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탓에 표류했다는 왜적…“간교한 놈들 믿을 수 없다”

김종대 전 헌법재판관 2023. 8. 28.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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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역(意譯) 난중일기-이순신 깊이 읽기 <21> 갑오년(1594년) 5월 1~27일

- 적군 3명 압송해와 문초했더니
- 자꾸 속이려 해 목 베도록 했다
- 새벽 창가서 바라본 우리 배들
- 적 쳐들어와도 섬멸할만큼 든든

두달가량 아프던 몸이 좀 나아지자 밀린 공문도 처리하고 다시 심신을 추스려 전과 다름없이 바다 지키는 본무에 전념한다. 장마가 시작된다. 임시로 지은 건축물들이 비바람을 견디지 못해 날려 갔다 하니 한산도 생활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간다.

5월1일[6월18일] 맑음.

경남 통영시 한산도 제승당 가는 길은 바닷물이 찰랑대는 아름다운 길이다. 그 길에 이순신 장군이 지은 ‘한산도가’를 새긴 비석이 서 있다.


아침을 먹은 뒤 활터 정자에 있는 방에 올라가니 날씨가 아주 맑고 시원했다. 종일 땀을 비 오듯 흘렸더니 몸이 한결 나아진 것 같다. 아침에 아들 면과 집안 여자 종 4명, 관아의 여자 종 4명이 병중에 심부름을 위해 들어왔는데, 덕(德)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내일 돌려보내라고 일렀다.

5월2일[6월19일] 맑음.

새벽에 아들 회가 어머니 생신(5월 4일)에 상 차려 드릴 일로 여자 종들을 데리고 돌아갔다. 우수사, 흥양현감, 사도첨사, 소근포첨사(박윤)가 보러 왔다. 기운도 점점 회복되어 간다.

5월3일[6월20일] 맑음.

아침에 흥양현감이 휴가를 얻어 돌아갔다. 늦게 발포만호가 와서 봤고 장흥부사도 왔다. 군량을 점검하여 비축하였다. 공명고신(성명 백지의 임명장: 나라에서 부족한 군량을 마련키 위해 임시방편으로 마련한 제도) 300여 장과 임금의 분부 2통이 내려왔다.

5월4일[6월21일]

종일 바람이 세게 불었고, 비도 밤새도록 그치지 않고 심하게 내렸다. 경상우수사의 군관이 와서 왜적 3명이 중선(中船)을 타고 추도(통영시 산양면 추도리)에 온 것을 잡아 놓았다고 하기에, 이들을 심문한 뒤 압송해 오도록 시켰다. 저녁에 공대원에게 물으니, “왜적들이 바람을 따라 배를 몰고 본토로 향하다가 폭풍을 만나 배를 조종할 수가 없어 떠다니다가 이 섬에 닿은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간교한 놈들의 말이니 믿을 수 없다. 이설, 이상록이 돌아갔다. 본영 탐후선이 들어왔다.

5월5일[6월22일]

비바람이 세게 몰아쳤다. 지붕이 세 겹이나 걷혀 산산조각으로 높이 날려가고, 빗발은 삼대같이 내려 몸을 감출 곳이 없으니 어이가 없다. 사도첨사가 문안하고 돌아갔다. 오후 2시쯤에야 비바람이 조금 그쳤다. 발포만호가 떡을 만들어 보내왔다. 탐후선이 들어와서 어머님이 평안하심을 알게 되니, 다행, 다행이다.

5월6일[6월23일]

흐렸다가 저녁나절에 개었다. 사도첨사, 보성군수, 낙안군수, 여도만호, 소근포첨사 등이 와서 만났다. 오후에 경상수사(원균)가 왜놈 3명을 압송해 왔기에 문초해 보니, 이랬다저랬다 만 번이나 속이므로 원 수사로 하여금 목을 베고 나서 보고하게 했다. 우수사도 와서 술을 세 순배 돌린 다음 자리를 파하고 돌아갔다.

5월7일[6월24일] 맑음.

기운이 편안한 것 같지 않아 침 16군데를 돌아가며 맞았다.

*지난 3월 6일 명나라 담도온의 금토패문이 준 엄청난 충격으로 지금까지도 병고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5월8일[6월25일] 맑음.

원수의 군관 변응각이 원수의 공문과 장계 초본과 임금의 분부를 가지고 왔다. “수군을 거제로 진격시켜 적이 무서워 도망가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경상수사와 전라우수사를 불러 의논하고 방략을 세웠다. 충청수사가 들어왔다. 밤에 큰비가 왔다.

5월9일[6월26일] 비, 비

하루 종일 홀로 빈 정자에 앉았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에 치밀어 마음이 어지러웠다.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정신이 혼미하기가 취한 듯, 꿈속인 듯, 멍청이가 된 것도 같고 미친 것 같기도 했다.

5월10일[6월27일] 비, 비

새벽에 일어나 창문을 열고 멀리 바라보니 우리의 많은 배들이 바다에 가득 차 있다.

적이 비록 쳐들어온다 해도 섬멸할 만하다. 늦게 우우후와 충청수사가 와서 바둑을 겨루었다. 원수의 군관 변응각도 함께 점심을 먹었다. 저물어 보성군수가 왔다. 비는 종일 그치지 않는데 아들 회가 바다로 나갔으니 걱정스럽다. 소비포(이영남)가 약을 보내왔다.

5월11일[6월28일]

비가 저녁 때까지 계속 내렸다. 몸이 아파 3월부터 미뤄 놓았던 공문을 낱낱이 처결해 보냈다. 낙안군수가 와서 이야기했다. 큰 비가 퍼붓듯이 그치지 않고 하루 종일 내렸다.

