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BA 신인상, 배우 출신부터 복역수까지’ 코리안드림 꿈꿨던 특급 외국선수들

최창환 2023. 9. 16.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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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최창환 기자] ‘역대 최악의 1순위’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이름이지만, 앤서니 베넷은 NBA에서 아무나 누릴 수 없는 영예를 안았던 선수다. 무려 NBA 드래프트 1순위 출신이다. KBL에서의 적응력은 지켜봐야겠지만, 베넷과 계약한 신생팀 고양 소노는 화제성만큼은 톡톡히 누릴 수 있었다.

베넷 이전에도 화려한(혹은 독특한) 선수 경력, 잠재력을 지녀 큰 기대 속에 한국을 찾은 외국선수는 많았다. 이 가운데에는 KBL 역사에 길이 남는 업적을 남긴 이들도 있었지만, 불명예 속에 한국을 떠난 이들도 적지 않았다.

※본 기사는 농구전문 매거진 점프볼 9월호에 게재됐습니다.

로터리픽 출신, 기대는 컸지만…

베넷 이전에 KBL을 찾은 NBA 드래프티 출신 중 가장 높은 지명 순위를 자랑한 이는 에메카 오카포였다. 2004 NBA 드래프트에서 전체 2순위로 샬럿 밥캣츠에 지명됐다. 하승진이 전체 46순위로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에 지명돼 한국인 최초 NBA리거의 역사가 만들어진 드래프트였다.

오카포는 드와이트 하워드에게 1순위의 영광을 넘겨줬지만, 신인상을 수상하는 등 신인 가운데 가장 화려한 데뷔시즌을 치렀다. 공격력은 기복이 있었지만, 빅맨뿐만 아니라 스윙맨들의 움직임까지 견제하는 등 탄탄한 수비력을 바탕으로 NBA에서 통산 616경기를 소화했다.

부상 여파로 2018년을 끝으로 NBA 무대를 떠난 오카포는 울산 현대모비스와 인연이 닿았다. 2019년 속초에서 자체 연습경기를 소화 중이었던 현대모비스는 훈련 효과를 높이기 위해 상대 팀 외국선수 역할을 맡아줄 선수로 오카포를 불러들였다. 일종의 ‘대역’이었지만, 현대모비스는 연습경기를 통해 오카포가 지닌 수비력도 동시에 테스트할 수 있었다.

결국 현대모비스는 2019-2020시즌 개막 후 기대에 못 미친 자코리 윌리엄스를 퇴출했고, 그 자리를 오카포로 채웠다. 은퇴를 앞둔 나이였지만, 오카포의 수비력은 KBL에서도 충분히 위협적인 수준이었다. 18경기 평균 20분 55초를 소화하며 12.3점 8.4리바운드 1.4스틸 1.6블록슛을 기록했고, 한국 문화에 대한 적응력도 뛰어났다.

“식사를 국내선수들과 같이 할 정도였다. 김치찌개도 잘 먹고, 아침을 3번 먹을 때도 있었다”라는 게 유재학 당시 현대모비스 감독의 회고다. 비록 무릎부상을 당해 시즌 도중 한국을 떠났지만, 이후 타 팀의 대체외국선수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는 등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 외국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오카포가 NBA 지명 순위에 걸맞은 활약상을 펼쳤지만, 이외의 선수들은 대부분 기대를 밑돌았다. 2021-2022시즌에 서울 삼성 유니폼을 입었던 토마스 로빈슨의 얘기다. 로빈슨은 2012 드래프트 5순위로 새크라멘토 킹스에 지명된 빅맨이다.

NBA 스타 데미안 릴라드(6순위), ‘설교수’ 제러드 설린저(21순위)보다 높은 지명순위로 화제를 모았으나 로빈슨의 경기력은 기대에 못 미쳤다. 출전시간 대비 득점, 리바운드 등 기록은 준수했으나 독단적인 스타일인데다 국내선수들과 어울리지 못해 15경기 만에 퇴출됐다. 삼성은 발등부상에서 회복된 힉스를 재영입하며 잔여시즌을 마쳤다.

이밖에 쉐런 라이트, 사마키 워커도 NBA 드래프트에서 10순위 내에 지명된 경험이 있는 외국선수들이지만 KBL에서의 결말은 유쾌하지 않았다. 1994 드래프트에서 6순위로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에 지명됐던 라이트는 1997년 비운의 교통사고로 왼쪽 어깨와 손을 크게 다치며 NBA 선수로서 경쟁력을 잃었다.

