젓가락은 본래 신의 것…부엌에 깃든 깨알 문화사 [책&생각]

한겨레 2023. 9. 15.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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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도매상가 영업부장 경력의 작가
칼, 도마, 젓가락, 냄비, 냉장고 등
인류의 경험이 녹아든 주방 기물들
고대부터 현대까지 ‘달그락달그락’
중국 간쑤성 자위관 무덤 벽화에 그려진 부엌일 하는 여성. 글항아리 제공

역사와 문화로 보는 주방 오디세이
장원철 지음 l 글항아리 l 1만9800원

대개의 책이 그렇지만, 어떤 책은 지은이의 이력 한 줄이 읽는 이로 하여금 신뢰감을 갖게 할 때가 있다. 장원철 작가의 ‘역사와 문화로 보는 주방 오디세이’가 그런 책 중 하나다. 여러 책을 쓰고 번역한 작가이니 글맛 좋은 것은 당연지사. 5년가량을 “남대문 그릇도매상가에서 업소용 주방기물을 팔았다”는 머리말의 자기소개는 칼과 도마, 젓가락, 밥상, 냄비 등 주방에서 사용하는 도구들에 관한 글에 ‘이보다 더 좋은 작가는 없다’는 생각에 이르게 한다. 주방기물을 팔았다고 해서, 그것들의 쓰임새와 장점만 자세하게 소개한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제목에서 보듯 “역사와 문화”는 물론 과학과 세상사 등 온갖 지식이 망라된다. 주방기물을 팔았던 과거를 소환해 작가로서의 상상력을 덧붙이는 데에도 지은이는 공교(工巧)하다.

본래 젓가락은 신의 것이었다. 신에게 올리는 제사는 “금기를 지켜 정성을 다하면 복을 받지만 일탈하는 순간 멸망하는 우주”의 다른 말이다. 당연히 ‘부정’ 타지 않게 여러 금기를 철저히 지켰다. 정성에 정성을 더해야 하는 제사에 올릴 음식들을 다루면서 “‘오염 금기’를 세련시킨 것”이 바로 젓가락이다. 애초의 모양은 “V자 모양의 핀셋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음식을 입에 넣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신에게 바치는 공물을 정성껏 옮기는 역할”에만 충실하면 되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청동 젓가락 네 쌍.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글항아리 제공

지은이는 한‧중‧일 사람들의 먹는 습관과 밥상 차림에 따라 달라진 젓가락 길이를 이야기하던 끝에 사소하지만 흥미로운 과학 정보 하나와 “장사꾼” 경험을 버무린 정보를 제공한다. 죽음을 완곡하게 “밥숟갈 놓는다”고 말하지만, 그 전에 “젓가락질이 먼저” 어려워진다. 노화로 인해 손에 있는 29개의 관절에 염증이 생기고, 당연히 여러 관절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젓가락질은 힘겨워진다. 그런 이들에게 지은이는 “23센티미터 언저리에, 17에서 19그램 사이”의 “스테인리스 진공젓가락”을 권한다. 덧붙이는 말이 정겹다. “12~13그램 안팎의 나무젓가락에 비해 무겁지만 대안이 있다는 것은 다행이다.”

“먹어야겠다는 욕망과 조리도구는 아주 가까운 사이”라며 저자가 내놓은 주방기물은 냄비다. 200만 년~30만 년 전의 전기 구석기인들은 “생식과 구워먹기”만으로 먹는 일을 해결했다. 하지만 곧 끓이고 삶는 기술을 터득했다. 먹겠다는 욕망이 “물을 가두고 불의 힘을 견디는 적절한 용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단 끓여먹는다는 것은 “다분히 의도성이 가미되고 계획해야 하는 행동”이면서 손이 많이 가는 일이기 때문에 “축제 음식이거나 기념일 음식”, 즉 공동체가 모두 나서는 일일 수밖에 없었다.

