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영의 정상에서 쓴 편지] 6. 오대산: 오직 모를 뿐, 오직 나아갈 뿐

장보영 2023. 9. 15.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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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절 서로 정답게 품은 곳, 푸른 하늘 향해 ‘오직 오를 뿐’
월정사 전나무숲 뒤로한 채 산행 시작
울창한 숲 속 깊숙이 안긴 사찰 상원사
보물처럼 숨어있는 사자암·적멸보궁
굳건히 자리한 국내 가장 오래된 동종
마침내 도달한 비로봉 앞 펼쳐진 봉우리
마치 다섯 신들이 함께 대화 나누는 듯
▲ 부처의 진신사리가 봉안된 오대산 적멸보궁.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중 하나다.

이 편지를 부치는 곳은 프랑스의 산악도시 샤모니이고 저는 몽블랑이 보이는 작은 게스트하우스에 잠시 머물고 있습니다. 샤모니는 며칠째 축제 분위기입니다. 몽블랑 주변을 달리는 울트라 트레일 몽블랑(Ultra Trail Mont-Blanc) 대회가 열려 전 세계 수만여 명의 선수가 출전해 치열한 경주를 펼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올해 15㎞ 코스를 달렸는데 짧다고 가볍게 생각했으나 누적 상승고도가 1200m를 웃돌아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쏟아부어야 했습니다. 그래도 끝없이 이어지는 오르막 산길을 달리면서 모처럼 머리도 가슴도 비울 수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나아갈 뿐인 그 시간이 돌아보니 참 좋았습니다.

산을 오르다 보면 ‘오직 모를 뿐, 오직 행할 뿐’이라는 어느 스님의 정언이 떠오르곤 합니다. 일어날 후일은 누구도 알지 못하고 단 하나 분명한 것은 지금 앞으로 나아간다는 사실뿐이지요. 이는 비움의 미덕과 무척 닮아있습니다. 모든 조건이 사라지고 행위만 남은 자리에서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나요? 오대산은 이 물음의 끝에 닿고자 하는 기대로 오른 산입니다. 강릉시와 평창군과 홍천군에 걸쳐 솟아 있으며 산세에 천년고찰 월정사와 상원사를 비롯해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된 적멸보궁을 보유한 귀중한 역사문화의 산. 지혜의 보살인 문수보살의 성지인 오대산에 오르면 어쩐지 마음이 보일 것 같았습니다.


절기는 처서(處暑)를 지났으나 오대산에 가을이 들려면 조금 시간이 필요해 보입니다. 단풍은 기별이 없고 오대천은 아직 청량합니다. 과거였으면 차편으로 족히 반나절은 걸릴 여정이었을 텐데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서울에서 평창을 거쳐 강릉을 잇는 KTX가 다니면서 오대산은 제법 가까운 산이 됐습니다. 제가 지금 사는 원주의 만종역에서 진부역까지 30분이면 도착하니 오대산이 첩첩산중이라는 말도 옛말입니다. 진부역에서 내리자 마침 오대산 방면으로 떠나는 버스 한 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노선표를 보니 진부면을 지나 월정사와 상원사로 이동합니다.

▲ 해발 1563m 오대산 정상 비로봉.

산과 절이 서로를 품고 있는 곳인 만큼 버스의 승객은 산꾼이 반이고 불자가 반입니다. 종점인 상원사까지 간다면 오대산 가는 길이 조금 더 수월하겠으나 쉬운 길에 미혹되지 않고 월정사에서 내려 산행을 시작합니다. 월정사 일주문에서 뒤돌아 전나무숲을 바라봅니다. 숲은 여전히 울창합니다. 이 숲을 여태 두 번 정도 걸었는데 한 번은 지천이 하얀 겨울이었고 한 번은 소나기가 퍼붓는 여름이었습니다. 겨울에는 당신과 함께였고 여름에는 저 홀로 이 숲을 찾았지요. 이 숲을 걸으면서 나의 안팎이 깨끗해지기를, 당신이 행복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때마다 저의 기도에 화답하는 듯 나무 사이로 바람이 불었습니다.

불경 소리가 울려 퍼지는 대웅전에 들러 합장합니다. 팔각구층석탑은 여전히 보수 공사 중이라 그 형태를 오롯이 볼 수 없습니다. 쇠해가는 세월을 어찌 막을 수 있겠습니까. 용금루를 지나 선재길로 들어섭니다. 선재길은 월정사와 상원사를 잇는 9㎞ 오솔길입니다. 1960년대 말 도로가 나기 전 스님들과 불자들이 왕래하던 유일한 길이었지요. 선재길이라는 이름은 오대산이 문수보살의 성지라는 데서 연유합니다. 지혜를 갈구하는 ‘선재(동자)’의 자세로 걷는 길인 것입니다. 지난해 이맘때 월정사에서 열린 ‘세계 청소년 명상 페스티벌’이 떠오릅니다. 그때 저는 멘토로 참여해 아이들과 참나를 찾아 마음공부를 했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푸른 하늘에서 이 계절이 절정에 이르렀음을 느낍니다. 오대천의 물줄기를 거슬러 오르므로 고비 없이 순탄한 길이지만 오대산 정상 비로봉까지 올라야 하기에 발길을 서두릅니다. 이 길을 오고 가는 사람들과 스칠 때마다 공손히 인사합니다. 부처님을 만나듯이 말입니다. 부지런히 움직이다 보니 어느덧 섶다리 앞입니다. 섶다리는 나룻배를 띄울 수 없는 야트막한 강에 만든 다리를 말합니다. 잘 썩지 않는 물푸레나무로 다리 기둥을 세우고 소나무나 참나무 상판에 솔가지 등의 섶을 엮어 깐 뒤 흙을 덮어 만듭니다.

