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처럼 될까 두려웠다”···인종차별·성폭력으로 얼룩진 ‘진짜 과학’[책과 삶]

이영경 기자 2023. 9. 1.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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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자물리학 연구한 첫 흑인 여성 교수
에이젠더이자 강간 피해자이기도 한 저자
사회와 동떨어져 보이는 물리학·우주론
그 내부의 폭력·차별적 구조 통렬한 폭로
·
“물리학은 엄청나게 사회적인 학문
사회 곳곳의 문제를 모두 모아놓은 현장”
입자물리학을 연구하는 최초의 흑인 여성 교수인 찬다 프레스코드와인스타인이 샤네큐아 게이가 그린 그림 ‘우리는 언제나 과학자였다’ 앞에 서 있다. 찬다 프레스코드와인스타인 홈페이지

나의 사랑스럽고 불평등한 코스모스

찬다 프레스코드와인스타인 지음·고유경 옮김

휴머니스트|432쪽|2만2000원

좋은 책에 대해 짧게 요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의 사랑스럽고 불평등한 코스모스>도 마찬가지다. 책엔 상대성이론과 입자물리학, 우주의 기원과 확장, 천체물리학에 대한 최신 논의가 가득하다. 동시에 인종차별과 성차별, 식민주의, 파시즘에 대한 이야기도 가득하다. 책은 완벽한 수학 방정식으로 이뤄진 물리학과 우주의 신비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폭력과 차별, 고통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삶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책의 미덕은 후자를 극복하고 전자를 성취했다는 성공담을 늘어놓는 데 있지 않다. 현실과 동떨어진 천재들의 고상한 영역으로 보이는 입자물리학, 우주론이 어떻게 폭력적이고 차별적인 사회구조와 연관되어 있으며, 내부에서 폭력과 차별을 재생산하고 있는지를 통렬하게 폭로한다. “물리학은 우주가 아니다. 오히려 우주의 내부를 들여다보려는 매우 인간적인 시도”라는 저자의 말처럼, 현실 사회에서 인간이 수행하는 ‘진짜 과학’의 모습을 보여준다. “다른 과학책이 모델하우스 같은 과학이었다면, 이 책은 현실의 과학이다.”(과학 전문 번역가 김명남) 우리는 이때까지 이런 과학책을 기다려왔는지도 모른다.

찬다 프레스코드와인스타인은 입자물리학을 연구하는 최초의 흑인 여성 교수로 우주론, 중성자별, 암흑물질을 연구한다. 하버드대, MIT, 미국 항공우주국(NASA) 등에서 연구했으며, 우주 가속에서 양자중력의 실마리를 찾고 암흑물질 후보로서 엑시온을 탐구한다. 입자우주론에 기여한 공로로 미국 물리학회 ‘에드워드 보쳇 상’을 받았으며 2020년 네이처에서 선정한 ‘과학 형성에 도움을 준 10명’에 이름을 올렸다. 여기까지 보면 엘리트 코스를 밟은 천재 물리학자의 이야기로 보인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흑인 여성이며, 에이젠더(agender·성별이 없다고 여기는 성 정체성을 지닌 사람)로 성소수자다. 그의 어머니는 비혼모로 흑인 여성운동가였다. 그는 멕시코계 갱단과 흑인, 미국 원주민들이 사는 로스앤젤레스 동부의 노동계급 가정에서 자랐다. 강간 피해자(생존자)이며, 강간범은 그가 속한 과학계의 동료 과학자였다. 그는 학부 시절 인종·성별·계급적 출신과 연관된 복합적 이유로 물리학에 재능이 없다는 지도교수와 동료의 혹평에 시달리며 한때 물리학을 포기할 생각도 했다. “우주를 다루는 수학이 인종차별과 성차별이라는 현실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혹독한 교훈”을 얻으며 공부한 그는 과학계가 “사회 어느 곳에서나 발생하는 문제를 모두 모아놓은 현장”이라고 말한다. 그는 뉴햄프셔대 물리학·천문학 교수이자 여성학·젠더학과 교수이기도 하다.

H.O.T. 포스터 붙여놓던 ‘1세대 K팝 팬’이었지만
한국에선 “더러운 시선”···한국 안의 제국주의 직면

물리학의 역사를 떠올려보자. 뉴턴, 아인슈타인, 오펜하이머 등 백인 남성의 모습을 한 천재 물리학자들의 서사가 떠오를 것이다. 저자는 “고독한 천재의 이야기”와 같은 관점을 거부한다. “물리학은 엄청나게 사회적인 학문”이라며 확고한 개념들이 개인보다는 집단적 노력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현대 물리학의 발전은 자본주의·군사주의와 분리할 수 없으며, 천문학 또한 식민지 개척과 더불어 발전했음을 인정한다. 물리학의 발전사를 다루면서 지워지고 가려진 존재들인 여성·흑인·원주민들을 끊임없이 소환하며, 미국·유럽 중심의 과학을 넘어 물리학의 외연을 풍부하게 확장하려고 시도한다.

