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도 묵묵히 신이 준 숙제를 풀어낸다

한겨레 2023. 8. 26.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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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심정] 김용규의 숲과 지혜]

자귀나무. 사진 김용규 제공

군말 없이 신의 숙제를 푸는 여름꽃(1)

앞의 글에서 우리는 이른 봄에 눈을 맞으면서도 꽃을 피우는 식물 몇 종을 살펴보았다. 여리디여린 풀이 감당하기 어려울 여건을 지혜롭게 극복하며 마침내 장하게 자신의 꽃을 피워내는 삶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봄꽃이 누릴 수 있었던 생태적 선물의 이면에는 더불어 감당해야 하는 숙제가 함께 있음도 헤아려 보는 시간이었다.

거듭 짚어보는 나의 견해지만, 신은 생명에게 자기 삶을 스스로 완결해갈 힘과 능력을 부여하면서 동시에 그를 위해 반드시 풀어내야 할 환경적인 숙제도 함께 던져둔다. 이는 빛이 있다면 그 이면에는 기필코 그림자가 있는 것과 같다. 예컨대 한 번 산 존재라면 반드시 죽음을 맞아야 한다. 그것이 삶을 지배하는 법칙이다. 혹은 당신의 사랑이 설레는 입구를 통과했다면 기어코 눈물짓는 시간도 함께 통과함으로써 당신 사랑에 대한 진정성을 증명해야 한다. 그것이 사랑을 지배하는 이치다. 요컨대 만물을 관통하는 태극의 질서가 이러하며 이 질서는 온 시공을 장악하고 있다. 이 법칙은 너무도 준엄하고 또한 보편적이다. 거기에는 눈 깜짝할 만큼 짧은 시간의 예외도, 바늘 하나 꽂을 자리만큼의 공간적 예외도 허락되지 않는다. 또한 누구도, 무엇도 피해 갈 수 없다.

이팝나무. 사진 김용규 제공

여름이라는 계절에 담긴 선물과 숙제

이제 그 준엄한 질서 하에서 피어나는 여름꽃의 배경과 사정을 살펴보자.

식물들의 입장에서 여름은 어떤 계절일까? 여러 측면에서 여름은 식물이 자라고 또 꽃을 피우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다. 먼저 광합성에 꼭 필요한 빛, 즉 일조량이 가장 풍부한 계절이다. 해의 길이가 가장 긴 절기인 하지(夏至)를 중심에 두고 있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평균 기온도 안정적으로 높다. 따라서 동해(凍害)를 입을 일이 없고, 냉해(冷害)를 입을 가능성도 거의 없다.(참고로 동해는 0℃ 이하에서, 냉해는 0℃ 이상에서 입는 추위 피해를 말한다) 또한 적도로부터 팽창하는 양(陽)의 기운이 수증기를 몰고 올라오면서 비도 자주, 그리고 넉넉히 내리는 계절이다. 따라서 흙이 머금는 습기 또한 가장 풍부한 때다.

사람들은 꽃에 환호하지만, 식물에 있어 꽃은 열매로 가는 과정일 뿐이다. 그 수고로운 전환을 연결해 줄 매개자가 있어야 한다. 꽃을 열매로 바꿔줄 매개자들이 가장 풍부하고 왕성한 시기가 언제인가? 달리 표현해보면, 벌레들이 가장 왕성한 계절은 언제인가? 그 역시 여름이다. 이렇게 보면 여름은 식물에 가장 알맞은, 모든 여건이 딱 좋은, 선물 같은 때이다. 이 계절보다 생장과 개화와 결실로의 전환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는 때는 없다. 이런 사정으로 사계절 중 여름철에 꽃을 피우는 식물이 가장 많은 것이다.

