왕봉 정상에 도달한 순간, 후배 하나가 가방에서 벽돌 크기의 휴대전화를 꺼냈다. 엄마한테 빌려온 것이라고 했다. 텔레비전 광고에서 본 것처럼, 과연 지리산 정상에서도 신호가 잡혔다. 우리는 신문물에 감탄했다. 그리고 주변 등산객들의 부러운 시선을 즐기며 자랑질 전화를 이어갔다. “엄마, 잘 들려? 나 여기 지리산 꼭대기야.”

하지만 각자 한 바퀴를 돌고 나니 더 이상 전화를 걸 곳이 없었다. 본격 자랑을 늘어놓아야 하는 건 친구들인데, 당시 휴대전화를 가진 사람은 많지 않았고, 그 시간 친구들은 모두 직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집 전화번호면 모를까, 친구 회사 번호까지 외우고 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지리산을 종주한 내가 대견해서 미칠 지경이었고, 그래서 차마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고 말았다. 나의 일터, 즉 전공의로 일하고 있던 예방의학교실에 전화를 건 것이다.

휴가 자랑하려고 회사에 전화 건 1년 차 직장인, 그게 나였다. 어쩐 일인지 동료 연구원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전화를 받았다. “아니, 왜 그렇게 삐삐를 안 받아?” “나 지리산 정상인데?” “지금 A군에 세균성 이질 크게 터졌대. 교수님이 역학조사하러 먼저 출발한다고, 쌤 빨리 찾아서 A군으로 내려오래.” “···지금?” 나는 순식간에 지리산 자락에서 가장 슬픈 사람이 되었다.

1995년 개봉한 <아웃브레이크>의 한 장면. 구역 봉쇄 및 몰살을 택하는 잔혹한 정부의 모습을 그렸다. ⓒ영화 <아웃브레이크> 갈무리

우여곡절 끝에 A군 보건소에 도착했다. 예전에 보았던 영화 〈아웃브레이크〉를 떠올리며 잔뜩 긴장한 채 대책본부 사무실로 올라갔다. 현장은 내가 생각했던 모습과 많이 달랐다. 영화에서 미국 국방성과 질병통제예방센터(CDC) 소속 주인공들은 우주복같이 생긴 방호복을 입고 치명적 병원체의 경로를 추적했다. 하지만 햇볕이 잘 드는 보건소 한 층에 마련된 대책본부에 들어서니, 퇴임이 얼마 남지 않은 보건소장님이 파리채를 들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병원균을 옮기는 매개체’ 파리를 열심히 잡고 계셨다. 입력을 기다리며 수북이 쌓여 있는 역학조사서와 어지러운 전화선, 분주하게 ‘사무’를 처리하는 보건소 직원들의 모습에서 영화 속 긴박함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사실 세균성 이질(shigellosis) 같은 수인성 감염병은 코로나19 같은 호흡기 감염병보다 예방과 관리가 쉬운 편이다. 대개 감염자의 오염된 분변을 통해 손-구강 경로로 전파되기에, 손을 잘 씻고 물과 음식을 잘 익혀 먹기만 한다면 예방할 수 있다. 세균이기 때문에 항생제 치료도 수월하다. 그런데도 지역사회에 상당히 많은 의심 환자들이 발생하고 있었다. 처음에 어떻게 유행이 시작되었는지는 불분명했지만, 이미 특정한 오염원 때문이라기보다 개인 간 전파에 의한 지역사회 만연 단계를 의심케 하는 상황이었다.

2005년 10월 서울 한 초등학교 학생들이 집단 세균성 이질 증상을 보여 휴교 조치가 권고되었다. ⓒ연합뉴스

포비돈 아이오딘에 손을 담그며

그런 면에서 보건소는 그 지역에서 가장 위험한 공간이라 할 수 있었다. 의심 증상이나 감염원 접촉력이 있는 주민들은 모두 보건소에 와서 검사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 검사는 코로나19처럼 콧구멍을 찌르는 것이 아니라 분변을 소량 채취하거나 면봉으로 직장 스왑(rectal swab)을 한다. 제대로 처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세균이 묻은 손을 통해 변기나 화장실 문고리, 수도 밸브, 다른 손잡이 등도 오염될 수 있었다. 손 위생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하지만 요즈음 약국에서 쉽게 살 수 있는 알코올 성분의 펌프식 손 소독제품은 당시에 구경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병원의 수술 준비실처럼 비누와 소독액이 분사되는 장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 놀라운 행동력을 발휘했다. 보건소 화장실 세면대에 베타딘이 가득 담긴 세숫대야를 놓아둔 것이다. 베타딘이 무엇이냐. 온 국민이 알고 있는 바로 그 소독약, ‘빨간약’이다. 베타딘 혹은 포비돈이라는 상품명으로 유명한 이 의약품의 성분명은 포비돈 아이오딘(povidone iodine)으로, 살균작용을 하는 아이오딘과 운반 역할을 하는 포비돈 중합체가 결합한 화학물이다. 용액 상태에서 서서히 분리된 아이오딘이 세포질과 세포막 구성 물질을 산화시키고 지질을 아이오딘화함으로써 세포를 사멸시킨다고 알려져 있다.

주기율표상 원소기호 53번 아이오딘(요오드, I)은 1811년 처음 발견되었고, 태웠을 때 특징적인 자주색 연기가 발생하기에 ‘자주색’을 뜻하는 그리스어(μοβ, iodes)에서 그 이름을 가져왔다고 한다. 아이오딘에 살균작용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아이오딘은 우리 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갑상선 호르몬을 구성하는 원소로, 아이오딘 섭취가 부족할 때와 과잉일 때 모두 건강 문제가 생긴다.