5월12일[6월29일]

큰비가 종일 내리다가 저녁 무렵에야 겨우 그쳤다. 우수사가 보러 왔다.

5월13일[6월30일] 맑음.

검모포만호의 보고에 “경상우수사 소속의 보자기들이 격군을 싣고 도망가려는 것을 발견하고 그 보자기들을 붙잡으러 갔더니, 원 수사가 있는 곳에 숨어있다고 하기에, 사복들을 보내어 잡아 오게 했더니, 원균 수사가 크게 성을 내며 도리어 사복들을 결박했다”고 했다 그래서 군관 노윤발을 보내어 이들을 풀어주게 했다. 밤 10시께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5월14일[7월1일]

종일 비가 왔다. 충청수사, 낙안군수, 임치첨사, 목포만호 등이 보러 왔다. 영리를 시켜 종정도(從政圖)를 그렸다.

※종정도는 품계별로 벼슬 도표를 그려놓고 맨 먼저 정1품 영의정 자리에 가는 자가 이기도록 하는 게임으로 당시 수군 지휘관들이 비 오는 날이나 휴식을 취할 때 즐겨 했던 놀이였다.

5월15일[7월2일]

종일 비가 왔다. 아전을 시켜 종정도를 그렸다.

5월16일[7월3일]

흐리고 가랑비가 내리더니 저녁부터는 큰 비가 밤새도록 내렸다. 지붕이 새서 마른 데가 없다. 배 타고 있는 사람들이 거처하기가 매우 괴로울 것 같아 염려가 된다. 곤양군수(이광악)가 편지를 보내고, 겸하여 사명당 유정이 적진 안으로 왕래하면서 문답한 초기(草記)를 보내왔기로, 보니 분통함을 이길 길이 없다.

※위 초기의 내용은 가등청정이 강화조건 5개항(조선 4도를 일본에 할양할 것, 왕자 1명을 일본에 보낼 것 등임)을 제시한 것을 적은 것임.

5월17일[7월4일]

비가 퍼붓듯이 왔는데 저녁내 그치지 않았다. 바다는 안개가 짙게 끼어 눈앞을 분간할 수 없었다.

5월18일[7월5일]

종일 비가 왔다. 미조항첨사, 상주포권관이 보러 왔다. 저녁에 보성군수가 나갔다.

5월19일[7월6일] 맑음.

장마 비가 잠깐이나마 걷히니 사람의 마음도 상쾌했다. 아들 회와 면 그리고 여자 종들을 돌려 보내려는데 바람이 순탄치 않을 것 같아 그만두었다. 송희립과 회가 착량으로 가서 노루 사냥을 할 때 과연 또 비바람이 크게 일고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졌고 초저녁에 돌아오고 나서도 활짝 개지 않았다.

5월20일[7월7일]

비는 왔으나 큰바람은 조금 그쳤다. 웅천현감과 소비포권관이 보러 왔다. 온종일 홀로 앉았으니 온갖 생각이 가슴을 치민다. 호남의 방백(전라 관찰사 이정암)이 나라를 저버리는 것 같아 유감이 많다.

※이정암이 일본과의 화의를 주장했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받고 파직 되는데 이순신은 화의의 주장이 나라를 저버리는 일이라 보았다.

5월21일[7월8일] 비.

웅천현감, 소비포권관이 와서 종정도를 놀았다. 거제 장문포(장목)에서 적에게 사로잡혔던 변사안이 도망쳐 와서 하는 말이 “적의 형세는 그리 대단하지 않다”고 했다. 사나운 바람이 밤낮 없이 불었다.

5월22일[7월9일]

비가 오고 바람도 크게 불었다. 오는 29일이 빙모의 제삿날이라 아들 회와 면을 내보내고 여자 종들도 내보냈다. 순찰사에게 편지를 써 보내고 순변사에게도 편지를 써서 보냈다. 도망친 격군을 잡아 오도록 황득중 박주하 오수 등을 내보냈다.

5월23일[7월10일] 비.

웅천현감, 소비포권관이 왔다. 저녁나절에 해남현감이 와서 술과 안주를 내놓으므로 충청수사(이순신)를 청했다. 밤 10시경 헤어졌다.

5월24일[7월11일]

잠시 맑다가 저녁에는 비가 내렸다. 웅천현감과 소비포권관이 와서 종정도 놀이를 하였다. 해남현감도 왔다. 오후에는 우수사와 충청수사가 와서 종일 이야기했다. 전 충청수사 구사직에 대한 장계를 가져갔던 진무가 들어왔다. 조카 해가 들어왔다.

5월25일[7월12일] 비.

충청수사가 와서 이야기하고서 돌아갔다. 소비포권관도 와서 이야기하고 밤이 깊어서야 돌아갔다. 비가 조금도 그치지 않으니 전쟁하는 군사들의 마음이야 오죽 답답하랴, 조카 해가 돌아갔다.

5월26일[7월13일]

비가 오락가락했다. 거처하는 곳의 서쪽 벽이 부서져 바라지(벽 위쪽에 난 작은 창)에서 바람이 들어오니 아주 시원해서 좋았다. 과녁판을 정자 앞으로 옮겨 놓았다. 이날 이인원과 토병 23명을 본영으로 보내어 보리를 거둬들이도록 했다.

5월27일[7월14일]

비가 오다 개다 했다. 사도첨사, 충청수사, 발포만호, 여도권관, 녹도만호와 함께 활을 쏘았다. 이날 소비포권관(이영남)이 아파 누웠다고 했다.

※㈔부산여해재단·국제신문 공동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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