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에 비친 얼굴 말고 진짜 얼굴을 보는법

한겨레 2023. 8. 2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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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소(全燒)하여 검은 잿더미로 바뀐 집에서 건져낸 것들이 있다.

효선이 말한다, 밀가루하고 성경이 있으니 말씀과 밥의 집에 있을 건 다 있네.

웃으며 대꾸한다, 그래 그 둘만으로 살아보자.

그것으로 십자가를 깎아보라고 하니 자기도 그럴 생각이라고 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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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월간 풍경소리]

픽사베이

#일꾼들이 여섯이나 와서 트랙터로 뒷밭을 순식간에 갈아치운다. 그중 얼굴 깨끗한 사람이 여기 수행하는 곳 아니냐며 자기도 수행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웃으며 대꾸한다, 삶 자체가 수행 아니겠냐고. 그렇다. 사람이 사람으로 산다는 건 결국 저마다 제 삶을 다듬고 가꾸는 거다. 다만, 자기가 배우고 있는 줄 모르면서 배우는 아이처럼, 자기가 수행하고 있다는 걸 모르면서 수행하는 사람은 있을 수 있겠다. 새벽에 들은 한마디 말씀. “이십세기 지구에 두 선생이 살았다. 하나는 ‘이거다. 이렇게 살아라.’ 하였고 다른 하나는 ‘이건 아니다. 이렇게 살지 마라.’ 하였다. 그 이름이 하나는 간디고 다른 하나는 히틀러다. 제대로 배우는 학생에게 둘 다 고마운 선생이다.” 선생이라는 존재가 선생한테 있지 않고 학생한테 있다는 마이다 슈이치의 말이 옳다. …효선이 구운 빵을 사겠다며 마을사람들이 찾아온다. 고맙고 정겨운 장면이다.

#효선 강의 들으러 학교에 가고 혼자 집을 보는데 괜히 마음 설레어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읽고 있던 루빈의 책에서 한 문장이 마음의 손을 잡아준다. “한창 펼쳐지고 있는 당신 인생 스토리에서 이만큼 떨어져있는 본인의 모습을 그려보라. 당신이 수년 동안 공들여 쓴 소설 원고가 불에 타버린다. 잘 되어간다고 생각했던 인간관계가 순식간에 틀어진다. 직장에서 해고당한다. 쉽지는 않겠지만, 이런 일을 영화의 한 장면 보는 것처럼 겪어보라. 당신은 지금 견디기 힘든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는 드라마의 주인공을 보고 있다. 그는 당신이다. 하지만 당신이 아니다.”

#어느 나라 말인지 알 수 없는 길고 복잡한 문장을 읽는다. 하지만 글에 담긴 뜻은 간단하다. “세상에 작용하는 인간의 힘에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모두를 살리기 위해 누가 죽어야 할 경우 내가 죽겠다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같은 경우에 나 아닌 다른 누구를 죽이겠다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세상에 천국과 지옥이 공존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꿈에서 깨어나는데 ‘힘’이라는 말 대신 ‘돈’이라는 말을 쓰면 이 시대에 훨씬 설득력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 누가 손해를 보아야 할 경우 내가 손해 보겠다는 마음과 나 아닌 다른 누구한테 손해를 입히겠다는 마음이 세상을 움직이고 있다. 투기심을 폭력으로 틀어막는 사회주의 체제라면 혹시 몰라도 투기(投機)를 경제활동의 근간으로 삼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느 정부가 인간의 탐욕을 통제할 수 있으랴?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 정책 실패를 공격하여 성공한(?) 윤석열 정부가 요즘의 전세 사기 파동을 문재인 정부 탓으로 돌리는 것 같던데 그러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조물주가 인간 마음에 탐욕을 심어주어서 이렇게 되었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정말로 그런다면 희망이다. 비로소 사람들이 온갖 파동의 원인을 제 속에서 찾게 될 터이니까.

