볶은 요리에 고소함 배가…땅콩, 믹서로 갈면 바로 버터 [ESC]

한겨레 2023. 9. 16.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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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 홍신애의 이달의 식재료]홍신애의 이달의 식재료
중국서 유래…‘대보름 부럼’ 대중화
속껍질에 식이섬유…먹는 게 좋아
주성분 기름, 산패 쉬워 냉동보관
게티이미지뱅크

“오다 주웠다!”

친구가 까만 비닐봉지를 툭 하고 건넨다. 약속 시각이 좀 지나서 도착한 게 미안했는지 오다가 주웠다던 그 봉지 안에는 내가 좋아하는 땅콩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그거 우도땅콩이야! 니가 제일 좋아하는….” 자신 있게 얘기하는 그 말투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게 얼마치야? 우도땅콩이 이 정도면 엄청 비쌀 텐데….” 내 반응에 흠칫 놀란 친구가 대답했다. “5천원 줬는데….” 친구가 사온 건 우도땅콩이 아니었다. 양꼬치집이나 중국 음식점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작은 중국땅콩. 이걸 우도땅콩인 줄 알고 사오다니. 그래도 늦은 건 충분히 용서될 만큼의 정성이다. 우도땅콩이 아니면 어때? 땅콩은 다 좋은걸!

땅콩은 땅에서 나는 콩이란 뜻이고 외래종이다. 처음 땅콩을 호콩이라 불렀는데 여기서 ‘호’는 오랑캐라는 뜻이다. 한자로 ‘낙화생’이라 기록된 땅콩은 실제로 꽃이 떨어지면서 줄기가 땅속을 파고들어 씨방이 형성되어야 비로소 먹을 수 있는 기르기 까다로운 작물이라 전해졌다. 일찌감치 추사 김정희가 ’완당집’에서 중국에서 들여온 낙화생이란 작물에 대해 쓴 기록이 있다. 20세기 들어와 대보름 부럼에 관한 변화가 글에 엿보이는데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을 보면 원래 부럼으로 많이 쓰던 호두, 밤, 은행, 잣, 무 등에서 땅콩인 낙화생이 추가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조선상식문답이 1930년대에 나왔으니 우리나라에 땅콩이 퍼진 것도 이즈음의 일이 아닌가 싶다.

요즘 아이들은 아마 생땅콩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땅콩을 수확하고 흙을 털어 말린 뒤 허연 껍질, 즉 콩깍지를 까면 땅콩 알맹이가 나온다. 원래부터 빨간색은 아니다. 회색에 가까운 붉은색. 그리고 강낭콩 같은 느낌의 촉촉하고 보드라운 촉감. 이게 생땅콩이다. 껍질을 까지 않고 볶은 땅콩은 속에서 열과 수증기로 쪄지면서 볶아진다. 열을 충분히 가한 뒤 수분을 날려주고 껍질을 바사삭 깨트리면 나오는 붉은 알맹이. 이것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땅콩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는 땅콩은 다 볶은 땅콩이다.

볶은 땅콩은 실온 보관이 불가능하다. 땅콩의 주요 성분은 지방산, 즉 기름이다. 특성상 빠르게 산패하기 때문에 땅콩의 올바른 보관방법은 냉동이다.(냉장보관을 하면 자칫 비싼 냉장고 탈취제가 되기도 하므로 주의하자.) 가끔 호프집 같은 데서 내준 땅콩에서 쇠냄새 같은 이상한 향이 나기도 하는데 이건 이미 산패된 땅콩이니 공짜라고 마구 먹지 말자.

땅콩은 기름에 볶은 요리와 모두 잘 어울린다. 중국요리도 그렇고 양념치킨에 솔솔 뿌려진 땅콩만 봐도 바로 정답이 나온다. 멸치볶음이나 오징어볶음 같은 반찬에도 통깨처럼 땅콩을 부숴 뿌리면 고소함이 배가된다. 땅콩 자체를 볶을 때 마라 양념이나 미숫가루 양념을 해서 볶으면 그 자체로 이미 훌륭한 요리 같은 안주로 변신한다. 땅콩의 붉은 속껍질은 식이섬유가 풍부해 같이 먹는 게 좋은데 이렇게 땅콩에 양념하면 한결 맛있게 몽땅 먹을 수 있다.

땅콩 속껍질을 제거하고 믹서기에 돌리면 바로 땅콩버터가 된다. 여기에 설탕과 코코넛밀크를 약간 더해 잘 섞거나 녹인 초콜릿을 더해 버터처럼 빵에 발라먹으면 극강의 고소함을 느낄 수 있다. 땅콩버터는 만들기 쉬운 대신 빨리 먹어야 한다. 신선한 땅콩의 기름 성분을 휘저어놓은 거라 하루이틀 만에 상할 수 있다. 시중에 판매되는 상온 유통 가능한 땅콩버터 제품들은 이런 땅콩 지방의 연약함을 보완하기 위해 당을 조절하거나 첨가물 등을 가미한 것이라 보면 된다.

제주 우도에 가면 알맹이가 작고 고소하면서 달고 산미까지 느껴지는 우도 땅콩을 만날 수 있다. 섬 속의 섬, 척박한 우도 땅에 나지막이 자라고 있는 땅콩의 수확 철이 다가온다. 100g에 1만원씩 하는 사악한 가격이지만 그 맛은 다른 땅콩과 도저히 비교 불가다. 그러니 친구야, 한 봉지 두둑이 사고 5천원이라고 좋아하지 말고, 가격과 타협하는 대신 질 좋은 제철 우도땅콩을 좀 기대해도 될까? 난 한 주먹이면 충분하다고.

요리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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