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독부·이승만동상·중앙정보부···남산에 들어섰다 사라져간 권력의 상징들[사-연]

한주형 기자(moment@mk.co.kr) 2023. 8. 27. 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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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경성의 중심, 남촌의 근현대 역사를 따라 걷다 (5)

지난 까지 조선총독부, 조선신궁, 선은전 광장의 주요 관청과 백화점 등 일제 강점기 남산과 경성 중심부 남촌에 얽힌 사연을 풀어 보았습니다. 오늘 남촌 편의 마지막화에서는 해방 이후 이곳이 어떻게 달라지고 또 무엇이 그대로 남았는지, 그 변천사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총독부가 떠난 자리에 들어선 국가 정보기관
조선총독부가 이전한 이후, 남산의 구 청사는 천황이 내린 은사금으로 새로 단장하고 ‘은사기념과학관’으로 개관합니다. 일제가 과학관을 세운 미명은 과학사상을 널리 알리고 보급한다는 것이었으나, 그 속에는 ‘위대한 과학제국’ 일본이 미개한 조선을 지배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의도가 숨어 있었습니다. 과학관의 주목적이 식민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데 있었으므로 소장품과 전시 수준은 참담했습니다. 광복 이후 은사기념과학관은 국립과학관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운영을 계속하지만, 한국전쟁 당시 폭격을 이기지 못하고 전소되었습니다.
퇴계로에서 바라본 남산 중앙정보부 본청과 부속 건물들. [유튜브 캡쳐]
일제가 떠나간 이후 왜성대는 예장동이라는 고유의 이름을 되찾았습니다. 1960년대 군사정권이 들어서며 이곳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무소불위 권력의 중앙정보부와 수도방위사령부가 접수합니다. 남파공작원과 좌익사범의 색출을 담당하는 중앙정보부의 국내정보담당 부서들이 남산에 있었기에 한번 이곳에 다녀오면 성한 몸으로 나오기 어려웠습니다. 이 시기를 겪으며 ‘남산’은 ‘중앙정보부’의 완곡어로 쓰였고, 이 공간은 두려움과 억압의 상징처럼 여겨졌습니다.

1980년 전두환 정권 들어서 중앙정보부는 국가안전기획부, 속칭 ‘안기부’로 확대 개편되었습니다. 41개 안기부 건물동이 남산에 속속들이 들어서 일대를 장악했습니다. 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대 세력에 대한 감시와 처벌이 필요했고, 남산의 정보기관들은 정권의 수족이 되어 이 ‘궂은 일’을 도맡았습니다. 남산에서는 무고한 민주운동가와 시민들에 대한 인권유린과 고문수사가 자행되었고, 국가안보와 사회질서 유지라는 말은 그에 면죄부를 주었습니다.

안기부가 위치해 있었던 남산 예장자락 일대의 현재 모습. 기존 안기부 건물들은 서울유스호스텔, 서울시 남산별관, 서울종합방재센터 등의 새 쓰임을 찾았다. [한주형기자]
1995년 문민정부가 들어선 뒤 안기부는 남산과 이문동 청사를 통합해 현재 국가정보원이 있는 내곡동으로 이전합니다. 이 과정에서 서울시는 안기부로부터 남산의 건물과 토지를 인수합니다. 20개동은 철거되었고, 나머지 건물은 다른 쓰임새를 찾았습니다. 취조실 건물은 서울시 종합방재센터, 수사국 건물은 서울시 남산별관, 중정 본관은 서울유스호스텔로 탈바꿈합니다. 수도방위사령부가 이전한 자리에는 남산골 한옥마을을 조성했습니다.

2009년부터 서울시는 남산 예장동 일대의 전통과 역사 문화유산을 복원하고 접근성을 개선하는 사업을 시작해 2021년 남산예장공원, 이회영기념관,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 등 식민지 수난사를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의 문을 열었습니다. 완만한 남산 자락을 따라 구성된 역사산책길을 오르다 보면 총독부 관사 터와 을사조약이 맺어진 통감 관저 터 살펴볼 수 있습니다.

