켜켜이 스며든 4월의 트라우마, “두려운 바다” 언제까지 계속될까[여전히, 세월호]

김희진·김혜리 기자 2023. 9. 7.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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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세월호 생존자들이 상담소에서 ‘미술 치료’ 과정 중에 만든 도자기들 |제주·김혜리 기자

제주도에 세월호 생존자들이 있다. 정년퇴직 후 새 삶을 꿈꾸던 부부, 평소처럼 동료와 화물차에 오른 기사, 두 자녀를 둔 아빠…. 저마다 다른 삶의 궤적을 그리던 이들은 2014년 4월16일 ‘생존자’라는 이름으로 묶였다. 공통점이라곤 같은 날, 같은 시각, 같은 배를 탄 것뿐이었다. 누군가는 이들의 ‘생존’에 안도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들에겐 ‘생존 이후의 삶’이 남았다.

9년 하고도 넉 달, 3432일이 지나는 동안 이들 사이엔 공통점이 늘어갔다. 누구도 그날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불면증과 두통에 시달리는 밤이 많았다. 약을 먹지 않으면 심장이 쿵쿵댔다. 작은 일에 화가 치밀었다. 세상 사람들이 사정을 모르고 내뱉는 말이 상처로 남았다. 관계가 하나둘 끊겼다. 다시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만 같은 트라우마 증상이었다.

이들은 노력했다. 살아보려고 병원을 열심히 다녔다. 다시 일하려 했다. 이를 악물고 정신의학과 약을 끊어보려고도 했다. 가정의 가장으로, 직장의 동료로 돌아가려는 시도였다. ‘차라리 죽는 게 나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 때마다 억누르려 했다. 노력이 무색하게 병증은 나아질 만하면 다시 도졌다.

제주 세월호 생존자 15명은 살기 위해 소송을 시작했다. 세상의 손가락질이 두려워 소송을 결심하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살기 위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정부는 2015년 약 4년치 장애가 예상된다는 소견을 토대로 보상금을 지급했다. 그러나 4년이 두 번 지나고 2023년이 되어도 트라우마가 할퀸 일상은 회복되지 않았다.

제주지방법원에서 소송 중 진행한 이들의 신체감정 진단서에는 과거의 소견과는 전혀 다른 결과가 적혔다. “향후 5년간 치료가 필요하고, 5년 뒤에도 (증상에 대한) 재판정이 필요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과거 병증이 나아질 때쯤이라 내다봤던 2019년은커녕 2028년까지 트라우마가 예상되고, 그 후로도 치료가 필요할 수 있다는 뜻이다.

시간이 약이라지만 세월호 생존자들이 겪는 트라우마는 시간을 비껴가는 듯했다. 생존자들은 매년 4월이 다가올 때마다 힘이 든다고 말한다. “병증에 주기가 있더라고요. 4월이 저희 몸에 밴 것 같아요.” 이들이 법정에서 묻는 것은 지난 9년간 길거리에서, 국회에서 수백 번 되풀이해온 질문과 같다. 재난 상황에 국가의 역할은 무엇인가.

국가는 진상조사와 피해구제 대신 회피와 여론 조작으로 응답해왔다. 참사를 정쟁화해 생존자들을 손가락질 끝으로 내몰았다. 피해 회복은 고사하고 생계부터 막막했다. 법정은 이들이 내몰린 끝에 다다른 도착지였다. 세월호 생존자들은 언제쯤 몸에 밴 4월의 그 날을 씻어낼 수 있을까. 경향신문은 지난달 25일 제주도에서 세월호 생존자들을 만났다. 입수한 신체감정 결과를 토대로 현재진행형인 트라우마와 소송에 대해 들었다.

내가 저지른 가장 큰 잘못은 ‘이사’

5년 걸린 결심이 무너진 건 30분 만이었다. 참사 이후 다시 화물차 운전대를 잡는 데 5년이 걸렸다. 목포 가는 배에 화물차를 탄 채 올라타자 식은땀이 절절 났다. 물속에서 헤엄쳐 나오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30분 뒤 쓰러졌다. 정신은 멀쩡한데 몸이 먼저 반응했다. 일하려면 어떻게든 배를 타야 했다. 고안해낸 방법은 ‘기절시키기’였다. 배에 오르기 30~40분 전 수면제를 잔뜩 먹었다.

