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좋은 직장을 왜?”…한국인 최초 OECD '철밥통' 버리고 독하게 창업한 이유 [커리업]

박지윤 2023. 9. 6.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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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땅브레이커<6> 정지은 코딧 대표
열일곱에 홀로 유학…한국인 최초 OECD 분석관 꿰차
수억 연봉 대신 ‘월급 100만원’ 외교부 인턴
유네스코 거쳐 OECD 정년 보장 테뉴어까지  
'황금 감옥' 부수고 정책데이터 스타트업 창업
내 역량이 가장 뜻깊게 기여될 수 있는 곳으로
편집자주
'현대인의 일'을 탐구하는 콘텐츠 실험실 커리업이 시즌2를 시작합니다. 시즌2에서 커리업은 지난해 연재한 '일잼원정대'를 잇는 새로운 인터뷰 시리즈 '맨땅브레이커'를 내놓습니다. 자신만의 궤도를 맨땅에 헤딩하며 개척한 퍼스트 펭귄의 커리어 이야기를 다룹니다.
정지은 코딧(CODIT) 대표가 8월 25일 서울 강남구 사무실에서 커리업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한호 기자 han@hankookilbo.com

OECD라는 황금 궁전을 깨고, 스타트업 진흙탕에 뛰어들다

25세의 아시아인 여성. ‘백인 남성 엘리트’가 기본값인 OECD에서 이 사람의 정체성은 마이너리티 그 자체였습니다. 어디를 가나 의심으로 가득 찬 시선이 따라다녔죠. ‘네가 뭔데 그 자리를 차지하고 서 있느냐’고. 자격을 증명하기 위해선 언제나 특별히 빼어나야 했습니다. 일반적이지 않은 자격의 사람은 일반적이지 않은 수준으로 뛰어나야 겨우 ‘이례(異例)적 케이스’가 될 수 있으니까.

이 사람, 정지은씨의 커리어 패스는 줄곧 그랬습니다. 누가 먼저 닦아 놓은 탄탄대로를 걸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온몸에 흙먼지를 묻혀가며 제 손으로 다리를 놓았죠. 건너온 다음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도록 제 손으로 불태워 버렸습니다. 황금 궁전이나 다름없었던 꿈의 직장 OECD를 버리고 난생처음 스타트업판에 뛰어들었을 때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우아한 엘리트들의 표백된 세계를 벗어나 ‘진흙탕’과 다름없는 창업 세계에 떨어져도 ‘난 살아남을 수 있어’라는 자신감이 있었거든요. 여태껏 그렇게 가시밭길의 가시를 꺾으며 걸어왔으니까.

자신만의 궤도를 맨땅에 헤딩하며 개척한 퍼스트 펭귄의 커리어 이야기, ‘맨땅 브레이커’의 6호 인터뷰이는 폴리테크 스타트업 ‘코딧’을 이끌고 있는 정지은 대표입니다.

정지은 코딧(CODIT) 대표가 서울 강남구의 코딧 사무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한호 기자 han@hankookilbo.com

Chapter1 궁극의 ‘독기캐’, 남들은 다 그냥 하는 게, 하나도 당연하지 않았다

#S1 어떤 비범한 중학생의 질문
오지선다형 문제의 정답은 3번,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생각하는 답은 4번. 어지간한 중학생이라면 “좀 억울해도 이게 답이라는데 어떡해” 하고 넘어갔겠지만 이 소녀에겐 택도 없었다. 출제자를 찾아가 끈질기게 물었다. ‘우리가 배운 대로라면 4번도 답이에요. 선생님, 이렇게 알려주셨잖아요.’ 끝까지 묻고 캐서 결국은 4번도 답이 되게 만든다.

열다섯의 지은에게 학교라는 세상은 온통 ‘납득이 가질 않는 곳’이었다. 끊임없이 외워서 욱여넣고, 채점이 끝나면 모조리 털어 폐기 처분하는 기묘한 반복이 ‘배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곳.

‘이게 맞아요? 이게 배우는 거예요?’ 그가 물으면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지은아, 질문 좀 그만해.’ 남들은 묻고 따지지 않는 것들, 원래 그런 것이라 여기는 것들을 그는 한 번도 당연히 여기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겼다. 자꾸 묻고 따졌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이 있는 힘껏 그의 뺨을 내려쳤다. 동급생들이 모두 지켜보는 앞에서, 단지 질문을 해서 자신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는 이유만으로. 이것이 그가 유학길에 오른 이유였다.

