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와인] ‘은둔의 스포츠 재벌, 천재와 손을 잡다’ 더 힐트 이스테이트 샤도네이

유진우 기자 2023. 9. 9. 0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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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스포츠 구단 운영은 여러 모로 기업 경영과 비슷하다.

축구나 농구 같은 팀 스포츠는 구단주부터 단장, 감독까지 모든 구성원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야 한다. 종합 격투기나 피겨 스케이팅 같은 개인 스포츠처럼 특정 선수 혼자 잘한다고 해서 꼭 좋은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

명문 스포츠 구단으로 발돋움하려면 구단주는 필요한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단장은 외부에서 저평가된 인재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선구안이 필요하다. 내부에서 능력있는 신진 선수를 체계적으로 육성하는 시스템도 갖춰야 한다. 감독은 이렇게 모인 선수들이 제 역량을 발휘할 수 있게 적재 적소에 배치해 승리를 이끌어 내는 일을 맡는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스포츠 시장이다. 스탠 크랑키(Kroenke)는 그런 미국에서도 단연 첫 손에 꼽히는 스포츠 재벌이다.

크랑키는 세계 축구팬에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English Premier League) 소속 명문팀 아스날 지분 100%를 가진 구단주로 유명하다.

미식축구 인기가 축구 인기보다 뜨거운 미국 본토에서는 프로 미식축구리그(NFL) LA 램스 소유주로 더 잘 알려졌다. 그 밖에도 그는 미국 프로농구리그(NBA) 소속 덴버 너기츠, 미국 프로하키리그(NHL) 콜로라도 애벌란치, 미국 프로축구리그(MLS) 콜로라도 래피즈를 가지고 있다.

최근에는 오버워치나 콜 오브 듀티처럼 젊은 연령대가 좋아하는 이스포츠 프로리그 소속 구단까지 사들였다. 관중이 있는 곳이라면 크랑키 입김이 안 닿는 곳이 없다.

이렇게 많은 구단을 가지고도 그는 미디어 앞에는 좀처럼 나서지 않는다. ‘크랑키를 보려면 그가 가진 팀이 우승을 해야 한다’는 것이 미국 프로 스포츠계 정설이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은둔의 크랑키(silent stan)’다.

그가 어떤 취미를 가지고 있는지 여부도 불분명했다. 사생활 보도에 관대한 미국임에도 딱히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래픽=정서희

오로지 ‘와인을 사랑한다’는 사실만 주류업계를 중심으로 알음알음 퍼졌다. 그는 2000년대 초반 캘리포니아에 호나타 와이너리를 직접 세웠다.

2006년에는 돌연 미국에서 가장 비싼 와인을 만들던 와이너리를 사들였다. 매입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이 와이너리를 넘긴 전 주인은 “크랑키가 거부할 수 없는 가격을 제시했다”는 말을 남겼다.

그가 거액을 제시하고 사들인 ‘스크리밍 이글(Screaming Eagle)’은 미국 와인 역사에서 독보적인 입지를 자랑한다.

좋은 와인이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미국 나파(Napa) 밸리 지역에서도 가장 몸값이 비싸다. 해외 평균가는 5000달러(약 720만원) 정도다. 매년 약 600상자(약 7200병) 정도만 만들다 보니 희소 가치가 유난히 높다. 이 와인을 사려면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놓고 무작정 기다려야 한다.

차례가 오면 우편으로 통보를 하는데, 아무리 빨라도 12년 정도는 걸린다는 게 통설이다. 어렵사리 리스트에 이름을 올려도 1인당 매년 3병까지만 살 수 있다. 이 때문에 일반 소비자들은 대부분 경매에서나 스크리밍 이글을 한 두병 만날 수 있다. 워낙 매물이 적다 보니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이다.

크랑키는 이후로도 스포츠 팀을 새로 세우고, 사들이는 것처럼 ‘와이너리 쇼핑’을 이어갔다.

더 힐트는 그가 스크리밍 이글 인수 2년 후 직접 세운 또 다른 와이너리다. 앞서 보유한 호나타와 스크리밍 이글은 카베르네 소비뇽과 시라 같은 포도 품종으로 강인하고 묵직한 와인을 만든다.

반면 더 힐트는 피노누아와 샤르도네 품종을 중심으로 부드럽고 우아한 와인을 생산한다. 영어로 힐트(Hilt)라는 단어는 ‘칼 혹은 검 자루’를 뜻한다. 보통 ‘철저히’, ‘완벽하게’라는 의미를 지닌 ‘투 더 힐트(to the hilt)’라는 숙어로 쓰인다.

크랑키는 마치 감독이 코치진을 새로 꾸리듯 함께 ‘완벽한’ 와인을 만들 임무를 수행할 인물로 호나타에서 같이 일했던 양조가 맷 디즈를 선임했다. 디즈는 유연하고 실험적인 양조 철학으로 이름을 알렸다.

더 힐트 에스테이트 샤도네이는 크랑키와 디즈가 만든 대표작이다. 이 와인은 다른 밭에서 사온 포도를 쓰지 않고, 모두 직접 키운 포도로만 빚는다.

포도가 자라는 벤트락과 레이디언 구역은 유난히 높고 서늘하다. 인근 태평양에서는 종일 바닷바람이 불어 온다. 토양 역시 오래도록 쌓인 해양 퇴적물과 자갈이 쌓여 척박한 편이다. 대신 이런 악조건을 딛고 맺은 포도 열매는 촘촘한 밀도감을 자랑한다.

디즈는 “관능적인 농후함과 발랄한 생기가 상반된 매력을 모두 보여주는 와인”이라며 “향을 맡는 순간 애플파이를 굽고 있는 부엌에 있는 것같은 행복함에 빠져든다”고 표현했다.

더 힐트 에스테이트 샤도네이는 2023 대한민국 주류대상 신대륙 화이트 와인 10만원 이상 부문에서 대상을 받았다. 수입사는 나라셀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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