1999년 은퇴 후 재기를 선언, 유럽리그에서 경쟁력을 보여준 후 KCC와 계약했으나 2005-2006시즌을 완주하진 못했다. KCC는 35경기 만에 라이트를 아써 롱으로 교체했다.

앞서 언급한 워커 역시 1996 드래프트에서 9순위로 댈러스 매버릭스에 지명됐고, LA 레이커스와 샌안토니오 스퍼스에서 파이널 우승을 경험하는 등 국내 NBA 팬들에게 익숙한 벤치멤버였다. 2009 외국선수 드래프트에서 실질적 3순위로 서울 SK에 지명됐지만, 워커 역시 35경기 만에 한국을 떠났다.

오카포만 부상에 의한 퇴출이었을 뿐, NBA에서 로터리픽으로 지명된 경험이 있었던 외국선수들 모두 결과적으로 ‘코리안드림’을 이루는 데에는 실패한 셈이다.

‘설교수’ 이전에 ‘핏마교주’가 있었다
​NBA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거나 높은 순위로 지명되어야만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건 아니다. 스페인리그 등 유럽에서 손꼽히는 리그에서 경쟁력을 보여준다면, 얼마든지 높은 연봉과 함께 대우를 받으며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다.

KBL에서 활약한 외국선수 가운데에는 피트 마이클이 대표적인 케이스다. 마이클은 2000년 뉴욕 닉스에 입단한 후 하부리그를 전전했지만, “3번을 맡기엔 키(199cm)가 작다”라는 평가는 NBA에서나 해당하는 얘기였다. 마이클은 필리핀리그를 거쳐 스페인리그에서 운동능력과 1대1, 3점슛 등 다양한 항목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유럽리그 최고의 스코어러로 성장했다. 마이클은 2006-2007시즌 대구 오리온스와 거액에 계약, KBL에 데뷔했다.

스페인리그 득점왕 출신으로 같은 시기 SK에서 KBL에 데뷔한 루 로가 시즌 전까지만 해도 더욱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KBL을 지배한 자는 마이클이었다. 마이클은 ‘붙으면 파고 떨어지면 던지는’ 스코어러의 정석을 보여주며 52경기 평균 36분 56초 동안 35.1점 11리바운드 2.6어시스트 1.3스틸로 활약했다. 산술적으로 1분당 1점을 기록한 셈이었으며, 오죽하면 별명도 ‘핏마교주’였다.

마이클은 이와 같은 활약을 바탕으로 마르커스 힉스 이후 오리온스가 배출한 첫 외국선수 MVP가 됐다. 35.1점은 여전히 깨지지 않고 있는 시즌 평균 최다득점으로 남아있다. 또한 마이클은 한 시즌만 뛰고도 점프볼이 2022년 KBL 출범 25주년을 맞아 선정한 위대한 25인에 이름을 올렸다. 한 시즌 만에 한국을 떠난 마이클은 이후 스페인리그 명문 FC 바르셀로나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데이본 제퍼슨 역시 유럽에서 이름 좀 날렸던 외국선수다. 2011-2012시즌에는 러시아리그 뤼베르치 트라이엄프 소속으로 득점왕, MVP를 싹쓸이했다. 유럽리그 최정상급 선수로 꼽혔던 제퍼슨은 이후 러시아리그에서 임금 체불 등 구단과 갈등을 겪은 끝에 KBL로 눈길을 돌렸고, 2013 외국선수 드래프트에 참가했다.

관계자들 사이에서 “진짜 트라이아웃에 오긴 하는 건가?”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참가 여부만으로도 관심을 모았던 제퍼슨은 예정대로 트라이아웃을 소화했고, 2순위로 창원 LG에 지명됐다.

LG는 제퍼슨을 비롯해 국내-외국선수에 걸쳐 탄탄한 전력을 갖춰 2013-2014시즌에 창단 첫 정규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제퍼슨은 비록 KBL 2년 차 시즌에 불미스러운 일로 퇴출됐지만, 여전히 유럽리그 출신 특급 외국선수 계보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선수로 언급되고 있다.

프로리그 경력은 없지만, 잠재력을 높이 평가 받았던 선수도 있다. 인천 전자랜드(현 대구 한국가스공사) 팬들 사이에선 금지어일 수도 있는 디온테 버튼은 KBL이 커리어 첫 프로리그였다. 아이오와 주립대 재학 시절 내외곽을 오가는 화력을 발휘한 버튼은 2017 NBA 드래프트에서 기대되는 100인에 이름을 올릴 정도의 유망주였다.