▲ 개망초. 꽃 모양이 마치 계란프라이처럼 생겨 ‘계란꽃’이라고도 부른다.

정다운 길 위에서의 시간이 흐르고 정오 무렵 상원사탐방지원센터에 도착합니다. 이곳부터 비로봉까지는 3㎞입니다. 그사이에 상원사와 사자암과 적멸보궁이 보물처럼 숨어 있습니다. 이제부터 정신을 단단히 차려야 합니다. 인근의 작은 매점에서 물과 간식을 보충하고 상원사로 향합니다. 오대산 안쪽에 깊숙이 안긴 사찰인 만큼 경내는 더없이 고요합니다. 우리나라에 전해지는 동종 가운데 가장 오래된 동종인 상원사 동종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습니다. 지난해 여름 이곳을 찾았을 때 저물녘 노을 속에서 들었던 붉은 동종 소리는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상원사를 한 바퀴 돌아본 뒤 사자암으로 이동합니다. 사자암은 오대산에서 무척 의미 있는 곳입니다. 상원사와 비로봉 사이에서 적멸보궁을 수호하고 보좌하듯 자못 근엄하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자암은 지장암(남대), 관음암(동대), 수정암(서대), 미륵암(북대)과 더불어 지리적으로 오대산 한가운데 있어 ‘중대’라고 불립니다. 해발 1563m의 주봉 비로봉을 비롯해 호령봉, 상왕봉, 두로봉, 동대산의 고산 준봉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어서 오대산이라는 설과 더불어 이 다섯 개 암자로 인해 오대산(五臺山)이라는 설이 함께 전해집니다. 사자암 처마에 매달린 풍경이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사자암에서 적멸보궁 가는 길은 천상에 이르는 길 같습니다. 정갈하게 깔린 돌계단을 한 발씩 딛고 오를 때마다 괜스레 숙연해집니다. 적멸(寂滅), 모든 번뇌가 남김없이 소멸한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이 감정은 설악산 봉정암을 오를 때도 느끼곤 합니다. 봉정암을 오르는 어느 늙은 불자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이 삶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이 삶에서 나는 앞으로 어떠한 마음으로 살아야 좋을지 새삼 생각해보게 됩니다. 감히 적멸을 꿈꾸며 오대산 적멸보궁 앞에 섭니다. 얼마나 힘든 산인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습니다. 괴로운 것은 언제나 몸이 아니라 마음이었습니다.

불단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는데 뒤에서 초로의 보살님이 나오시더니 제 손에 백설기 한 덩이를 쥐어 주십니다. 산에 올라가면 물이 없을 테니 여기서 물도 꼭 채워가라면서요. 살면서 이런 순간은 흔하지 않기에 함부로 부처님을 떠올립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묻힌 곳이라 더욱이 그 존재가 가깝게 느껴집니다. 가피(加被)라고 하던가요? 부처님의 은혜로 힘을 내서 이 중생, 이 산 끝까지 가보겠다고 다짐하며 떡 한 입을 베어 뭅니다. 세상에서 가장 달고 맛있는 떡입니다. 오늘 받은 이 무구한 마음을 저도 잊지 않고 반드시 누군가에게 돌려주고 싶습니다.

▲ 상원사에서 바라본 오대산의 산세.

비로봉 가는 길에 눈은 호강합니다. 개망초, 인가목, 투구꽃, 산오이풀 등 세상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야생화가 지천입니다. 오후 3시부터는 비 예보가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하늘의 구름이 빠르게 이쪽으로 몰려옵니다. 구름보다 먼저 정상에 도착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부지런히 두 다리를 움직입니다. 다행히 비로봉에 올랐을 때는 그곳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장면을 다 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오대산의 다섯 봉우리가 어깨를 견주고 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신들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과 같았습니다. 일전에 비로봉에 오를 때마다 번번이 날이 궂고 흐려서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오대산의 아름다움과 온전하게 마주합니다.

올라온 길로 하산하려던 계획을 바꿔 상왕봉 쪽으로 돌아섭니다. 상왕봉과 두로령을 거쳐 먼 길을 돌아 상원사로 내려갈 생각입니다. 비는 아직 오지 않고 산이 아직 눈앞에 남아 있으니 더 나아가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문득 노인봉에 시선이 머뭅니다. 외따로 떨어져 솟은 노인봉에 한 노인이 산장을 지키며 갈 곳 없는 산객을 품어준 시절이 있었지요. 그는 이 삶에서 무엇을 바랐을까요? 모든 조건이 사라진 자리에서 저는 이렇게 오르고 있습니다. 나의 행위가 그 자체로 완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어떤 환상이나 희망 없이도 오직 오르고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마음에 화답하는 듯 빗방울이 떨어집니다. 작가·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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