포비돈 아이오딘은 1950년대에 제품으로 개발되어 수술 전후 피부 소독이나 의료진의 손 세척은 물론이고, 의료기관뿐 아니라 가정에서 크고 작은 상처를 소독하는 데 광범위하게 쓰여왔다. 바이러스와 세균, 원충류, 심지어 항생제 내성균에도 좋은 살균효과를 보인다. 세계보건기구(WHO) 필수의약품 목록에도 등재되어 있다. 포비돈 아이오딘으로 소독한 후에는 물로 다시 헹구거나 천으로 닦아내선 안 된다. 그래서 소독 부위 피부에 독특한 주홍빛 흔적이 남는다.

그해 여름 보건소, 나는 화장실에 다녀올 때마다 베타딘 세숫대야에 손을 담그면서, ‘그래 누군가 여기에 이질균을 듬뿍 쏟아내고 갔어도 그놈들이 버티긴 어려울 거야’라며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손 전체에 봉숭아 물을 들이기라도 한 것처럼 주홍빛 손으로 주민을 만나 역학조사서를 작성하고, 주홍빛 손으로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며 자료 분석을 했다. 주홍빛 손으로 보건소 전화선을 연결하여 심지어 ‘넷스케이프’ 웹브라우저로 미국 CDC 사이트에 접속해 관련 자료를 다운로드받는 ‘신세대’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길어야 사나흘이면 집에 돌아올 줄 알았지만, 점진적 전파에 의해 일어나는 유행은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와이셔츠에 항상 베타딘 ‘국물’을 흘려서 보건소 직원들의 안타까움을 자아내던 나의 지도교수가 다른 일 때문에 서울로 돌아간 다음에도 나는 한참을 더 그곳에 머물렀다. 주홍빛 손을 분주히 움직이면서 말이다.

예방의학 전공의를 막 시작했을 때만 해도 나는 감염병이 ‘지나간 시대의 문제’라거나 저개발국가에서나 중요한 이슈라는, 지금 돌이켜보면 아주 경솔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볼거리·홍역·풍진·세균성 이질·말라리아 같은 감염병 유행이 잇따르고, 그게 차곡차곡 내 일거리로 쌓여가면서 이게 다 뭔 일인가 싶었다.

‘잔칫집 식중독’과 ‘글로벌 아웃브레이크’

당시 한국 사회는 신종(emerging) 혹은 재출현(re-emerging) 감염병 유행이라는 ‘세계적 트렌드’에 발을 맞추던 참이었다. 1980년대 들어 HIV/AIDS라는 신종 감염병이 전 세계를 휩쓸기 시작했고, 니파 바이러스, 웨스트나일 바이러스 같은 새로운 병원체들이 속속 발견되었다. 1995년에 개봉한 영화 〈아웃브레이크〉도 이러한 시대상을 반영한 것으로, 아프리카 자이르에서 발생한 에볼라 바이러스 유행을 모티브로 삼았다. 그뿐만 아니라 1990년대 뉴욕 한복판에서 결핵이 창궐하고, 소비에트 연방 해체와 함께 러시아에서 디프테리아가 유행하여 어린이들이 목숨을 잃는 등 옛 시대의 감염병들도 재출현해 맹위를 떨쳤다. 이러한 흐름에 대응하기 위해, 국내에서도 1999년 국립보건원 안에 ‘전염병관리부’가 신설되었고, 2004년에는 국립보건원이 ‘질병관리본부’로 확대 개편되었다.

2004년 1월19일, 국립보건원에서 확대 개편된 질병관리본부의 현판식 모습. ⓒ연합뉴스

감염병을 진단하고 예방·치료하는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지만, 교통수단의 발달과 이동 증가, 인간에 의한 생태계 변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체계는 이전과 다른 규모와 방식으로 감염병 위협을 증폭시킨다. 옛날 역학 교과서에 등장하던 ‘마을 잔칫집에 다녀온 주민들이 집단으로 복통을 호소…’ 같은 소박한 사건과는 ‘급’이 다른 감염병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를테면 2018년 가을 미국의 한 농장에서 재배한 로메인 상추가 병원성 대장균(E.coli O157:H7)에 오염되었을 때 환자는 무려 17개 주에서 발생했다. 이 제품은 미국 전역과 캐나다·멕시코까지 공급되었기에, 사상 최대 규모의 리콜 조치가 이어졌다. 〈포이즌: 음식에 감춰진 더러운 진실〉이라는 넷플릭스 다큐멘터리에 등장한 이 농장의 로메인 상추 재배지는 눈길이 닿는 곳 모두,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져 있었다. 국내에서도 2006년 한 급식업체가 제공한 반찬이 노로바이러스에 오염되는 일이 벌어졌는데, 당시 이 업체가 담당하던 32개 학교의 학생 3000여 명이 식중독에 걸렸다.

‘지리산 자랑꾼’을 절망시켰던 지역사회 세균성 이질 유행은, 말하자면 ‘잔칫집 식중독’과 ‘글로벌 아웃브레이크’ 사이에 일어난 전환기적 사건이라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이런 시대적 흐름을 읽지 못한 채, 나는 그저 베타딘에 의지하며 대책본부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나갔다. 예방의학 전공의 1년 차의 영혼이 자주색 연기로 타올라 흩어지는 듯했다.

김명희 (노동건강연대 운영위원장·예방의학 전문의)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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