앞서 선물에는 숙제도 함께 포장되어 배달되는 것이 만물을 구성하고 그것을 운행하는 우주의 법칙이라고 했다. 따라서 선물 같은 시절에 피는 여름꽃들 역시 던져지는 숙제를 군말 없이 풀어야 한다. 그렇다면 여름꽃에 부과되는 숙제는 무엇일까? 그 숙제는 한마디로 ‘치열함’이다. 치열함은 평범함을 추구하는 존재들의 욕망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자연스러운 사태다. 평범한 길은 언제나 보통을 선택한 존재들이 만들어왔다. 정규분포곡선을 보면 더 선명하게 알 수 있다. 이 통계적 곡선에는 늘 가운데 부분을 차지하는 곡선 근처에 가장 많은 표본 수가 분포한다. 생명의 길 중에서 가장 많은 개체가 선택하는 길은 어쩌면 가장 안전하고 적당하고 무난한 길일 것이다. 가장 많은 개체가 선택하는 보통의 길은 그래서 늘 평범한 욕망으로 북적거린다. 꽃 피우고 열매 맺기에 가장 안전하고 무난한 계절인 여름을 선택한 존재들은 늘 그 북적임을 넘어서야 한다. 그것이 그들, 보통을 선택한 이들이 풀어야 할 숙제다.

밤꽃. 사진 김용규 제공

치열한 경쟁을 돌파하는 여름꽃의 네 가지 전략

여름은 울울창창한 계절이다. 가장 안전한 때를 선택한 많은 식물의 욕망이 폭발하듯 한꺼번에 터지는 때가 여름이다. 이때 산하의 빛깔은 연록과 초록을 넘어 점점 암녹색으로 바뀌어 간다. 이런 여건에서 매개자들에게 자신의 꽃을 드러내는 일은 결코 수월한 일이 아니다. 저마다 자신의 꽃을 드러낼 필살기를 갖춰야 한다. 여름, 그 치열한 시간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필살기는 크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색(色), 향(香), 형(形), 시(時)의 계책(計策)이 그것이다.

하나씩 살펴보자. 색(色)은 도드라지는 꽃 색깔을 만들어 경쟁 우위를 차지하는 전략이다. 인간으로 치자면 돋보이는 화장술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향(香)은 도드라지는 향기를 풍겨 매개자를 사로잡는 전략이다. 인간도 각종 향수와 향기를 사용한다. 형(形)은 자신의 꽃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특별한 모양을 갖추는 전략이다. 인간도 소위 미용을 위한 성형이 확산하고 있음을 떠올려 보라. 마지막으로 시(時)는 꽃을 피우는 시간대, 또는 개화기간 등을 조절하는 계책이다. 다시 말해 시간적 차별화를 통해 극복해 가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상의 네 가지 전략 중에 하나를 도드라지게 쓰는 꽃도 있지만, 두 가지 이상을 함께 활용하는 식물도 있다.

계류에 핀 원추리. 사진 김용규 제공

색으로 대결하다

먼저 색의 계책을 쓰는 대표적인 식물로는 ‘나리’를 꼽을 수 있다. 봄에 피는 노란색 개나리꽃과 달리 나리의 꽃은 7~8월 여름에 핀다. 나리는 포괄적으로 백합(白合, 영어로는 Lily)이라 부르는 꽃에 속하지만, 그런 말이 없었던 때 우리는 그것을 ‘나리’라 불렀다. 그 이름은 ‘나비처럼 아름다운 꽃’에서 비롯된 오래된 순우리말이다. (김종원, 식물생태보감 2권 (자연과생태, 2016), 555쪽) 나리는 주로 빛이 좋고 비교적 양·수분도 괜찮은 서식 환경을 선호한다. 그래서 수많은 풀이 무성하게 여름의 생을 다투고 있는 숲 가장자리 비탈면이나 풀밭, 때로는 절벽의 공간을 서식지로 삼으며 살아간다.

나리꽃의 속사정

나리의 꽃 색은 특별하고 강렬하다. 꽃잎에 검은색 계열의 성긴 반점을 머금고 있는 나리꽃의 그 붉은빛은 단연 독보적이다. 나리의 붉은색에는 녹음 짙은 여름의 주변 색을 다 물리치고 단박에 시선을 끌어당기는 아찔함이 있다. 이런 까닭으로 울울해진 주변 식물들의 초록빛은 저절로 나리꽃의 배경이 되고 만다. 나비가 친애하는 나리는 그리하여 치열한 여름에도 자신을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다.

