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행복하개"…두 할머니와 책방 주인의 '누렁이 육아기'[인류애 충전소]

남형도 기자 2023. 9. 2.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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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던 날 차에 뛰어든 누렁이, 책방 주인과 동네 두 할머니가 힘 합쳐 '공동 육아'…"누군가를 살아가게 하는 건 뜨거운 마음이 아니라 미지근한 마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편집자주] 세상도 사람도 다 싫어지는 날이 있습니다. 그래도 어떤 날은 소소한 무언가에 위로받지요. 구석구석 숨은 온기를 길어내려 합니다. 좋은 일들도 여전하다고 말이지요. '인류애 충전소'에 잘 오셨습니다.

풀숲에 파묻혀 활짝 웃는 강원도 고성 바닷마을 개 럭키. 길에서 떠돌다 죽을뻔한 걸 살려준 이들을 럭키가 바라본다. 이어서 웃는다. 무더운 여름에도 곁에서 함께 걸어줘서 고맙다고. 기쁘다고./사진=북끝서점 주인 김상아씨
봄비가 막 쏟아지려던 올해 사월이었다. 오후 4시, 바다가 가까운 작은 책방 문이 닫혔다. 북끝서점. 여기, 강원도 고성이 북쪽 끝이기도 하고, 여기서 책을 샀다면 끝까지 다 읽길 바라며 오래 마음 쓴 이름. 책방 주인 상아씨가 자신의 차에 올랐다.

가족이 기다리는 서쪽으로 향하던 퇴근길. 갑작스레 불행이 동동동동 뛰어들었다. 차 앞을 가로막은 건 누런 털에 두 귀가 풀죽은듯 내려온, 동네 누렁이였다.

상아씨가 잠깐 차에서 내렸다. 강아지가 쫄쫄 다가왔다. 그의 몸에, 작고 마른 몸을 부대꼈다. 해석이 불필요한 반가움이었다.

그때였다. 일명 '자크 할머니(별명)'라 불리는 동네 횟집 어르신이 허둥지둥 달려왔다. 그는 다급히 말했다.

"마침 잘 만났네. 이 누렁이가 글쎄 며칠 전에 나타났지 뭐야. 온 동네에서 엊어맞고 다녀. 이대로 두면 개장수한테 끌려갈 거야. 얼마나 가여워…."

할머니는 상아씨에게 부탁했다. 하루만 맡아줄 수 있느냐고. 그럼 개가 지낼 곳을 알아보겠다고.

상아씨와 처음 만난 날, 뒷좌석에 탄 럭키. 풀이 죽은듯 고개를 숙이고 있다. 어쩌면 잔뜩 긴장하며 살다 처음 안도해 고단함이 밀려온 것일지도./사진=북끝서점 주인 김상아씨

낯선 이조차 반갑다며 궁둥이를 기대는 개. 랩을 하듯 분주한 걱정을 쏟아내던 할머니. 상아씨는 별수 없이 누렁이를 뒷좌석에 태웠다. 룸미러로 개와 눈이 자주 마주칠 때 다짐했다.

'딱 하루만이야.'

책 읽는 시간 뺏은 '누렁이'가 미웠다
북끝서점 손님들과 인사하는 럭키. 귀염둥이. /사진=북끝서점 주인 김상아씨
일러스트레이터 '키크니'님 SNS에서 그 누렁이 얘길 봤다. '럭키'란 이름도 생겼고, 상아씨두 할머니가 6개월째 돌보고 있단 거였다. 어쩌면 길에서 스러졌을 럭키는 어떤 힘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 걸까. 이를 듣고 싶어 북끝서점을 찾았다. 너무 멀리서 왔다고, 아침은 먹었느냐며 상아씨가 방울토마토와 부모님표 단호박을 내어주었다.

