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살 어르신 ‘서울 가는 기차표’ 뺏은 나라…돈만 좇아 달린다

장현은 2023. 9. 14.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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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성의 역행][공공성의 역행] 적자 노선 없애는 철도공사
환승으로 교통비 2배…큰 병원 갈 때 더 막막
시각장애 남편·목발 짚는 아내 태울 기차 없다
신달막 할머니가 8월29일 오전 전남 보성군 득량면 예당역에 앉아 있다. 하루에 한 번 영등포역까지 갈 수 있던 무궁화호 열차가 사라진 뒤 할머니의 서울 가는 길은 어려워졌다. 할머니는 예당역에서 무궁화호를 타고 광주송정역까지 간 뒤 케이티엑스로 갈아타야 서울에 갈 수 있다. 아흔이 넘은 할머니 혼자 갈 수 없는 길이기에 매번 아들이나 손녀가 광주송정역까지 데려다준다. 기차를 빼앗은 정부가 야속하기만 하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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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없으니께 성가시제. 서운하기도 허고…그 전엔 1년에 예닐곱번 가던 서울 아들집도 이제 큰 맘 먹어야제.”

아흔살 신달막 할머니가 예당역에 앉으며 지팡이를 부리고 말했다. 신 할머니가 사는 전남 보성군 득량면 오봉2리는 평균 나이 80살 주민 67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이다. 그래도 마을 근처에 기차역이 두 개나 있다. 차로 3분 거리에 있는 예당역, 6분 거리의 득량역이다.

‘경전선’이 다니는 철도 길에 마을이 있는 덕이다. 2년 전까진 철도를 따라 하루 한 번 다니는 용산행 무궁화호가 경전선을 거쳐 호남선, 경부선으로 곧바로 이어지며 오봉2리 사람들을 서울로 실어 날랐다. 신달막 할머니(90)와 서울 사는 여섯 자녀도 이 길을 거쳐 만났다.

2021년 8월 예당역과 득량역을 하루 한 번 지나다니던 용산행 무궁화호 열차가 돌연 사라졌다. 적자 노선이어서 운영 효율성이 낮다는 게 한국철도공사의 논리였다.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설명이었지만 달리 항의할 방도도 없었다. 그리고 할머니의 삶과 마을 풍경이 바뀌었다. 지난달 28일 전남 보성 오봉리 마을에서 신 할머니를 만났다.

“서울서 남편 제사, 아들 생일…미안해서 이제 잘 못 가”

2년 전만 해도 신 할머니에게 서울은 성가신 곳이 아니었다. 갈 일이 많았다. 진작 세상을 떠난 남편 제사도, 아들 생일도, 병원도 꼬박꼬박 서울에서 챙겼다. 기차 덕분이었다.

예당역에서 아침 7시43분 출발하는 무궁화호를 타면 오후 1시반께 아들이 마중 나와 있는 영등포역에 내렸다. 순천에서 출발해 예당역을 거쳐 용산까지 가는 무궁화호였다. 예당역에는 매표 직원이 없어 열차를 타고나면 승무원이 열차 안에서 표를 끊어 주고, 그대로 서울까지 타고 가면 됐다.

2021년 8월 한국철도공사는 순천발 용산행 무궁화호 노선을 고속열차(KTX)가 다니는 광주 송정역까지만 운행하는 단거리 열차 노선으로 바꿨다. 철도공사는 “고속열차 수혜 지역 지속 확대에 따른 수요 감소를 고려, 장거리 무궁화호 등 효율화를 통한 영업손익 개선을 추진”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돈이 되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신 할머니와 오봉2리 주민뿐 아니라 열차가 다니는 보성과 화순 주민들도 용산역까지 직행하는 유일한 열차를 잃었다. 순천발 용산행 무궁화호와 함께 포항∼순천, 서울∼진주 등 14개 무궁화호 노선도 줄이거나 폐지했다.