“그 약 먹으면 기자님은 3일 동안 못 깨어날걸요. 독해서요. 그런데 이 독한 약을 먹어도 잠이 안 올 때가 있어요. 그러다 보면 막 식은땀이 나요.” 평소에도 잠을 못 잤다. 불을 끄면 불안함이 밀려왔다. 미처 구하지 못한 학생들 생각에 죄책감을 떨칠 수 없었다. 겨우 잠이 들면 악몽이 시작됐다.

2014년 4월16일 ‘마지막 탈출한 세월호 생존자’로 불리던 화물차 기사 윤길옥씨 이야기다. 그는 다쳐가면서도 학생들을 대피시켜 의상자로도 인정받았지만 ‘생존’ 이후 그의 삶은 쭉 순탄치 않았다. 누군가는 10년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세월호 얘기냐고 할지 모르지만, 트라우마는 낯선 얼굴로 생존자들을 찾아왔다. 불쑥 따라붙어 일상을 뭉갰다.

배가 침몰할 때 화상을 입은 발은 계절과 무관하게 시렸다. 한여름에도 양말을 신고 잠을 청했다. 한 번 인대가 끊어져 버린 어깨는 세 차례 수술 후에도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가족과도 뿔뿔이 흩어졌다. 병원 생활 3년, 술에 기대 겨우 하루하루를 버틴 2년을 지나왔지만 먹고 자고 일하는 ‘가장 보통의 삶’은 여전히 어렵다.

백종우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장(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은 “일반 사람들 입장에선 10년이 지났으면 괜찮지 않을까 싶을 수 있지만,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라는 건 스트레스로 악화 또는 만성화되면 장기간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장해와는 상당히 다른 특성이 있다”고 했다.

올해 윤길옥씨의 정신건강 상태를 감정한 병원은 ‘무기력·우울감이 만연 상태로 지속’ ‘자기비하와 자기회의 척도가 높은 수준’ ‘사소한 외부 자극에도 불쾌한 정서가 쉽게 촉발될 수 있음’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제주도 사투리로 호방하게 말하고, 본인을 이른바 ‘기절’ 시켜가며 트라우마와 맞서는 것처럼 보이던 윤씨는 신체감정 당시 문장완성형 검사에서 ‘내가 두려워하는 것 물’이라고 적었다.

김병규씨는 세월호 참사 트라우마를 “평생 겪고 살아가야 할 것”이라고 표현한다. 40년간 다니던 인천의 직장에서 정년퇴직한 김씨는 제주도에서 인생 2막을 꿈꿨다. 김씨 부부가 이사하는 날 오른 배가 하필 세월호였다. 갑판 위로 신속히 나와 목숨은 구했지만, 많은 것을 잃었다. 바다를 좋아해 바닷가 코앞으로 이사를 왔지만 9년째 바라만 본다. 몸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발을 담가본 적도 없다. 그저 그리운 마음에 바다를 그려볼 뿐이다.

김씨와 불면·우울·불안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됐다. 그는 정신의학과 약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게 속상하다고 했다. 하루에 먹는 약 종류만 4개. 그나마 오랜 기간 줄이고 줄인 게 그렇다. 건물에 들어갈 때면 도망갈 수 있는 길을 미리 파악해놓는 습관이 생겼다. 자녀들도 달라졌다. 김씨 부부가 하루라도 연락이 잘 안 되면 불안감에 떨었다. 김씨는 “원래 정상적인 사람이었는데 왜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억울하다”며 “생존자는 살아있는 동안 고통 속에 있을 것”이라고 했다.

제주도 세월호 생존자 김병규씨가 그린 바닷가 풍경. 김씨는 사고의 트라우마로 물이 두려워 바다에 몸을 담그지 못하면서도 “바다가 그리워 그림이라도 그리고 있다”고 했다. |제주·김혜리 기자

참사 이후 외상성 사건에 대한 재경험, 회피행동, 자율신경계 과각성, 우울감 및 불안감, 사고와 연관된 악몽 및 이로 인한 수면 유지의 어려움…. 신체감정서에 김씨가 겪는 정신과적 증상으로 나열된 것들이다. 9년 전 이사를 결정할 때만 해도 김씨와 아무런 관련 없는 말들이었다. 김씨는 세월호 생존자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상태일 것이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김씨가 바라보는 미래도 밝진 않다. 감정서엔 이런 내용이 담겼다. ‘현재 자기확신과 효능감이 급격하게 저하된 상태로 미래에 대한 무망감(hopelessness)이 만연해 내적 고통이 상당해 보인다.’ 무망감은 노력과 의지에도 미래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일종의 좌절감에서 비롯된다. 삶의 희망을 느끼지 못한다는 뜻이다.