지은씨는 부모에게도 쉬운 딸이 아니었습니다. “일단 대학부터 가서 생각하면 안 되겠느냐”는 구슬림도 통하지 않았죠. 절대로 중간에 돌아오지 않겠다는 조건을 1번으로, 반드시 현지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조건을 2번으로 내걸어 직접 부모님과 합의까지 본 그는 제 손으로 짐가방을 싸기 시작합니다. 혼자 유럽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고, 그렇게 난생처음 영국 땅에 떨어지죠. 당시 지은씨의 나이는 열일곱이었습니다.

유학 생활은 한마디로 ‘박살이 나는’ 경험이었다고 해요. 자신 있었던 영어는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죠. 주말이면 학생들이 모조리 빠져나간 국제학교 기숙사에 혼자 남겨졌습니다. 옆자리 친구에게 말 한마디 붙이는 것도, 텅 빈 기숙사를 지키며 월요일을 기다리는 것도 괴로웠죠. 눈물 바람에 당장 돌아오고 싶다며 부모부터 찾아도 이상할 것 없는 나이였지만, 열일곱 살의 지은씨가 가장 먼저 한 것은 한국에 있는 부모님과의 연락을 끊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영어가 들릴 때까지 한국어로는 말하지도 듣지도 쓰지도 않는다는 독한 원칙을 세운 겁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은 이미 불타 없어져 버렸다고 생각했죠. ‘여기서 살아남지 않는 이상, 다른 길은 없는 거다.’

“얼마나 절박했냐면 교감 선생님을 직접 찾아가 설득했어요. 다른 수업을 빼고 저학년 영어 수업으로 채워 달라고. 전 10학년이었지만, 언어가 한참 모자라니 동급생들이 듣는 모든 수업을 따라갈 수가 없었거든요. 규정상 그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래요. 계속 찾아가서 끈질기게 매달렸어요. 이렇게 안 하면 난 이 학교 더 못 다닌다고. 결국 예외가 허용돼서 저는 영어 수업만 4개를 듣게 됐죠.

기숙사 학교는 밤 10시면 불이 다 꺼져요. 유일하게 불이 켜지는 곳은 샤워실이죠. 처음엔 샤워실 가서 공부하다가 나중엔 건전지를 갈아 끼울 수 있는 손전등을 샀어요. 그거 켜고서 새벽 4시까지 공부했죠. 딱 3개월이 지나니까 그제서야 말이 조금씩 들리더라고요.”

여기서 더 놀라운 건, 그로부터 1년 후에 학생회장이 됐다는 겁니다. 선거운동을 도와 달라며 친구들에게 말을 걸었을 때, 그들은 ‘너의 장래 희망을 응원한다’며 엉뚱한 대답을 했죠. ‘프레지던트(president)가 되고 싶어’라는 그의 말을 ‘언젠가 대통령이 되고 싶다’는 뜻으로 받아들인 거였습니다. ‘school president’(학생회장)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거죠. ‘아니 네가 도대체 어떻게?’라는 시선이 파다했지만, 그는 같은 학교를 10년 이상 다닌 다른 친구들을 제치고 당선됐습니다. 자신보다 어린 학년의 친구들과 함께 영어 수업을 들으며 두루두루 ‘표심’을 살펴 놓은 결과였죠.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영국 전역의 성적 우수 학생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우등생 커뮤니티 ‘내셔널 아너소사이어티’에 들어갔고, 대학 입학 당시엔 영국의 국제학교 졸업생들이 보는 ‘수능’인 IB(International Baccalaureate) 영어 과목에서 만점을 받았습니다. 돌아가는 길을 불태워 버렸다는 절박한 결기가 엔진을 풀가동할 수 있는 연료가 된 셈이었죠.

10대 시절의 지은씨는 그런 아이였습니다. 무리 속에 섞어 놓으면 반드시 맨 앞에 가 있어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 자신을 가혹하게 몰아세울 수 있는 셀프 엔진을 타고난 아이, 그 엔진을 쉬게 하는 법 없이 언제나 풀파워로 돌리는 아이. 도무지 힘 빼는 법을 몰랐던 10대 시절의 그는, 모든 순간 앞에서 ‘두 번째 기회는 없다’는 생각으로 달려들었습니다. 부모가 물려준 수저가 아니라 직접 찾아 든 삽으로 자기의 길을 개척했죠.