무궁화호가 순천∼송정을 오가는 단거리 열차가 되자 광주송정역 환승은 신 할머니가 서울 가는 길에 들러야 하는 필수 관문이 됐다. 하지만 무궁화호가 서는 광주송정역 2번 승강장에서 서울로 가는 케이티엑스가 서는 8번 승강장까지 이동하는 일은 신 할머니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다.

양쪽 다 수술을 받은 무릎을 제대로 펴기 힘들고, 류머티스성 관절염과 퇴행성 관절염으로 튀어나온 관절 때문에 혼자 거동이 쉽지 않은 탓이다. “에스깔(에스컬레이터)도 못 타제. 저짝 끝에서 이짝 끝까지 환승해야 한다는디 내가 걷지도 못하는데 그걸 어떻게 탄다냐.”

자녀들을 보러 서울 가는 횟수를 줄였다. 하지만 몸이 아파 찾는 큰 병원은 어쩔 수 없었다. 신 할머니는 서울에 있는 병원에서 고관절, 무릎, 눈 수술을 받은 탓에 약을 타고 후속 검사를 받으려면 서울에 가야 한다.

신 할머니가 병원 가는 날은 온 가족이 총출동하는 날이 됐다. 2년 전까지 영등포역에서 기다렸던 아들이 이젠 광주송정역까지 마중 나온다. 역에서 빌린 휠체어에 할머니를 태워 역무원과 함께 서울행 기차로 환승시킨다. 진료를 마치고 신 할머니가 오봉리로 다시 돌아올 땐 손녀가 서울에서 광주송정역까지 같은 역할을 맡는다.

신 할머니가 사라진 용산행 무궁화호 열차를 하염없이 아쉬워하는 이유다. “5시간 반인가 6시간인가. 시간은 오래 걸려도 그거면 을메나 편했는지. 한 번에 가면 아들이 차로 데릴러 나오기만 하면 되니까…근데 그걸 한 번에 읎애부렀어. 이젠 미안해서 간단 말도 잘 못 혀.”

효율성 앞에 무너지는 공공성

열차가 사라진 이후 신 할머니가 사는 오봉리 마을과 선로를 따라 늘어선 마을 주민들은 열차 이용에 얽힌 고난기 하나쯤은 품고 다니게 됐다.

“우리 예당역을 베린 거지(버린 거지) 뭐.”

오봉리 마을 회관에 모인 주민들이 사라진 용산행 무궁화호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이경자(70)씨가 작은 시골 마을 주민으로서, 고령의 시민으로서 느끼는 ‘소외감’을 말했다. 이씨는 “환승하면 된다고 쉽게 말하지만 이 동네에서 제일 젊은 나도 표 끊고 환승하고 하는 게 무서워서 그 이후로 열차 타 본 적이 없다”며 “안산에 사는 애들 집에 가는데 열차 타기 무서워서 버스 타고 가려다가 헤매서 결국 12시간 걸려서 간 적도 있다”고 말했다.

시간에 맞춰 환승 표를 구매하고 열차를 타는 일은 고령인 마을 주민들에게 쉽지 않지만, ‘효율성’은 이런 처지를 고려하지 않는다.

소외감은 옆 마을에서도 이어진다. 전남 보성군 보성읍에 사는 김아무개(74)씨 부부는 열차가 사라진 뒤 두 달에 한 번 가던 병원 검사를 석 달에 한 번으로 줄였다. 시각 장애로 앞을 볼 수 없는 김씨와 거동이 불편해 목발을 짚는 아내가 서로 의지하며 당뇨약, 심장질환약, 무릎 약 등을 타러 서울 병원에 갔는데, 번거로운 환승뿐만 아니라 두 배 넘게 비싸진 철도 비용도 문제다.

보성역에서 용산역까지 무궁화호로 2만8000원이면 가던 길을, 이젠 광주송정역까지 가는 무궁화호 비용 5200원에 영등포역까지 가는 KTX 비용 47000원을 내야 갈 수 있게 됐다.