‘남산에 민족정기를 우뚝 세워라’
1945년 일제가 패망과 함께 일본인들은 스스로 승신식을 올리고 조선신궁을 철거합니다. 하지만 신전, 배전과 같은 신궁의 주요 건물만 정리했을 뿐, 1950년대 초반까지 대다수 건물들이 잔존해 있었습니다. 1940년대 후반 조선신궁 참배로 계단에는 눈을 덮어 스키장으로 활용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1956년 남산의 이승만 대통령 동상이 건립되고 있는 모습(왼쪽)과 1960년 2월 남산을 찾은 이승만 대통령(오른쪽 사진 가운데). [서울역사아카이브·정부기록사진집]
1공화국 수립과 한국전쟁 이후 조선신궁의 자리에는 대통령의 80세 생일을 기념해 이승만 대통령 동상이 들어섭니다. 동상은 본체 7미터, 기단까지 25m에 달하는 거대한 크기였는데, 세워질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 규모였습니다. 팔각의 기단에는 그의 생애가 상세히 조각되어 있었습니다. 동상의 제막식이 열린 1956년 광복절에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제3대 대통령으로 취임합니다.
1959년 5월 남산에서 국회의사당 기공식이 열리고 있다. [서울역사아카이브]
이승만 정부는 더 나아가 이곳에 국회의사당을 신축할 계획을 세우고 1959년 기공식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이듬해 3·15 부정선거와 이 여파로 일어난 4·19혁명으로 이 계획은 삽을 떠 보지도도 못한 채 무산됩니다. 당시 성난 군중들은 남산의 이승만 대통령 동상을 끌어내립니다. 동상의 몸통은 산산조각이 나 사라졌고, 머리만 한 시민이 수거해 후에 발견됩니다. 그해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함께 남산 국회의사당 건립 계획은 전면 백지화됩니다.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1971년 9월 남산식물원을 둘러보고 있다. [서울역사아카이브]
1969년(왼쪽)과 1983년의 남산식물원, 남산공원 일대 전경. [서울역사아카이브]
국회의사당 계획이 물거품이 된 이후 개발이 멈춰있던 남산이 다시 변화를 맞이하게 된 것은 박정희 정권 들어서면서부터입니다. 박정희 정부는 남산을 시민들에게 환원한다는 의미로 조선신궁 터에 남산도서관(1965년)과 남산식물원(1968년)을 건립합니다. 남산식물원에는 베트남 참전 용사들이 보내온 열대 식물들이 전시되었고, 소규모의 동물원도 부속으로 갖추어 운영되었습니다. 도서관과 식물원 앞에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둘레 20m의 분수대가 설치되어 가족 나들이 장소로 사랑받았습니다.
백범 김구 서거 20주기를 맞이한 1968년 8월 남산에서 백범 김구 동상 제막식이 열리고 있다. [정부기록사진집]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중심지였던 남산은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주요 건축물이 들어서기에 더할 나위 없는 공간이었습니다. 1970년대 전후 남산에는 ‘민족의 정기를 되살린다’는 이유로 다양한 상징물들이 세워졌습니다. 1970년 안중근의사기념관 건립을 시작으로 남산 곳곳에 김유신 장군, 유관순 열사 등 민족열사와 위인들의 동상이 들어섰습니다. 동시에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이 철거된 자리에 이를 대체할 동상을 세우는 것을 두고도 다양한 논의가 있었습니다. 시조 단군, 4·19 혁명에서 의거한 학생들 등이 후보로 올랐습니다. 아이러니하게 이 자리를 차지한 동상은은 한평생 이승만 대통령과 대척점에 있던 백범 김구의 동상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도 금일봉을 보내는 등 동상의 건립과 백범광장 조성에 관심을 쏟았습니다.