#S2 월급 두자릿수 외교부에 들어간 이유
런던의 한 명문대에서 정치경제학을 공부하고 졸업했다. 함께 공부한 동기들은 수억 원의 연봉을 보장하는 컨설팅 회사와 투자은행에 취직했다. 지은은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월 급여가 100만 원도 안 되는 외교부에서 인턴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만난 부모님은 근심을 숨기지 않았다. 유학까지 다녀온 애가 도대체 저런 박봉을 받으며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며, 월급 두둑이 챙겨주는 그럴듯한 회사에 안착하지 않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냐 캐물었다.

의심 반, 걱정 반인 잔소리 속에서도 공공 부문(Public Sector)에서 일하겠다는 그의 고집엔 흔들림이 없었다. 남들이 뭐라고 하건, 스스로 설득된 결정엔 의심을 제기하지 않는 것. 그게 그만의 원칙이었다.

컨트리뷰션(Contribution), 업생을 회고하는 지은씨의 입에서 가장 많이 나온 단어입니다. ‘기여’라는 뜻이죠. 지은씨에게 ‘돈을 얼마나 벌 수 있는가’, ‘얼마나 안정적인 복지를 보장받을 수 있는가’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중요했던 건 ‘내 쓸모는 무엇인가’, 더 나아가 ‘내 역량이 가장 뜻깊게 기여될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였죠. 그에게 공공 부문은 한 명의 개인으로서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기업의 영향력은 제품을 산 소비자에게만 닿습니다. 정부의 영향력은 나라의 국민 전부에게 미치죠. 더 넓고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곳에서 그 힘에 상응하는 책임을 업는 것이야말로 그가 따르고자 하는 길이었던 겁니다.

지은씨는 외교부 인턴을 마치자마자 행정대학원에 들어갑니다. 한국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할 수 있는 연결고리를 만들기 위해서였죠. 하지만 막상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다 보니 선택지는 축소되고 또 축소됐습니다. 동기들이 생각하는 커리어 패스는 둘 중 하나였어요. 행정고시를 패스해 공무원 조직의 일원이 되거나, 정책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 연구원이 되거나, 변주의 여지가 없는 ‘이지선다’였죠.

그런 와중에 의심은 커져갔습니다. 현직으로 일하고 있는 선배들을 만나면서 알게 됐거든요. 한국의 공직 문화에선 ‘상명하복’이 섭리처럼 여겨진다는 것, 누구도 중력의 법칙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듯, 이 수직의 질서를 거스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요. 그러니 한 명의 공직자가 발휘할 수 있는 영향력은 터무니없이 작았습니다.

또 한번 뭔가가 박살 나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모범생의 오류에 빠진 거였죠. 누구보다 빠르게, 누구보다 완벽하게 준비해 지름길로 들어선 줄 알았는데, 목적지부터가 틀린 거였어요. 돈도, 명예도 아닌 영향력을 좇아왔지만, 정작 이곳에 그가 찾고자 했던 것은 없었습니다.

정지은의 나머지 이야기 (chapter2, chapter3, chapter4, Epilogue)는 아래 커리업 전용 인터랙티브 페이지에서 이어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 URL 주소로 초대합니다. ☞ https://careerup.hankookilbo.com/v/2023090601/
(링크가 클릭되지 않으면 URL을 주소창에 입력하세요.)

[커리업] 맨땅브레이커 6회 주인공 정지은 코딧 대표의 다양한 갤러리를 만나보세요. 김유진 기자 zoeyful@hankookilbo.com
커리업의 인터뷰 연재 '맨땅브레이커'
커리업 '맨땅브레이커'는 자신만의 궤도를 맨땅에 헤딩하며 개척한 퍼스트 펭귄의 커리어 이야기를 다룹니다. 커리업이 제공하는 독자적인 비주얼 스토리텔링을 아래의 URL에서 만나보세요.

커리업 맨땅브레이커 1회 남세동 편 - 깨져야 열린다 새로운 세계가
http://careerup.hankookilbo.com/v/2023051001/

커리업 맨땅브레이커 2회 남우리, 송재원 편 - 우린 ‘좋’대로 만들어
http://careerup.hankookilbo.com/v/2023052401/

커리업 맨땅브레이커 3회 김훈 편 - 길 위의 셰프, 칼로 세계를 흡수하다
http://careerup.hankookilbo.com/v/2023061401/

커리업 맨땅브레이커 4회 백은하 편 - 한국 영화의 오래된 목격자, 최초의 배우학 연구자가 되다
https://careerup.hankookilbo.com/v/2023072601/

커리업 맨땅브레이커 5회 김결희 편 - “그런 수술하다 지옥 가요” 잘 나가던 성형외과의에서 ‘트랜스젠더’ 의료계 투사로
http://careerup.hankookilbo.com/v/2023081601/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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