형도 : 누렁이가 지낼 곳이 잘 찾아지지 않았겠지요. 아마도요.
상아 : 첫날은 집에서 재우고 씻겼어요. 하루가 이틀이 되고, 보름이 지나가는 거예요. 자크 할머니가 여기저기 찾아보긴 했는데 다 무산됐고요. 집엔 강아지 알레르기 있는 가족이 있어서, 함께 둘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책방 뒤뜰에서 지내게 했지요.

안온한 서점의 전경. 뒤뜰에서 럭키가 잠시 지냈었다./사진=남형도 기자

형도 : 불행이 찾아왔다고 표현하셨잖아요. 솔직함인 거지요. 잘 알아요. 내칠 수도 없고 맡긴 버거운 그 마음.
상아 : 책방도 제 건물이 아니니 주인이 싫어할 수도 있잖아요. 마음 부담이 컸어요. 이러다 저 개를 떠안을지도 모른다고, 불안했지요. 불안은 불행으로 바뀌었고요.

책방 뒤뜰에서 잠자고 있는 럭키./사진=북끝서점 주인 김상아씨

형도 : 마냥 묶어두는 것도 맘 쓰이셨을 거고요.
상아 : 제가 책방을 하니 책을 많이 읽어야 하잖아요. 아침 9시부터 10시까지 유일하게 집중해 읽었었는데요. 그게 다 사라진 거예요. 강아지 산책을 시키느라고요.

상아씨와 럭키가 인사하고 있다. 나를 처음 봐서 몹시 흥분한 상태였다./사진=남형도 기자

형도 : 아무래도요. 시간이 갈수록 복잡하셨겠어요.
상아 : 처음엔 불만이 있었지요. 강아지한테 그랬어요. 넌 왜 내 눈앞에 나타나 가지고, 내 눈에 띄어서…. 조금 미웠어요. 그러다 받아들이기로 정하니 맘이 바뀌더라고요. 한 시간 산책하고 오면 개운한 거지요. 오늘 한 가지 착한 일은 했단 생각이 들어서요. 지금은 미웠던 마음이 다 녹았어요.

집을 내어준 숯불고깃집 '할머니'
유럽 아치 양식을 따라 고급스럽게 잘 만들어준 럭키의 집. 현관에 나 있는 동그란 발자국이 포인트./사진=북끝서점 주인 김상아씨
강아지는 산책을 너무 좋아했다. 그 시간만 기다리는 게 보였다. 산책가면, 강아지는 자기가 썰매 끄는 시베리안허스키라 믿는듯 했다. 상아씨를 정신없이 끌어대는 통에, 손과 발이 물집투성이였다.

미움과 동정이 오가던 나날. 답답했을 개에게 바람을 쐬어주던 손바닥이 굳은살로 단단해질 무렵, 희소식이 들렸다. 누렁이가 지낼 집이 생긴 거였다. 이름을 '럭키(행운의)'로 지은 것도 그때였다.

형도 : 다행이에요. 실제로 돌아다니는 개 잡아 개농장에 파는 사람들 있거든요.
상아 : 저희 책방 앞 '교암숯불고기' 사장님인데, 동네에선 '몰디브 할머니'라고 불러요. 그 분께 제가 강아지 어떡하냐고 앓는 소릴 엄청 했어요. 그랬더니 "그럼, 우리 집에 데리고 와"라고 하시더라고요.

배변했다고 바로 치워주시던, 교암숯불고기 사장님, 일명 '몰디브 할머니'./사진=남형도 기자

형도 : 맡으시기 쉽진 않으셨을 텐데…참 고마운 분이네요.
상아 : 알고 보니 유기견들을 평생 거두신 분이더라고요. 개장수에게 끌려가던 개를 구조하시기도 했고요. 표현은 좀 거치신데 마음은 정말 따뜻한 분이에요. 거친 사랑…(웃음). 너무 감사했지요.