신석기로 넘어오면서 “씨앗과 낟알과 같은 식량자원의 폭넓은 등장”은 끓여먹는 전용 기구, 즉 냄비의 필요성을 부각시켰다. 그렇게 등장한 냄비는 인구 증가로 이어진다. 구석기 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르면 “절반의 아이들이 태어나자마자 어떤 형태로든 부모에게 살해되었을 것”으로 본다. 형들이 젖을 물고 있는데, 동생이 끼어들 틈이 없기 때문이다. 이즈음 등장한 냄비는 “물에 끓여 이유식을 만들 수” 있게 했고, “영양성분이야 모유보다 못하지만, 젖을 일찍 떼고도 생존이 가능”하게 했다. 냄비 안에서 많은 식재료는 “맛과 영양을 교환하고” 또한 “안전한 먹거리”로 거듭난다. 요즘 같은 난세에 유념할 팁 하나도 알려준다. “재난이 생겼을 때 가장 먼저 챙겨야 할 조리 기구는 냄비다.”

기원전 4세기 무렵 구리로 만든 프라이팬. 테살로니키 고고학박물관 소장. 글항아리 제공
스위프트의 냉장열차 디자인. 글항아리 제공

젓가락과 냄비에 비하면 중량급인 냉장고는 어떤가. “차갑게 보관하면 오래 보관된다”는 사실쯤은 고대인들도 알고 있었다. 다만 불과 달리 “차가운 것은 아무 때고 만들 수 없다.” 하여 19세기 이전까지 겨울 얼음을 여름까지 보관하는 일은 한 나라의 왕 정도 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19세기 서구에서는 곳곳에 얼음 창고가 들어섰다. 겨울에 채굴한 얼음으로 시원한 음료수와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먹는 호사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큰 요인은 인구 밀집 지역인 도시로 “돼지고기와 소고기, 우유와 버터를 신선하게 수송하기” 위해서였다. 당연히 “물이 얼 수 있는 곳”은 곧 부동산이 되었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는 누군가의 얼음이었고 저기서부터 상류까지는 특정 회사의 소유였다. 채굴권은 땅덩어리처럼 거래되었다.” 1910년대 처음 등장한 가정용 냉장고는 1920년대 이르러서야 몇몇 기능이 보강된 “쓸 만한 제품이 쏟아지기 시작”했지만, 비쌌다. 당시 포드의 보급형 자동차 ‘모델T’보다 두 배 이상 비싼 1000달러였다. 요즘 환율로 하면 2만4000달러, 한화 2700만원이다. 1965년 럭키금성이 120리터 냉장고를 출시하면서 냉장고 보유국이 된 한국은 이제 김치냉장고까지 수출하는 나라가 되었다.

불맛, 손맛 이전에 칼맛이라며 대개의 칼이 편도 25~30도로 만들어지는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도 눈여겨보면 좋다. 15~25도 사이의 날각은 절삭력은 좋지만 내구성이 약해 자주 갈아줘야 한다. 반면 편도 25~30도에서부터 내구성이 강해지는데, 사냥칼, 주머니칼, 캠핑 레저용칼이 그렇다. 13세기 출현한, 요즘 판타지 게임에 자주 등장하는 서양의 ‘롱스워드’도 이 각도다. 역사와 문화, 과학은 물론 판타지 게임까지, 지은이의 지적 감수성은 실로 넓고 깊다. 이외에도 칼과 짝을 이루는 도마, 밥상, 도자기 등 다양한 주방기물들이 지은이의 이야기 도구로 변신한다.

1926년께의 프랑크푸르트 주방. 글항아리 제공

‘역사와 문화를 보는 주방 오디세이’는 주방 도구를 차용할 뿐, 실로 인간의 역사를 아우르는 방대한 역사서라 할 만하다. 한편 동시대를 산 사람들에게는, 이를테면 밥상을 들고 나르던 시대를 거쳐 식탁에서 밥상을 대하는 세대에게는 고단했던 삶을 위무하는 좋은 치유서로도 읽힐 수 있다. 그런가 하면 향후 주방기물을 팔고자 하는 장사꾼으로 나서려는 사람들에게도 유용하겠다. 책의 이야기를 무기 삼아 각종 도구들의 쓰임새를 설명한다면, 금방 입소문이 날지도 모를 일 아닌가. 각설하고, ‘역사와 문화로 보는 주방 오디세이’는 읽는 맛이 남다른 책이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이 책을 권할 이유는 충분하다.

장동석 출판도시문화재단 사무처장,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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