픽사베이

#오후 3시경 효선과 뒷밭에서 모종을 옮기고 있는데 집에 불이 났다. 무엇이 탁! 하고 깨어지는 소리에 고개 돌려 바라보니 시커먼 연기가 부엌 쪽에서 솟아오른다. 어쩌나, 집 안에 치매 노모 혼자 있는데… 그리고 이어지는 외마디 비명, 당황, 허둥지둥, 울부짖음, 망연자실, 달려온 마을 사람들의 우왕좌왕, 붉은 혓바닥 널름거리며 지붕으로 타오르는 검은 연기, 깨어지고 부서지는 소리, 소방차들이 뿜어내는 물줄기… 이렇게 시간이 흐르고 지금여기교회 식구들과 엄정 괴산에서 달려온 아이들, 마을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제복 입은 소방대원들과 국과수 요원들이 저마다 분주하게 임무를 수행하고 시신을 병원으로 옮기고… 아비규환의 절망과 원망과 허탈의 지옥 같은 이틀이 지나고 사흘째 되는 날 새벽, 시신이 누워있던 바로 그 자리에서 장차 당신이 이루실 일에 관련하여 찰나의 비전을 효선과 아무에게 따로 동시에 주심과 더불어 …짙은 먹구름이 걷혀 맑은 하늘이 열리고 효선의 눈에서는 겁에 질린 엄마 얼굴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바뀌고 그리고… 마침내 한 음성 듣는다. “네가 나를 믿는 척 시늉하는 건 여기까지다. 그러는 너를 더 이상 놔두지 않겠다. 이번 일은 처음부터 내가 저지른 일이니 수습도 내가 한다. 이것은 낡아 무너진 과거의 마무리면서 새로이 펼쳐지는 역사의 첫걸음이다. 머리 굴리지 말고 눈 맑게 뜨고 지켜보아라. 지난 이박삼일 동안 네 속에서, 너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계속 메아리로 울리던 ‘진실로 선함과 인자하심이 나의 사는 날까지 나를 따르리니’ 이 노래가 어떻게 진실인지를 네가 진실로 알게 되리라.” 아아, 무슨 말을 더할 것인가? …국과수에서 화재 원인을 밝힐 수 없다고 원인불명이라고 잠정결론을 내렸단다. 그럴 거다. 한님 어머니가 하신 일의 원인을 사람이 무슨 말로 규명할 것인가?

#효선 언니가 다니는 서울 지구촌교회 주관으로 장례 마치고 충주 화장장에서 유골을 수습한다. 고인 생전에 “천국이 따로 없네. 여기가 낙원일세.”라고 자주 말하던 노은(老隱) 집 벚나무 아래에서 지금여기교회 식구들과 아랫집 내외 그리고 한상렬, 이병창, 서산, 소함 목사 등이 안장 예배를 드린다. 광주로 떠나는데 ‘마을언니들’이 모여와 인사 나눈다. 모두들 고맙고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효선 말대로, 고마움과 사랑 말고는 아무 남은 게 없다.

전소(全燒)하여 검은 잿더미로 바뀐 집에서 건져낸 것들이 있다. 관옥 신약성서 한 권, 효선이 농업인으로 받은 각종 자격증과 수료증 그리고 땅문서. 컨테이너하우스 두 채에 있던 몇 권의 책과 밀가루와 오븐도 멀쩡하다. 효선이 말한다, 밀가루하고 성경이 있으니 말씀과 밥의 집에 있을 건 다 있네. 웃으며 대꾸한다, 그래 그 둘만으로 살아보자. 유소(幽素)가 잿더미에서 숯이 된 나무토막 하나 건졌단다. 그것으로 십자가를 깎아보라고 하니 자기도 그럴 생각이라고 답한다. 절묘하다. 소인(素仁)이 보이지 않아 어디 있느냐고 물으니 장인이 돌아가셔서 서울 적십자병원에 가는 중이란다. 설상가상이라더니… 죽으로 저녁 먹고 교회 서재에서 잠자리에 든다.

픽사베이

#점심으로 추어탕을 먹는데 한 말씀 주신다. “좋은 생각이냐, 안 좋은 생각이냐, 이건 더 이상 너에게 문제가 아니다. 앞으로 너에게 무엇을 어찌 하겠다는 마음을 주지 않겠다. 네 속에 그런 마음이 있다면 그건 네 마음이지 내가 준 마음은 아니다. 그러니 너는 오직 생각을 비워라.” 아아, 청강(靑江) 선생께서 사십여 년 전에 처음으로 주신 휘호가 유수식견(唯須息見)이었지. 그 말이 오늘 이렇게 실현되는가? 소인(素仁) 장인 장례식장에서 한마디. 부디 예수 가르침대로 살자고.

#아주 작은 것이라도 생각은 생각이다. 믿어 의지할 게 못 된다. 한님은 빈틈이 없으시다. 돼가는 대로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법이다. 완전 능동인 완전 수동!

#잠에서 나오는데 슬며시 드는 생각. …본인의 거울에 비친 얼굴 말고 진짜 얼굴을 본 사람 있을까? 없을 거다. 본인의 진짜 얼굴에 그나마 가까운 얼굴을 보고 싶으면 사랑하는 사람 눈동자에 비친 얼굴을 보면 된다. 그 순간 그 얼굴은 ‘사람’의 얼굴이면서 ‘사랑’의 얼굴일 테니까. 사람은 사랑일 때 비로소 마침내 사람이다.

글 관옥 이현주 목사

***이 시리즈는 전남 순천 사랑어린마을배움터 마루 김민해 목사가 발간하는 <월간 풍경소리>와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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