너른 풀밭을 자유로이 누비는 럭키. 보기만 해도 행복해진다./사진=북끝서점 주인 김상아씨

형도 : 길에서 헤매던, 그래서 위험했던 누렁이에게도 집이 생겼네요. 자길 돌봐주는 이들도요.
상아 : 숯불고깃집 할아버지 사장님하고, 동네 미용실 아저씨하고, 집도 아치형으로 멋있게 지어주셨어요. 비도 새지 않게 커다란 파라솔로 막아주시고요.

강아지 함께 키우는 세 사람…"책임 나누니 부담 줄었지요"
산책하다 공놀이를 하며 신난 럭키./사진=북끝서점 주인 김상아씨
떠돌던 동네 누렁이 개. 이를 외면할 수 없던 세 사람. 책방 주인과 횟집 할머니와 고깃집 할머니. 함께 살아가는 게 맞다 믿는 이들의 공동 육아가 그리 시작되었다. 혹여나 지내다가 새끼를 또 낳을까 싶어 중성화도 시켜줬다. 이 역시 각자 쌈짓돈 10만원씩 모아 해결했다고.

형도 : 포근한 사례란 생각이 듭니다. 무언가 느슨하게, 그러면서 따뜻하게. 동네에서 함께 럭키를 키우는 것 말이지요.
상아 : 셋이서 공동 육아하고 있는 셈이에요. 저는 럭키 사료와 산책 담당이고요. 몰디브 할머니는 자릴 내어주시고, 집을 지어주셨고요. 럭키 밥그릇을 윤이 나게 닦아주세요. 자크 할머니는 날마다 자전거를 타고 와서 럭키 똥 치워주시고 청소를 싹 해주세요.

풀밭에서 브레이크댄스를 추며 흙을 온몸에 바르고 있는 럭키. 목줄 없었으면 무대가 많이 컸을듯 싶다./사진=북끝서점 주인 김상아씨

상아씨는 그날 아침에도, 럭키 산책을 갔다가 이렇게 됐다며 청바지를 보여줬다. 얼마나 즐겁게 날뛰었을지, 한쪽이 살짝 찢어져 있었다. 그래도 처음보단 잘 산책한단다.

형도 : 그로 인해 동네서 미움 받는 누렁이였던 럭키가, 이리 잘 살아가고 있는 거고요.
상아 : 저렇게 키우는 게 저도 처음이거든요. 마음의 짐이 좀 덜어진 느낌이에요. 책임을 세 등분하는 거잖아요. 부담이 덜 되는 거지요. 내가 못 하면 할머니가 해주시겠지, 그러고요. 할머니들도 바쁘시면 제가 해주겠지, 그런 거예요.

두 개의 공을 한꺼번에 가지고 노는 럭키. 자연과 하나가 된듯, 즐거워보인다./사진=북끝서점 주인 김상아씨

형도 : 다들 처음이실 텐데, 무척 잘하고 계시네요.
상아 : 럭키를 보면서 느끼는 건 이런 거예요. 조금씩 보태면 저렇게도 살아갈 수 있구나. 한 마리는 거둘 수 있게 됐잖아요. 이대로 키워도 되는 걸까 싶은데, 앞날은 길게 생각하지 않으려고요. 오늘은 또 잘 지내면 되니까요.

'미지근한 마음'이 살아가게 해줄 거라고
기자를 보고 한껏 반갑다고 바라보는 럭키. 가까이 다가가 마구 쓰다듬어주었고, 럭키는 보답으로 응아가 묻은 발바닥으로 내게 매달렸다. 괜찮아, 사랑스러우니까./사진=아내에겐 비밀로 한 남형도 기자
럭키를 만나러 갔다. 처음 만난 내게도 껑충껑충 뛰며, 좋다고 난리였다. 그새 응가를 했고, 그걸 본 상아씨가 얼른 치워주었다. 비가 많이 오고 있었으나 막아줄 파라솔이 있어 염려 없었다. 온몸으로 반기며 핥아주는 럭키를 쓰다듬었다. 따뜻했다. 살아 있어 좋은 거였다.