드래프트에서 낙방한 버튼은 서머리그에서의 경기력이 기대치를 밑돌았지만, KBL 트라이아웃에서는 탄력을 뽐내며 유력한 1순위 후보로 꼽혔다. 하지만 1순위 지명권을 갖고 있었던 전자랜드는 국내선수와의 조화를 이유로 조쉬 셀비를 선발했고, DB가 2순위로 버튼을 지명하는 행운을 누렸다.

이후의 스토리는 독자들이 알고 있는 그대로다. 하위권 후보로 꼽혔던 DB는 버튼과 두경민이 각각 외국선수, 국내선수 MVP로 선정되며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버튼은 이후 NBA 재도전을 위해 DB의 재계약 제의를 거절했고, 다시 서머리그를 거친 끝에 꿈을 이뤘다. 반면, 전자랜드는 버튼을 거르고 지명한 셀비를 36경기 만에 퇴출했고, 6강 진출에 만족해야 했다.

투잡 가능했던 ‘재능러들’
이색 경력으로 주목을 받았던 선수들도 있다. 1998 외국선수 드래프트에서 4순위로 수원 삼성에 지명된 버넬 싱글턴은 NBA 스타 샤킬 오닐의 루이지애나 주립대 선배이자 절친이었다. 대학 시절 내내 오닐과 함께 주전으로 활약했던 싱글턴은 잘생긴 외모를 지녀 영화 배우로 활동한 경력으로도 눈길을 끌었다. 우피 골드버그가 주연을 맡은 헐리웃 영화 ‘에디’에 농구선수 자말 던컨 역으로 출연한 스포테이너였다.

실력 또한 출중했다. 슈팅능력은 기복을 보였지만, 골밑장악력만큼은 뛰어난 모습을 보이며 삼성의 KBL 출범 후 첫 플레이오프 진출을 이끌었다. 삼성이 재계약한 최초의 외국선수였던 싱글턴은 KBL에서 2시즌을 치르는 동안 평균 21.9점 10.7리바운드 2.2어시스트 1.3스틸 1.2블록슛을 남겼다.

찰스 민렌드 역시 ‘투잡’하면 빼놓을 수 없는 외국선수다. 세이트존스대에서 약학을 전공, 약사 먼허를 가진 선수로 화제를 모았다. 실제 민렌드는 NBA 드래프트에서 떨어진 후 프랑스, 이스라엘리그에서 뛰었는데 오프시즌에는 미국으로 돌아가 약사로 일했다.

KBL과 인연이 닿았던 건 2003년이다. 이스라엘리그에서 MVP로 선정되는 등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던 민렌드는 경쟁력이 한 단계 아래로 평가받았던 KBL 외국선수 드래프트에 참가, KCC에 전체 1순위로 지명됐다.

시범경기에서 부진했던 민렌드는 시즌 개막 후 화려한 백조로 변신했다. 페이드어웨이슛을 즐겨 구사하는 가운데 속공 가담 능력도 보여주며 KCC의 부활에 앞장섰다. 알고도 당하는 스텝으로 따내는 추가 자유투는 민렌드의 전매특허이기도 했다.

민렌드는 앨버트 화이트와의 경쟁 끝에 득점 1위(27.1점)에 오르며 외국선수 MVP까지 차지했고, KCC도 민렌드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KCC는 재결성된 ‘이조추 트리오’의 활약을 더해 챔피언결정전에서 7차전까지 가는 혈투 끝에 원주 TG삼보를 꺾었다. 대전 현대에서 KCC로 간판을 바꾼 후 따낸 첫 우승이었다.

KBL이 2004년에 사상 처음으로 자유계약제도를 도입해 제럴드 허니컷 등 화려한 NBA 경력을 지닌 외국선수들이 대거 등장했지만, 드래프트 출신 민렌드의 활약상은 계속됐다. 2005-2006시즌까지 3시즌 연속 KCC에서 활약했고, 특급 외국선수들 사이에서도 2시즌 연속 득점 2위에 오르는 등 여전한 경쟁력을 보여줬다.

민렌드는 2006-2007시즌에 KCC 시절 인연을 맺었던 신선우 감독이 있던 창원 LG로 이적했고, 이 시즌에도 피트 마이클에 이어 득점 2위에 올라 3시즌 연속 득점 2위라는 진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민렌드는 은퇴 후 전공을 살려 약국을 개업했고, 지난해 아들 찰스 민렌드 주니어가 카메룬 국가대표로 선발돼 화제를 모았다.

복역수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반전 스토리
리 벤슨은 KBL 역사상 전례가 없었던, 앞으로도 나오기 힘든 스토리를 지닌 외국선수였다. 그는 고교 시절 명문대로부터 입학 제의를 받을 정도의 유망주였지만, 한순간의 실수로 범죄자가 됐다.