외딴섬의 생존자들

제주 세월호 생존자들의 정신 건강 상태를 기록한 신체감정서에는 대인관계 및 외부활동에 위축된 양상이라는 진단 내용이 공통으로 담겼다. ‘외부 세상에 대한 예민성이 고조돼 있는 상태로 쉽게 불안과 초조감이 활성화되는 양상’ ‘주변 세상에 대한 시니컬한 태도를 취하기 쉽다’ ‘내적으로는 외로움과 소외감을 높게 경험해왔을 것으로 보인다’ 등이다.

‘인간관계의 단절’은 생존자들이 공통으로 겪는 또 다른 어려움이다. 윤씨는 제주도에서 나고 자랐지만 동창회나 친구들이 모이는 자리에 더는 나가지 않는다. 참사 직후 위로의 말을 건네던 지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윤씨가 겪는 트라우마를 이해하지 못했다. ‘아직까지 그걸 갖고 그래’ 같은 말들을 윤씨는 견딜 수 없었다. “(생존자들은) 완전히 격리됐다고 봐야 해요.” 윤씨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김씨는 사고 이후 전화번호를 바꿨다. 그는 “사고 후 주변 사람들을 만나면 돈 얘기부터 했다. ‘얼마나 받았냐’는 거다. 몸이 괜찮은지는 묻지도 않는다”며 “그게 제일 힘들어서 아주 담을 쌓고 사는 것”이라고 했다. 김씨는 예전에 좋아하던 낚시 등 취미활동도 전부 그만뒀다. 세월호와 트라우마 얘기를 편안하게 할 수 있는 건 생존자들끼리 뿐이다.

세월호 기억공간 외벽에 매단 노란 장미. 권도현 기자

생존자들을 위축시키는 사람들의 시선은 참사 이후 책임을 모면하려 갖가지 애를 쓴 박근혜 청와대의 행위에서 비롯됐다. 참사 초반 피해자를 적절히 지원하자는 태도였던 당시 청와대는 구조 실패에 대한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이를 회피하는 데 힘을 쏟았다. 피해자들의 피해 구제 요구를 ‘반정부 행위’로 규정하고 생존자들과 유족 등을 사찰·관리 대상으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순수한 유가족’과 ‘강성 유족’을 구분해 갈라치는 전략이 이용됐다. 진상규명과 피해구제를 요구하는 유족과 생존자들에겐 ‘불온세력’ 등 입에 담지 못할 낙인이 찍혔다. 청와대가 주도한 여론전은 생존자들에게 2차, 3차 피해를 입혔다. 사회적으로는 ‘순수한 피해자’가 따로 있다는 그릇된 인식이 강화됐다. 제주 세월호 생존자들의 마음을 후벼파는 ‘세금도둑’ 같은 프레임도 이때 뭇 사람들 인식에 자리 잡았다.

사참위는 ‘4·16 세월호 참사 종합보고서’에서 “국정원과 기무사, 경찰 등 정보기관은 세월호참사 피해자들을 지원과 위로가 필요한 대상이 아니라 국정 부담의 요인으로 보고 관리 대상으로 삼았다”며 “(이들은) 정보를 주고받으며 세월호 참사 피해자들의 진상규명 요구는 곧 배후 세력에 의해 조종당한 반정부 요구라는 인식을 상호 강화했다”고 지적했다.

세월호 참사 시기별 정보기관 정보보고와 청와대 대응. 사참위 ‘4·16 세월호 참사 종합보고서’ 갈무리

백종우 교수는 “이처럼 참사가 정쟁화된 분위기가 오히려 생존자들 고통을 가중하는 측면이 있다”며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는 정책적 대처와 생존자들에 대한 최대한의 지원을 기반으로 치유가 가능한데 그렇지 못한 사회적 상황은 트라우마를 심화시킬 수 있다”고 했다.