이후 남산은 40여 년간 큰 변화 없이 유지됩니다. 2006년 남산식물원이 철거되었고, 서울시는 2013년부터 이 자리에서 한양도성 유적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조선신궁 건립 당시 크게 훼손된 성곽을 복원하는 사업을 진행합니다. 발굴조사를 통해 총 길이 189m의 성벽과 조선신궁 배전 터, 일제 강점기 방공호 등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지금 한양도성 유적전시관에는 조선시대 축성 기술과 일제강점기 수난, 발굴과 정비 과정에 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경성 최고의 번화가 선은전의 변화
1952년 한국은행 앞 로터리의 모습. 우측에 새로 지은 서울중앙우체국 건물이 보인다. [정부기록사진집]
선은전 광장의 주요 기관들은 해방 이후에도 큰 변화 없이 기능을 이어갑니다. 경성우편국은 1948년 서울중앙우체국으로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르네상스 양식의 청사는 한국전쟁을 거치며 반파되어 파사드만 남았습니다. 전쟁 직후 물자가 없던 시절, 무너진 건물의 뼈대를 겨우겨우 유지해 우체국 건물을 새로 지었습니다. 칠십여 년의 시간 속에서 두 번의 철거와 신사옥 준공을 거치며 3층의 초라한 중앙우체국 사옥은 오늘날 고층 건물인 포스트타워가 되었습니다.
1978년 한국은행 앞 분수대와 한국은행 본관의 모습. [서울역사아카이브]
올해 준공된 한국은행 신축 통합별관과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의 전경. [사진공동취재단]
온전히 기능하는 중앙은행을 설립하는 것은 광복 이후 가장 시급한 문제 중 하나였습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에도 조선은행은 중앙은행의 업무를 수행하며 화폐를 발행합니다. 1950년 5월 한국은행법이 제정되어 한국은행이 출범하였고, 직제상 남아 있던 조선은행은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설립 이후 채 한 달이 되지 않아 발발한 전쟁에 한국은행 최초의 지폐였던 한국은행권은 부산에 있던 한국은행 임시본부에서 발행되었습니다. 전쟁 이후 내부가 파괴된 조선은행 본점 건물을 수리하여 한국은행 본관으로 사용하였습니다. 1987년 본관 뒤편에 신관을 증축하였고, 본관 건물은 원형 복원하여 한국은행 화폐박물관으로 개관하였습니다.
1952년 미군 전용 PX로 사용되던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의 모습. [서울역사박물관]
경성의 백화점들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요. 해방과 함께 일본 자본의 백화점들은 적산으로 편입되거나 국유 재산으로 흡수되어 미군정 소유가 됩니다. 미스코시 경성점은 동화백화점으로, 조지야 백화점은 중앙백화점으로 상호를 변경하였고 미나카이 백화점은 국가 소유로 전환됩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터진 전쟁은 백화점업계에 이중고를 안겼습니다. 전쟁 과정에서 생산시설이 붕괴되며 진열장을 채울 상품 생산이 불가능했고, 백화점들은 기능을 잃고 명맥만 겨우 이어 가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직영체계를 지속하는 것이 어려워 백화점의 구역을 나누어 임대를 주었고, 몇 없는 직영매장에서도 단일 품목이나 수입품 정도를 취급했습니다. 이 시기 동화백화점이나 중앙백화점 모두 미군 전용 PX로 전환되어 사용되었습니다.
1984년 철거 전의 화신백화점. 도심재개발지구로 지정된 화신백화점은 주변지역을 포함한 2천 5백여평의 대지에 신생 백화점을 지을 계획이었으나 한보건설에서 동방생명(삼성생명)으로 소유권이 바뀌며 공사가 중단된다. 이 자리에는 1999년 종로타워가 준공되었다. [매경DB]
수십 년의 시간동안 소유권이 복잡하게 오가며 이름은 수없이 변했지만, 미츠코시 경성점과 조지야 백화점이 있던 자리는 여전히 대한민국에서 손꼽는 백화점의 본점으로 성업 중입니다. 미츠코시 경성점 건물은 신세계백화점 본점이, 조지야 백화점이 있던 곳은 롯데백화점 본점 영플라자가 들어서 ‘서울 백화점 열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한편 종로의 화신백화점은 화신그룹의 몰락과 더불어 1970년을 기점으로 쇠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1987년 폐업 후 철거되어 사라진 화신백화점의 자리엔 지금 종로타워가 세워져 있습니다.
을지문덕, 이순신 장군의 기운이 깃든 거리
해방 이후 1946년 일본식 동명정리 사업을 거치며 본정통은 충무로, 황금정은 을지로라는 새 이름을 얻었습니다. 충무로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에서, 을지로는 을지문덕 장군의 이름에서 따왔는데요, 이 경위가 재미있습니다. 본정통은 일제 강점기부터 일본인들의 터전이었고, 해방 이후 황금정에는 중국 화교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이들의 세력 확장을 경계한 당시 정부에서는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 장군의 시호 충무를 따와 본정통을 충무로로 명명했고, 살수대첩에서 수나라군에 대승한 을지문덕 장군에서 황금정의 이름을 을지로로 지었습니다. 두 장군이 외세의 기운을 얼마나 눌러 주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충무로와 을지로는 종로와 더불어 주요 관청과 기업 본사, 대형 백화점 등이 들어선 서울 도심 중심지 역할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서울 남산에서 내려다본 서울 도심의 모습. [한주형기자]
<참고문헌>

ㅇ정수진, 「서울의 인문학」, 창비

ㅇ김기호,「서울 남촌 : 시간,장소,사람」, 서울시 간행물

<사-연 지난화 보기>

ㅇ사-연 지난화 모음

https://www.mk.co.kr/news/running-story/S00010078

ㅇ 식민지 경성의 중심, 남촌의 근현대 역사를 따라 걷다 (1) / 질퍽대는 동네에 일본인 몰려왔습니다...화려한 불빛이 슬퍼지네요 [사-연]

https://www.mk.co.kr/news/premium/10793740

ㅇ 식민지 경성의 중심, 남촌의 근현대 역사를 따라 걷다 (2) / 일제가 남산에 세운 신궁 허물고...그 자리를 채운게 스키장?

https://www.mk.co.kr/news/premium/10799295

ㅇ 식민지 경성의 중심, 남촌의 근현대 역사를 따라 걷다 (3) / 영화 ‘놈놈놈’의 모티브가 된 사건···조선은행의 만주진출에서 비롯됐다 [사-연]

https://www.mk.co.kr/news/premium/10804110

ㅇ 식민지 경성의 중심, 남촌의 근현대 역사를 따라 걷다 (4) / 경성 한복판에서 벌어진 토착 자본과 일본 자본의 백화점 대전, 그 결과는?

https://www.mk.co.kr/news/premium/10808743

정부기록물과 박물관 소장 자료, 신문사 데이터베이스에 잠들어 있는 빛바랜 사진들을 열어 봅니다. ‘사-연’은 그중에서도 ‘길’, ‘거리’가 담긴 사진을 중심으로 그곳의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연재입니다. 거리의 풍경, 늘어선 건물,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 등을 같은 장소 현재의 사진과 이어 붙여 비교해볼 생각입니다. 사라진 것들, 새롭게 변한 것들과 오래도록 달라지지 않은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과거의 기록에 지금의 기록을 덧붙여 독자님들과 새로운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 싶습니다. 해당 장소에 얽힌 ‘사연’들을 댓글로 자유롭게 작성해 주세요. 아래 기자페이지의 ‘+구독’을 누르시면 연재를 놓치지 않고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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