숯불고깃집 할아버지는 "안 들어왔으면 모를까, 내 집에 들어왔으니 내 식구잖아요"라고 했다. 표현은 투박했으나, 속에 담긴 건 그 가게에서 파는 김치찌개 국물마냥 얼큰 뜨끈했다. 할머니는 "경동시장서 강아지를 한 마리 키우면서, 불쌍한 생명이 눈에 들어왔다"고 했다. 그리 열댓 마리까지 돌보고 있다고.

럭키 집을 아치형으로 만들어주신 장본인, 교암숯불고기 남자 사장님(왼쪽). 그와 대화 중인 기자./사진=북끝서점 주인 김상아씨

거기 담긴 마음을 조금은 더 상세히 보고 싶어졌다.

형도 : 실은 차에서 처음 럭키를 만나셨을 그날이요. 그냥 모른척하면 그만이거든요. 근데 그러지 않으셨잖아요. 잠깐이나마 내리셨지요. 거기엔 어떤 마음이 깃들어 있을 테고요.
상아 : 저도 유기견을 15년 키웠었어요. 아기랑 같이. 그래서 눈에 자꾸 띄어요. 보이는 사람에게만 자꾸 보이나 봐요.

아이와 유기견이었다 입양한 강아지와 함께하는 일상을 담은 상아씨의 책. "엄마는 내 주인이야." "왜?" "나를 매일 안아주잖아."/사진=남형도 기자

형도 : 과거형인 건, 지금은 무지개다리를 건넌 거군요.
상아 : 개가 죽을 때 옆에 못 있어 줬었어요. 아이가 너무 아파서 병원 치료 받을 때였어요. 그 미안함이 항상 있어서 그런지, 유기견이나 고양이를 못 지나치겠더라고요. 너무 마음에 남는 거예요.

돌아다니다 개장수에게 끌려갔거나, 유기견 보호소에서 안락사가 됐을지도 모를 개. 럭키가 우거진 풀숲에서 웃는다. 함께 기쁘다./사진=북끝서점 주인 김상아씨

떠난 강아지 이야길 하는 동안 상아씨 눈에 무언가가 살짝 일렁였다. 17년 키우고 떠나보낸 아롱이 생각이 났다. 저릿한 마음이 내게도 번져왔다. 애달픈 마음. 훌륭한 마당은 아녀도 작은 공간을 내어주는 마음. 묶여 지내더라도 산책은 꼭 해주는 마음. 굶지 않고 비 맞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앞으로 나아갈 길엔 따뜻한 햇빛도, 시원한 그늘도 꽤 있을 거라고. 혼자가 아니므로./사진=북끝서점 주인 김상아씨

형도 : 그런 마음이 매일 필요한 세상이잖아요. 그래서 꼭 이야길 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상아 : 뜨겁지도, 넘치지도 않은 미지근한 마음. 그게 누군가를 다시 살게 하는구나 싶어요. 저도 열성적으로, 그렇게까진 못 하는 사람이고요. 할머니들도 생계를 위해 일 하시니 열정적인 보호는 아니거든요. 그런 미지근한 마음이어도 모이고 모이니까, 럭키를 거둘 수 있게 된 거지요.

북끝서점 손님이 럭키를 안아주고 있다. 보는 걸로도 따뜻하다./사진=북끝서점 주인 김상아씨

그 미지근함은 럭키가 살아가기에 적당한 체온쯤 되지 않았을까. 수고로움을 대하는 마음도 한 뼘 더 자랐다.

"책을 못 읽는 시간이 이제는 대수롭지 않다. 책을 읽는다는 건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본다는 것이니까. 아침마다 럭키를 본다. 개구리를 쫓다가 온몸을 풀에 비벼대는 럭키를 본다."(북끝서점 주인, 상아씨)

기분 최고구나, 럭키. 다행이다. 이젠 평생을 함께할 좋은 가족 만나기를./사진=북끝서점 주인 김상아씨


남형도 기자 huma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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