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낭 근처 리선섬, 한국군 피해 도망친 ‘보트피플 피난처’

고경태 2023. 9. 12.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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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 파병 60년의 기억][베트남전 파병, 60년의 기억] ②가족 잃은 응우옌티아의 증언
빈쩌우사 가인까촌 학살 생존자 팜떤응우옌(왼쪽)과 응우옌티아가 지난달 6일 증언하고 있다. 곽진산 기자

리선섬은 떠오르는 베트남의 ‘힙한’ 여행지다. 떠나기 전 포털에서 확인한 일부 블로거들의 글은 극찬과 감탄 일색이었다.

지난달 7일 베트남 꽝응아이성 빈선현 빈쩌우사 사끼 항구에서 만석인 쾌속선을 타고 40분 만에 리선섬에 갔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어부들과 방문자들이 뒤섞여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섬 안쪽에 들어가자 에메랄드빛이라는 말로도 모자랄 천혜의 바다 색감이 펼쳐졌다. 화산 활동이 빚은 절벽과 동굴은 광대하면서도 아늑했다. 이곳에서 수확했다는 마늘은 맥주 안주로 삼을 만큼 고소했다. 관광지가 아니라 작은 어촌에 온 듯한 느낌도 좋았다.

여행지로 알려져 2014년부터는 매일 1천여명이 찾는다는 이 섬에, 한때 한국군을 피해 도망친 ‘보트피플’이 정착했다는 사실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리선섬으로 미처 피하지 못해 한국군에 의해 학살당한 주민들이 있다는 사실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달 6~7일 빈쩌우와 리선섬에서 그 증언자들을 만났다.

8월6일 오전 베트남 꽝응아이성 사끼 항구에서 쾌속선을 타고 40분 만에 도착한 리선섬 항구. 어부들과 방문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곽진산 기자
리선섬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아온 팜찌가 지난달 7일 한겨레 취재진 앞에서 증언하고 있다. 곽진산 기자

팜찌(79)는 리선섬에서 한평생 살았다. 그는 “1966~1968년 이곳에 한국군과 미군을 피해 수천명의 피난민들이 몰려와 1975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지냈다”며 “집 앞마당에도 피난민들이 대나무로 엮은 텐트 16개를 치고 살았다”고 했다.

당시엔 동력선조차 거의 없었다. 보트피플은 돛단배로 왔다. 바람이 순하면 3시간 만에 왔고, 바람이나 파도가 좋지 않으면 이틀이 걸리기도 했다. 팜찌는 피난민들로부터 미군과 한국군의 만행을 질리도록 들었다고 했다. 주민 700여명을 한낮에 그늘 없는 햇볕에 두고 물을 안 줘 소변을 마셨다거나, 아이들이 있는 집에서 어머니를 죽을 때까지 성폭행했다는 이야기는 믿기지 않아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꽝응아이성에서 온 피난민이 가장 많았고, 그다음으로는 빈딘성과 꽝남성에서 온 이들이었다. 1966~1968년 한국군 청룡부대(해병 제2여단)는 꽝응아이성에 이어 꽝남성에, 맹호부대(수도사단)는 빈딘성에 주둔했다.

빈쩌우사 가인까촌에 사는 응우옌티아(63)는 리선섬으로 피난을 가지 못했다. 그래서 가족들이 한국군에 의해 비참하게 죽었다고 생각한다. 응우옌티아는 총격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이고, 그의 이웃 팜떤응우옌(68) 역시 생존자이자 목격자다.

가인까촌은 어업으로 먹고사는 바닷가 마을이다. 집집마다 배가 있어 한국군이 마을을 지나간다는 소문이 나면 배를 타고 리선섬으로 가든지 바다 멀리 떠났다. 응우옌티아 가족은 배가 없었고, 배를 빌리지도 못했다. 아버지는 남베트남 군인으로 사이공(현 호찌민)에 가 있었다.

1967년 9월16일. 마을 언덕에 초소를 세우고 주둔하던 한국군이 마을로 내려와, 집 방공호에 숨어 있던 주민들을 바닷가로 모았다. 군인들은 총을 난사했고 응우옌티아의 외할머니(65), 어머니 보티즈엉(25), 언니 응우옌티미(10) 등 21명이 죽었다. 7살이던 응우옌티아는 어머니 목을 끌어안고 매달렸다. 주검들 맨 밑에 깔려 다행히 살았지만 왼손을 다쳤다. 한참 지나 정신을 차려보니 밀물로 바다는 온통 핏빛이었다. 놀라 소리를 지르자 사람들이 달려왔다.

리선섬의 바다. 곽진산 기자

그때 달려간 사람 중 팜떤응우옌이 있었다. 12살이었던 그는 응우옌티아 가족과 주민들이 총격당하던 모습을 언덕 위 방공호에서 목격했고, 군이 물러간 뒤 구조와 주검 수습을 도왔다. 해당 사건 1년 전에도 학살이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1966년 10월4일(음력 8월20일), 마을 언덕에 주둔하던 한국군이 마을에 와서 집집마다 뒤지다 방공호가 발각되면 총으로 쏴 다 죽였다. 군이 방공호 안에 돌로 된 절구를 밀어 넣어 깔려 죽은 사람도 있다. 팜티웃(당시 28살 남짓), 응우옌떤꽝(3)이다.” 응우옌티아는 훗날 팜티웃의 아들과 결혼했다. 또 다른 희생자 응우옌떤꽝은 남편의 동생이다.

팜떤응우옌은 “1966년 10월 사건 당시 한국군이 마을에 들어와 주민 50~70명을 모아놓고, 이 사람 저 사람 마구 지목해서 밖으로 끌어낸 뒤 죽였다”고 했다. 본인도 있었지만 겨우 목숨을 건졌다고 했다. 두차례 학살로 죽은 사람은 50여명이라고 덧붙였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그는 전쟁 직후인 1977년 빈쩌우사 인민위원회에 피해 구제를 건의했지만 아무런 대답을 듣지 못했다. 이제는 한국 정부가 나서달라고 했다. 일단 이곳에 두 사건의 희생자들을 추념하는 두개의 위령비를 세워주었으면 하는 게 그의 바람이다.

한국군이 무서워 리선섬으로 피난 간 보트피플은 1975년 4월 해방과 함께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갔다. 2023년 소수의 한국 여행자들은 부푼 기대감을 안고 리선섬으로 떠난다. 55~57년 전 섬사람들의 공포와 두려움을 기억해주는 이는 거의 없다. 리선섬의 바다는 그때나 지금이나 시리도록 투명할 뿐이다.

리선섬 전경. 곽진산 기자

리선·빈쩌우/고경태 기자 k21@hani.co.kr 곽진산 기자 kj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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