저자는 고등학교 시절 한국계 미국인이었던 단짝 친구로부터 K팝을 소개받고 H.O.T.의 포스터를 침실 문에 붙여놓은 ‘1세대 K팝 팬’이었다고 한국어판 서문에서 털어놓는다. 반가운 소식이지만, 한국은 그에게 좋은 대접을 해주지 않았다. 대만계 미국인 남편과 한국 여행을 왔을 때 그는 “식당에서 더러운 시선을 받았”고 “반흑인적 사진”을 마주했다. “한국 반흑인 정서가 미국 반흑인 정서를 계승했다는 점에서, 한국을 방문한다는 것은 제국주의를 직면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이 말에 우리가 반박할 수 있을까. 에이젠더 흑인 여성 물리학자의 관점은 한국 사회에도 긴요하다.

7000광년 떨어져 있는 창조의 기둥에선 지금도 별이 태어나고 있다. 출처: NASA, ESA, and the Hubble Heritage Team (STScI/AURA)
뉴턴·아인슈타인 보다는 ‘슈리 공주’가 되고 싶었던 아이

“열 살 때, 나는 우주를 다루는 수학에 대한 호기심과 인종차별의 존재나 작동 방식에 대한 호기심을 따로 떼어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우주를 다루는 수학, 인종차별 둘 다 이 책의 핵심 주제다. “입자물리학을 사랑하지만 잘 이해하지 못했던 흑인 소녀에서 입자물리학을 사랑하는 퀴어 에이젠더 흑인 여성”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경험한 “지적 상전이(phase transition·액체가 기체가 되는 것처럼 물질의 상이 바뀌는 현상)”에 대한 치열한 기록이기도 하다. 저자는 입자물리학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가 속한 과학계가 굴러가는 방식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한다. ‘거지 같은’ 현실에서도 그가 버틸 수 있는 이유는 입자물리학에 대한 사랑이다.

저자는 2012년 힉스 입자가 발견되면서 실험적으로 완성된 입자물리학의 표준모형을 연구한다. 입자물리학의 표준모형은 소립자와 물질의 기본 구성 요소, 우주에 존재한다고 알려진 네 가지 힘 중 세 가지(전자기력, 약력, 강력)를 설명하고 예측하는 데 쓰인다. “잘 짜인 우주를 여러 부분으로 세심하게 나누어 깔끔하게 설명하는 방식”이 마음에 쏙 들었다. 하지만 표준모형에도 한계가 있다. 중력을 다루지 않고, 우리가 아직 관찰하지 못한 암흑물질을 포괄하지 못한다. 저자는 ‘표준물리학을 넘어서는 물리학’을 꿈꾼다. 저자는 양자역학과 일반상대성이론을 통합하는 루프양자중력에 대한 최신 연구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어려운 이야기지만, 쉽게 말하자면 이렇다. “우주의 역사에서 벌어진 중요한 사건들의 세부 정보를 채워넣는 것, 즉 수학을 이용해 우주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이다.” 그는 자신이 “우주의 ‘그리오(서아프리카 지역의 음유 시인이자 구전 역사가)’이며 이야기꾼”이라고 말한다. ‘그리오’는 영화 <블랙팬서>의 슈리 공주가 이용하는 인공지능 시스템 이름이기도 하다. 저자는 뉴턴이나 오펜하이머가 되기보다는 백인 남성의 서구적 사고방식을 넘어 새로운 관점에서 입자물리학을 바라보는 ‘슈리 공주’가 되고자 한다.

초신성(왼쪽 아래 밝은 점)과 은하수(오른쪽 위 가운데) 사이의 블랙홀(가운데)로 인해 발생한 중력렌즈효과를 이미지화한 사진. 미국 버클리대 미겔 주말라카르뤼이 박사와 우로쉬 셸야크 교수는 블랙홀 같은 암흑물질의 규모를 파악하기 위해 그동안 모은 초신성 관측자료를 통해 중력렌즈효과가 얼마나 어떤 식으로 일어나는지 연구했지만 현재 표준우주론에서 필요로 하는 암흑물질의 양을 충족시키기에는 어림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phys.org
‘인종차별’ 때문에 오명 쓴 멜라닌의 물리학 연구
‘흑인 여성 물리학자’ 관점으로 들여다보는 과학의 가능성