1992년 8월, 마약에 취한 남자와 시비 끝에 총을 발포하며 벤슨의 인생도 꼬였다. 총을 맞은 남자는 생명에 지장이 없었지만, 벤슨은 총을 불법으로 소지하고 있었던 데다 경찰의 명령을 어기고 도주했다. 결국 벤슨은 살인미수죄, 도주죄에 마약매매 혐의까지 추가돼 25년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벤슨은 농구 감독 프랜시스 펠릭스의 권유로 감옥에서 다시 농구공을 잡았고, 형이 8년으로 줄어들어 출소 후 펠릭스가 지휘봉을 잡고 있는 브라운 매키 주니어칼리지에서 NBA리거의 꿈을 키웠다. 벤슨은 대학에서 평균 34.8점 13.6리바운드 3.7블록슛으로 활약, 2002년 NBA 드래프트에 초청을 받았다. 벤슨은 비록 NBA 팀의 지명을 받지 못했지만, 그리스와 이스라엘리그 등에서 프로선수로 활약하며 재기에 성공했다. 영화 같은 벤슨의 스토리를 접한 미국의 대형영화사는 그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 제작을 제안하기도 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커리어는 KBL 진출 후에도 일어났다. SK가 자유계약제도 시행 첫 해인 2004년 벤슨과 계약을 맺었지만, 그는 양지에 있는 연습체육관에 도착한 직후 손사래를 치며 미국으로 돌아갔다. “숙소가 예전에 살았던 교도소를 연상케 한다”라는 게 그 이유였다.

이후 중국-베네수엘라-NBA 서머리그를 거쳐 2005년 전자랜드와 계약한 벤슨은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트러블메이커로 불렸다. 기대대로 실력은 출중했지만, 역대 최초 외국인 감독인 제이 험프리스 감독과 자주 마찰을 일으켰다. 전자랜드로선 바닥을 벗어나지 못하는 게 당연한 시즌이었다. “연습할 때마다 말다툼을 벌여 둘 중 1명은 나가는 게 일상이었다”라는 게 당시 전자랜드 동료 문경은의 회고다.

심판 판정에 거칠게 항의하는가 하면, 시즌 도중 돌연 “미국으로 돌아가겠다”라는 엄포까지 놓았던 ‘악동’ 벤슨은 오리온스로 트레이드된 후 얌전한 양이 됐다. 역대급 꼴찌 팀에서 플레이오프 경쟁 중인 팀으로의 이적이었던 데다 리그 최고의 포인트가드 김승현과 함께해 동기부여가 살아난 것. 벤슨은 2005-2006시즌에 평균 27.9점 14.6리바운드 1.8블록슛으로 활약했고, 벤슨 영입 전 7위에 머물던 오리온스는 6강을 넘어 4강까지 진출했다.

이렇게 벤슨의 ‘코리안드림’은 해피엔딩으로 끝났냐고? 그랬다면 ‘꼬꼬농’의 마지막 외국선수로 다루지도 않았다. 오리온스로선 KBL 최고의 빅맨 가운데 1명이었던 벤슨과의 재계약을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한국인 여자친구와 결혼 계획을 밝히는 등 한국생활에 대한 만족감을 표한 벤슨 역시 망설임 없이 사인했다.

이때 오리온스가 벤슨의 파트너로 낙점한 외국선수가 앞서 언급한 마이클이었다. 마이클-벤슨 조합이라면 대권에 도전할 수 있을 것이란 게 오리온스의 계산이었다. 하지만 벤슨은 돌연 잠적 후 미국으로 돌아갔고, 그렇게 오리온스의 계획도 어긋났다.

벤슨은 시즌 개막을 코앞에 둔 시점까지도 이렇다 할 사유 없이 돌아오지 않았고, 오리온스는 계약을 파기하고 새로운 외국선수 수급에 나섰다. 대체 외국선수로 점찍었던 아말 맥카스킬이 마이클과의 신장 합계서 상한선을 2mm 초과, 합류가 불발된 오리온스는 이후 시즌 내내 마이클의 파트너를 찾는 데에 골머리를 앓았다.

벤슨의 돌발 미국행으로 타격을 입은 오리온스가 김승현, 마이클만으로 대권에 도전하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결국 오리온스는 4강 진출에 그쳤고, 이는 오리온스가 대구에서 치른 마지막 플레이오프가 됐다. 이래서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닐까.

#사진_점프볼DB(문복주, 유용우 기자), KBL PHOT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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