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향·출향의 유구한 역사, 그리고 홍범도 [노원명 에세이]

노원명 기자(wmnoh@mk.co.kr) 2023. 9. 3.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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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상주시 도남동에 있는 도남서원은 경상우도를 대표하는 서원이다. 안동·예안권(경상좌도)을 대표하는 도산서원과 더불어 그 위상이 우뚝하다. 이곳에는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 노수신, 류성룡, 정경세, 이준 등 영남 학맥의 종장(宗匠)으로 추앙받는 인물들의 위패가 대거 봉안돼 있다.

이 사원이 1606년 처음 세워질 때는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 등 논란의 여지가 없는 영남 오현(五賢)만을 모셨다. 노수신 이하는 본인 사망후 지역 사림들의 의논(자격심사)과 합의를 거쳐 추가로 배향된 인물들이다.

최초 추향(追享)된 노수신(1515-1590년)은 서원 건립후 10년이 지난 1616년에야 배향 논의가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그의 배향 자격을 놓고 사림의 의논이 일치하지 않았던 탓으로 볼 수 있다. 노수신은 15세기 이래 상주에서 번성한 집안 출신으로 지역 기반이 튼튼했고 대제학을 거쳐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그러나 이 드물게 ‘출세’한 선배를 바라보는 고향 후배들의 시선은 좀 복잡했다.

노수신은 당대의 문장가였지만 당시 지배 이념인 주자학이 터부시했던 양명학에 심취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또한 말년에 조선사상 최대 모반 사건의 주동자인 정여립을 천거한 이유로 영중추부사에서 파직, 탄핵당했다(사후 영의정으로 복권되었다). 보다 결정적으로는 퇴계 이황과 세계관이 약간 달랐다. 퇴계보다 14세 연하인 노수신은 젊어서부터 퇴계와 서신 왕래를 했는데 주자학적 기본에 충실했던 초기에는 퇴계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노수신이 을사사화 이후 20년에 가까운 유배 생활을 거치는 동안 양측의 관점이 조금씩 갈라졌다.

1616년에 노수신 집안 사람들과 그를 추앙하는 문인들, 현직 상주목사 등이 노수신의 도남서원 봉안론을 꺼내 들었을 때 퇴계의 학문적 직계들이 밀집한 영남좌도의 반발이 특히 거셌다. ‘퇴계와 동급에 놓을 수 없다’고 불쾌해 했고 상주목사가 나선 것을 두고는 ‘벼슬을 위세로 사적 은혜를 갚으려 한다’고 비난했다.

상주 현지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류성룡의 가르침을 받아 도남서원 건립을 주도한 정경세는 노수신의 고향 후배이지만 류성룡에게서 배워 퇴계학맥의 도통을 계승한 인물이다. 그는 문서에서 노수신을 언급할 때 선생(先生) 대신 공(公)으로 칭했다. 학자 대신 관료로만 인정한다는 의미다.

논란끝에 1617년 노수신은 도남서원에 봉안되었으나 그것은 앞서 5현과 동급의 배향이 아니라 위패를 그 아래에 두는 종향(從享)이었다. 일종의 절충안이었던 것이다. 그가 5현과 동급으로 올라간 것은 1631년 그보다 약 한세대 아래인 류성룡을 배향할 때였다. 이때 노수신의 위패 상향을 주장하는 세력들은 ‘류성룡이 학문과 관직의 대선배인 노수신을 존경했다’는 류성룡 후손들의 증언까지 끌어오며 이를 관철했다. 당대 상주지역 최대 발언권자였던 정경세는 이때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노수신의 후손들과 추종자들이 그의 문하로 이미 M&A된 이후였기 때문이다. 영남 천지에 퇴계학만이 오롯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더 이상 노수신을 배척, 격하할 이유가 없었다.

한 인물의 배향을 놓고 갑론을박하는 풍경은 조선시대 사림 세계에서는 자주 있는 일이었다. 국가대표급 인물을 배향하는 문묘배향에 이르면 그 자체가 거대한 이념투쟁이자 정치행위가 된다. 정국 주도세력이 바뀌면 기존 배향인물의 위패가 쫓겨나기도 하고(출향), 권력이 또 뒤집히면 다시 놓이는(복향) 일이 비일비재했다. 문묘배향은 현실 정치에서의 승리를 역사적 승리로 못 박으려는 의식과도 같았다.

[사진 = 연합뉴스]
육사 홍범도 동상 논란을 조선시대 문법으로 말하자면 홍범도는 문재인 정부 때 ‘문묘에 배향’되었다. 그의 배향을 놓고 당색을 달리하는 사람들은 시끌시끌하였다. 그새 환국이 벌어져 이제 그 홍범도의 위패를 내치려 한다.

나는 지난 정부의 홍범도 유해봉환을 마뜩잖은 심사로 지켜보았다. 정치적 목적이 너무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그때도 조선시대 문묘 출향·복향의 굴곡진 역사를 생각했었다. 세월은 변해도 사람들의 행태는 쉬 변하지 않는다. 산 자들의 권력투쟁에 죽은 이들이 동원되는 것은 이 땅에서 오래된 관습이다.

그러나 행태가 변하지 않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의 본질은 홍범도의 활용 가치가 여전한 정치 현실에 있다. 문재인 정부는 홍범도의 배향을 통해 대한민국 건국세력 중심의 독립운동사, 나아가 현대사를 고쳐쓰려 했다. 그것은 좌측에 선 사람들의 가슴을 부풀게 했을 것이다. 윤석열 정부는 홍범도 출향으로 그런 좌파의 기도를 분쇄하려 한다. 이번에는 우측에 선 사람들이 결의를 다지고 있다.

이는대한민국이 건국된지 75년이 지났지만 아직 건국의 시점을 놓고도 의견이 갈릴 만큼 대한민국을 바라보는 시선이 상충하는 현실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꽤 많은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출발 자체를 유감스러워 하는 역사인식을 갖고 대한민국에서 살아간다. 이런 국민이 일정 수 이상 존재하는 상황에선 ‘홍범도’를 정치 이슈화하려는 정치 기획이 상시로 작동하게 돼 있다. 절대다수가 대한민국을 자랑스러운 역사로 공감하는 사회가 되면 ‘홍범도’ 정도는 별 논란 없이 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17세기 영남의 퇴계학 추종자들이 노수신의 도남서원 배향을 수용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기엔 대한민국이 아직 불안하다. 나라가 이렇게 커졌는데도 여전히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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