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쩡치 “병태미 풍기는 여자 만나려…” 서남연합대 진학

2023. 9. 2.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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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88〉
신혼 시절 산책 나온 스쑹칭과 왕쩡치. 1947년 겨울 상하이 교외. [사진 김명호]
1997년 5월 16일 밤, 관방 신화통신이 작가 왕쩡치(汪曾祺·왕증기)의 사망을 타전했다. 중화권의 문화부 기자들은 술김에 들은 것 같기는 한 이름에 당황했다. 머리에 든 것은 없어도 손가락은 민첩했다. 여기저기 전화통 들고 들쑤셨다. 왕의 이름 앞에 ‘경파(京派) 작가의 대표 인물, 민간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서정적 인도주의자’ 등 온갖 수식어가 난무하기 시작했다. 홍콩 언론이 뉴욕타임스 중국 전문기자의 글을 원용했다. 왕을 ‘중국 최후의 순수 문학자, 중국의 마지막 사대부’라고 정의했다. 원로작가 바진(巴金·파금)이 맞는 말이라며 무릎을 쳤다.

왕쩡치 1997년 숨지자 언론들 떠들썩

서남연합대학 교수 시절의 선충원. [사진 김명호]
시장 상인들 평가는 달랐다. 신문에 난 사진 보고 반응이 비슷했다. “벌레가 건드린 흔적 있는 야채를 선호하던, 식재료 가장 잘 고를 줄 알았던 진짜 미식가를 볼 수 없게 됐다”며 눈을 붉혔다. 식재료뿐만이 아니었다. 왕쩡치의 여성관도 유별났다. 튼튼하고 건강한 여자는 싫어했다. 말로만 듣던 모친처럼 젊되 총명하고 병든 여자를 좋아했다. 조건이 까다롭다 보니 여자친구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왕쩡치는 어릴 때부터 책을 끼고 살았다. 글솜씨도 뛰어났다. 중학 시절, 네가 쓴 것이 분명하냐고 묻는 교사를 당황케 했다. “고전 많이 읽고 머릿속에 요약해 두면 글은 저절로 됩니다.” 당돌한 질문도 했다. “집안에 병든 따님 있으면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연령이나 용모는 상관없습니다.” 교사는 어이가 없었다. 왕의 부친이 어떤 사람인지 탐문했다. 답들이 거의 비슷했다. “박학다식하고 금기서화(琴棋書畵)에 능한 지식인이다. 아들이 세 살 때 상처(喪妻)했다. 행동이 자유자재지만 여자문제는 복잡하지 않다. 부권(父權)의식이 없는 특이한 성격이다. 아들과 친구처럼 지낸다.”

부권이 강하다 보니 자녀들은 부친의 사유물이나 다름없을 때였다. 가가호호(家家戶戶) 말이 좋아 엄부(嚴父)지 폭부(暴父)가 더 많았다. 자녀들은 허구한 날 매를 맞으며 동년(童年)의 자유를 박탈당했다. 왕쩡치는 부친 성격 덕에 남 눈치 안 보고 자유를 만끽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대학도 체질에 맞는 쿤밍(昆明)에 문을 연 서남연합대학을 지원했다.

왕쩡치는 매일 새벽 시장을 한 바퀴 돌았다. [사진 김명호]
서남연합대학은 전국에서 몰려온 진보적인 학생의 집결지였다. 교수들도 융통성이 많았다. 학술사에 남을 괴짜 몇 명 외에는 고집불통이 없었다. 중문과에 원서를 낸 왕쩡치는 입학시험에서 중졸의 문호 선충원(沈從文·심종문)의 눈에 들었다. 작문시험은 100분이었다. 감독하며 답안지 작성하던 응시자들의 글을 힐끔거리던 선이 제출하고 나가는 왕을 불렀다. “20분 더 줄 테니 쓰고 싶은 대로 더 써라.” 왕은 신이 났다.

개강 첫날 강의를 마친 선충원이 왕쩡치에게 저녁 사 주며 물었다. “베트남 경유해 갖은 고생하며 쿤밍에 왔다고 들었다. 일본군 손 미치지 않는 지역에도 좋은 대학이 많다. 먼 길 온 이유가 궁금하다.” 대답이 의외였다. “예쁜 여학생 많다는 소문 듣고 왔습니다.” 선도 미래의 수제자에게 맞장구를 쳤다. “잘 생각했다. 여기 여학생들은 콧대가 보통 아니다. 조심해서 접근해라.” 경험담 들려주며 충고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초임 교수 시절 내 수업 듣는 예쁜 여학생이 있었다. 어찌나 예쁘던지 밤잠을 설칠 정도였다. 한번 만나자는 편지 수십 통 보냈다. 답장은커녕 교장에게 편지 들고 달려가 일러바치는 바람에 망신당할 뻔했다. 당시 교장이 관용덩어리 후스(胡適·호적)가 아니었다면 지금 너와 마주하지도 못했다.” 엄청난 격려도 해 줬다. “작문 답안지 보니 네 글이 나보다 월등하다. 학업보다 하고 싶은 일에 충성해라.” 이쯤 되면 평범한 교수와 학생의 대화가 아니었다.

노벨상 양전닝 등 동기생에 실력 안 밀려

왕쩡치의 서체는 유려했다. 손님 초청하면 식단을 직접 써서 선물했다. [사진 김명호]
물리학과는 15명 중 14명이 남학생이었다. 유일한 여학생 스쑹칭(施松卿·시송경)은 건강이 엉망이었지만 악착같았다. 동기생의 회고를 소개한다. “스쑹칭은 말레이시아 화교의 무남독녀였다. 조국에서 공부하겠다며 단신으로 쿤밍까지 왔다. 셈본실력이 탁월했다. 동기생인 훗날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양전닝(楊振寧·양진영)이나 ‘중국의 오펜하이머’ 덩자셴(鄧稼先·등가선)에게 거의 밀리지 않았다. 문제는 건강이었다. 체력이 받쳐 주지 않았다. 생물학과로 전과해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다시 서양문학과로 옮겼다.”

학생 왕쩡치는 제멋대로였다. 기분 좋으면 학교에 가고 아니면 틀어박혀 잠만 잤다. 해가 지면 친구들과 찻집과 술집을 순례했다. 부친이 충분히 보내 준 용돈 덕에 주머니는 항상 두둑했다. 한잔 들어가면 항상 같은 말 하며 불평을 늘어놨다. “이 학교 괜히 왔다. 나는 총명하고 병태미(病態美) 풍기는 여자 만나러 여기까지 왔다.” 친구가 서양문학과에 가 보라고 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매일 그러다 보니 좁은 바닥에 소문이 났다. 스쑹칭도 귀가 있었다. 서양문학과 주변에 왕이 얼쩡거리면 친구들과 어울려 피해 버렸다. 왕은 숫기는 없었다. 두 사람은 졸업 후 상하이의 한적한 골목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쭈뼛거리는 왕쩡치에게 스쑹칭이 다가가 아는 체를 했다. 그날따라 날씨가 음산했다.

왕쩡치 사망 후 스쑹칭이 기자에게 반세기 전을 회상했다. “꼴도 보기 싫던 왕쩡치를 보는 순간 인연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3주 후 둘이서 교회 찾아가 결혼식을 올렸다. 첫날 저녁은 국수로 때웠다. 반쯤 먹자 엉뚱한 제안을 했다. ‘반지 대신 국수 바꿔 먹자’며 먹던 국수그릇을 정중히 내게 건넸다. 두 살 어린 천하의 낭만덩어리와 살 일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2년 후, 시도 마지막 한숨 내쉬고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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