흑인 여성 물리학자는 어떤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을까. ‘멜라닌의 물리학’에 대한 부분이 흥미롭다. 멜라닌은 빛을 흡수해 눈에 보이는 색으로 반사하는 식으로 빛과 상호작용하며 인간의 피부와 머리색을 좌우한다. 멜라닌엔 세 종류가 있는데, 가장 흔한 유멜라닌은 검은색과 갈색, 페오멜라닌은 노란색에서 빨간색 사이의 색으로 머리카락을 붉게 하거나 입술을 분홍빛으로 만든다. 뉴로멜라닌은 인간의 뇌에서 많이 발견되는데, 기능은 불확실하다. 인류는 유멜라닌이 적은 사람들이 유멜라닌이 많은 사람들을 납치하고, 착취하고, 강간하고 살해해온 역사라고 말한다. 인종차별과 결부된 역사 때문에 멜라닌이 물리적 현상으로 흥미롭다는 사실은 주목받지 못했다. “너무 많은 죽음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된 이 물질”은 전기 전도체로 ‘미래 과학’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저자는 멜라닌이 생체 전자-이온 하이브리드 전도체로서 인체의 일부로 통합되는 기기인 생체 전자 장치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멜라닌 과학이라는 미개척 분야를 통해 과학에서 흑인의 인간성을 배제하는 현상을 멈춰야 한다는 인식과 흑인 과학자들이 실제로 과학에 참여할 수 있는 방식을 보여주고 싶었다.” 저자는 또한 물리학계에서 쓰이는 ‘양자색역학’이란 단어에서 백인우월주의적 시각을 읽어내며, 역사적으로 가려진 흑인의 문화적 기여를 우주의 ‘암흑물질’에 비유하는 것의 문제점 등도 물리학 지식을 이용해 지적한다. 미세한 인종차별을 의미하는 ‘마이크로어그레션’이 중력렌즈효과와 같다고 설명한다.

샤네큐아 게이 ‘우리는 언제나 과학자였다’ 스케치(2019). 휴머니스트 제공
강간은 과학 일대기의 일부···
강간의 통제와 과학의 통제는 닮았다

시종일관 날카로운 태도로 과학계의 문제점을 지적하던 저자의 목소리가 조금 달라지는 지점이 있다. ‘강간은 과학 일대기의 일부다’란 장이다. 저자는 이 장에서 동료 과학자에게 강간당한 사실을 털어놓는다. 한동안 과학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기 힘들었으며, 아직도 외상후스트레스장애로 고통을 받는다. 그에게 과학을 한다는 것과 강간은 분리할 수 없는 문제였다. 저자는 강간을 가능하게 하는 권력과 과학에 작동하는 권력이 유사하다는 것을 찾아낸다. “강간은 욕망에 관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소유권에 관한 것이다. 과학은 호기심으로 발전한다고 알려져 있지만 (…) 서구 세계에서 지난 500년 동안 일어난 과학적 활동을 종합해보면 과학은 통제에 관한 것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핵무기를 개발한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자였던 물리학자 오펜하이머를 다룬 영화 <오펜하이머>의 한 장면
“오펜하이머처럼 될까 두려웠다”

저자는 학창 시절 고도가 높고 건조해 하늘이 잘 보이는 하와이 마우나케아의 천문대에서 높은 연봉을 받고 일할 기회를 얻었지만, 원주민들이 반대 시위를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를 포기한다. 부유한 북반구 국가들의 학술기관이 소유한 망원경은 유럽 식민지 공격의 결과로 지어졌다는 점을 알게 된다. “과학자로서 겪는 일상적 현실은 식민주의를 강화하는 도구로서의 과학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 한때 천문학자들은 거리를 정확히 측정하여 대서양을 더 빠르게 가로질러 노예와 상품을 나를 수 있도록 아이티에서 일식을 관측하기 위한 자금을 지원받았다. 천문학의 식민주의적 유산은 유럽에서 아이티로, 지금은 하와이로 이어졌다.”

최초의 핵무기가 개발된 ‘맨해튼 프로젝트’ 책임자였던 물리학자 오펜하이머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저자는 “하버드의 화려한 삶에서 내가 자본주의와 군국주의에 반대했다는 사실을 잊을까봐 걱정했다. 오펜하이머처럼 될까봐 두려웠다”고 말한다.

저자는 오펜하이머 같은 물리학자가 절대 되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물리학자로서의 열정과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상을 꿈꾸는 신념이 만났을 때 과학이란, 과학자란 이런 것이란 상을 보여준다. 그는 은하수를 연구하는 과학자이면서 동시에 “우리 사회에서 은하수를 보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사람이다. 망원경 이야기가 아니다. 노동계급 흑인 어린이가 은하수를 보고 우주를 궁금해하기 위해 필요한 교육, 복지, 주거 등에 대해 함께 생각한다는 말이다. 우주를 연구하는 입자물리학자 식으로 말하면 이렇다.

“나는 은하 공동체 관계를 인지하고 존중하기 위한 여정에서 초신성 쿼크 집합체로서 나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매일 노력하고 있다.”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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