선명해지는 민영화 기조…“SR 통합만이 살길인 이유”

무궁화호 감축은 오봉리와 근처 마을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다. 철도공사는 2017년부터 2021년 사이 전체 무궁화호 94편을 감축했다. 이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무궁화호는 올해 55칸, 2028년까지는 509칸이 폐차될 예정이다.

배경은 한국철도공사의 ‘적자’다. 원래 무궁화호와 새마을호는 운행하면 할수록 적자가 나는 구조라 이 적자를 어떻게 메울 것이냐가 문제가 된다. 경전선은 공익서비스의무(PSO) 대상으로, 그동안 코레일이 케이티엑스에서 얻은 흑자로 무궁화호 등의 노선 적자를 메우는 교차 보조 구조로 운영했다. 교통 소외 지역에 필요한 공공성을 고려하는 공공기관이라 할 수 있는 일종의 공공서비스 재분배다.

문제는 철도공사 부채 규모가 매년 커지고, 이게 다시 용산행 무궁화호 같은 적자 노선을 감축하는 등 공공성을 약화하는 논리로 활용된다는 점이다. 2017년 이후 코레일의 적자가 이어지며 철도공사 부채는 2018년 약 15조원에서 지난해 말 기준 약 20조원으로 늘었다. 부채는 왜 계속 늘까?

철도노조와 철도민영화저지 하나로운동본부 등 시민단체는 “수익성 좋은 알짜 노선인 에스알 고속철도가 분리됐기 때문”이라고 본다. 2011년 정부는 고속철도를 분할해 민영화 계획을 세웠고, 이에 따라 2013년 에스알이 설립됐다. 에스알이 돈이 되는 고속철도 사업을 쪼개 수익만 가져가게 됐다. 그만큼 알짜 노선을 잃은 철도공사는 적자로 돌아섰다.

무궁화호·새마을호의 적자를 보전할 여력도 줄었다. 공공기관의 사회적 가치 실현을 강조한 문재인 정부도 쪼개진 에스알과 케이티엑스를 통합하겠다는 선언만 했을 뿐 이를 실현하지 않았다. 오히려 에스알을 공기업으로 지정해 고속철도 통합을 더 멀게 만들었다.

국토교통부는 올해 초 케이티엑스와 에스알티의 통합을 유보한다고 공식화했다. 9월1일부터 에스알의 자체 노선 확대를 결정하는 등 쪼개진 고속철도 굳히기는 더욱 본격화했다. 시설유지보수 및 관제권 등 철도를 둘러싼 다양한 업무를 코레일에서 떼어내는 개편 작업도 착착 진행되고 있다.

철도가 사라진 오봉2리 주민 목소리를 듣던 철도 노동자가 있다. 소경섭 철도노조 호남지방본부 조직국장의 한탄이다.

“철도는 국민을 위해 국가가 운영하는 공공 서비스인데, 경제 논리로만 이야기하는 건 말도 안 된다. 수익이 안 나게 해놓고 수익이 안 난다고 일방적으로 열차를 감축한다. 공공성을 가장 고려해야 할 국가가 경전선 등 지역 주민의 공공성을 가장 최하위로 여기는 것이다.”

알짜 자산의 분리와 민영화→공공기관의 적자→공공성의 축소로 이어지는 복잡한 고리 끝에, 철도가 추구해야 할 최고의 공공성인 ‘길’을 잃은 오봉2리 신달막 할머니는 올해 추석을 오봉리에서 혼자 보낼 작정이다.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볼 오봉2리 이장 안도순(70)씨가 야속한 마음을 얹었다.

“적자가 난다는 이유로 하나씩 없어지더니, 정거장 직원들도, 역무원도 없어지고 철도도 한순간에 없어진다고 통보를 해버렸시유. 그래도 기차 같은 건 주민이 우선일 줄 알았는디….”

※‘공공성의 역행’ 기획은 한겨레가 전국공공운수사회서비스노조의 지원을 받아 제작했습니다.

장현은 기자 mix@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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