9년이란 시간이 흐르는 동안 법원은 기무사가 직무와 무관하게 세월호 유가족 등의 인적 사항과 정치 성향 등을 사찰해 보고한 점을 ‘2차 가해’로 인정해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세월호 유가족을 불법 사찰한 기무사 간부 6명은 2018년과 2019년 재판에 넘겨져 1·2심에서 유죄 선고를 받았다.

잘못은 국가가 했지만 괴로움은 피해자들 몫이었다. 제주 세월호 생존자들은 지인뿐 아니라 가족들과도 멀어졌다. 참사 당시 윤씨 아들은 막 성인이 된 나이였다. 그는 취업도 미루고 윤씨를 간병하다 직업군인이 됐다. 사람들이 보기 싫다고 했다. 당시 고등학생이던 딸도 덩달아 트라우마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딸은 윤씨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정신과 약을 복용 중이다.

윤씨의 신체감정서에는 ‘대인 예민성과 적대감 척도가 상승해 현재 외부 세상에 대한 예민성과 경계심이 팽배하다’ ‘주변인들로부터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끼며 짜증과 분노, 외로움과 답답함 등을 경험하고 있다’ ‘외상적 경험 이후 가족 내 갈등과 고통감도 높다’고 적혔다.

제주 세월호 생존자들은 인터뷰하는 동안에도 걱정이 앞섰다. 생존자들을 모아온 ‘제주세월호생존자와 그들을 지지하는 모임’(제생지) 대표 오용선씨는 “국가배상 소송을 해도 문제”라며 “승소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지인들로부터는 또 분명히 안 좋은 소리가 나올 것”이라고 했다. “10년 가까이 해본 경험상 뻔합니다. 패소하면 사람들한테 욕이나 먹고 괜히 했나 생각이 들 것 같기도 해요.”

계속되는 아픔, 위태로운 지원
제주세월호생존자와그들을지지하는모임(제생지) 회원들이 모여 주먹을 맞대고 있다. |제주·김혜리 기자

제주도라는 물리적 환경도 이 섬에 사는 세월호 생존자들의 고통을 더했다. 참사 직후 이들에 대한 피해 구제는 사망자와 유가족, 그다음 순서에 가까웠다. 워낙 큰 참사다 보니 ‘일단 그래도 살아남았으니 된 거 아니냐’는 주변 시각을 당시엔 일단 감내해야 했다. 시간이 지나 매년 4월16일이 다가오면 언론에서 인터뷰를 요청해와 괴로운 기억을 떠올리며 응해줬지만, 이들이 참사 이후 살아가는 일상의 면면까지 살펴보고 이해해주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안산에는 생존자와 유족 등을 지원하기 위한 온마음센터가 마련돼 전문적인 심리지원 등 서비스를 지원했다. 제주도에 사는 이들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그나마 제주도엔 2015년 2월부터 제주세월호피해상담소가 생겼다. 생존자들은 이곳에서 미술과 운동 치료 등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상담소는 치료뿐 아니라 남들과 담쌓고 지내는 생존자들이 서로 만나 터놓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마저도 언제 없어질까 불안하다고 이들은 말한다. 피해상담소의 예산은 전액을 제주도에서 지원한다. 생존자들이 중앙 정부 차원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여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했다. 피해상담소는 2~3년 주기로 운영의 필요성 등을 검토해 예산 지원 여부가 정해지는 탓에 지원 사업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김병규씨가 말했다.

“내년이나 내후년에 갱신이 안 돼서 지원이 없어지면 또다시 방황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게 가장 걱정돼요. 우리는 모여서 이야기를 하는 이 상담소가 제일 필요한 것 같거든요. 도의회에서 상담소에 온 적이 있어요. 그때 마지막 한 명이 둥지(피해상담소)를 떠날 때까지 상담소를 유지해주면 고맙겠다고 빌었어요.”


☞ 제주 생존자가 국가 상대로 싸우는 이유[여전히, 세월호]
     https://n.news.naver.com/article/032/0003247600?type=journalists


☞ 유효기간 있는 ‘한국’ 트라우마? 해외는 어떤가[여전히, 세월호]
     https://n.news.naver.com/article/032/0003247599?type=journalists

김희진 기자 hjin@kyunghyang.com, 김혜리 기자 ha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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