나리는 땅속에 묻힌 비늘줄기로부터 풀더미를 헤치며 솟구치는 곧고 긴 줄기에 제 잎을 매달고 자란다. 그렇다면 나리는 꽃을 제 몸의 어느 자리에다 피울까? 꽃은 여름 풀더미 속에서 잘 드러나야 한다. 그래야 매개자를 부르는 데 있어 유리하다. 그래서 나리는 애써 뽑아 올린 줄기의 끝자락에다 꽃을 피운다. 그렇지만 여름에는 제 서식지의 환경이 너무도 치열하여 그렇게 하고도 자신을 드러내기가 쉽지 않은 조건인 경우도 있다. 아무리 버겁더라도 생명의 삶에 대한 의지는 질기고 질기다. 어려움 속에서도 생명은 닥친 난관을 어떻게든 뚫고 삶을 계속하려 한다. 그것이 생명성의 본질이다. 나리는 치열한 여름철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또 다른 안전장치도 마련해 두고 있다. 그들은 환경 조건에 따라 열매를 맺어서 번식하는 방법을 쓰기도 하고, 그것이 어려울 때는 살눈(肉芽, 또는 珠芽)이나 비늘줄기(鱗莖)로도 번식한다. 재미있게도 해안지대를 따라 살아가는 나리는 주로 열매를 맺어 번식하고, 내륙에 사는 나리는 살눈이나 비늘줄기로 번식한다.(김종원, 위의 책)

계류 주변의 서식지에서도 잘 살아간다는 점을 빼면 나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여건에서 피어나는 원추리 역시 색으로 여름철의 치열함을 극복하는 식물로 볼 수 있다. 꽃 색이 노란색 계열이긴 하지만 넘나물(원추리를 부르는 오래된 우리 이름)의 꽃 역시 서식지의 주변을 압도한다. 마치 까치발을 들어서라도 주변 풀보다는 조금 더 높게 피겠다는 듯, 기다란 줄기를 뽑아 그 끝에 한 송이씩 차례로 피고 지는 원추리꽃 역시 피었다 하면 기어코 분명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나리. 사진 김용규 제공

이팝나무와 수국

한편 꽃을 무더기로 피워내는 방식으로 자신의 꽃을 돋보이게 하는 여름철의 풀과 나무들도 있다. 대표적인 나무로는 이팝나무를 꼽을 수 있다. 이팝나무는 이름이 재미있다. ‘이밥’이라는 사투리에 나무 이름의 뿌리가 있다. 이밥은 쌀밥의 이북식 표현인데, 쌀밥이 귀했던 그 옛날 민중은 이팝나무에 소담하게 피어나는 새하얀 꽃을 보면서 쌀밥을 연상했던 모양이다. (비슷한 결로 지어진 나무 이름에 봄날 조처럼 작은 크기의 꽃을 다닥다닥 달고 하얗게 피어나는 조팝나무도 있다. 짐작하듯 조팝은 조밥을 연상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팝나무의 꽃은 수북하고 소담하다. 가난한 민중의 눈으로 보면 나뭇가지에 풍성하게 피어 있는 새하얀 꽃이 마치 흰 쌀밥이 풍성하게 매달린 모습 같았을 것이다. 이팝나무의 꽃 색은 대단히 환하고 밝아서 아무리 녹음이 짙은 여름이라도 매개자들에게 자신을 알리는 일이 어렵지 않다. 수국도 이팝나무처럼 압도적인 색(色)의 전략으로 제 꽃을 드러낸다.

밤꽃. 사진 김용규 제공

공작새처럼 화려한 자귀나무

알다시피 공작새는 화려하다. 공작새의 화려함은 누구도 따라 하기 어려운 화려함에 속한다. 그런데 그 화려함에 도전하고 있는 나무가 있다. 자귀나무는 주로 숲의 경계 지대(임연부)나 길의 가장자리 등을 서식지로 삼고 있고, 더러 마당이나 정원에도 옮겨 심고 있어 흔하게 볼 수 있다. 여름철에 제법 긴 시간 피어 있는 자귀나무의 꽃을 볼 때마다 나는 공작새의 화려함이 떠오른다. 자귀나무의 꽃은 부채처럼 펼쳐 보여주는 수컷 공작의 꼬리(실제로는 확장된 날개 덮개) 부분, 그 극히 강렬한 화려함을 닮지는 않았다. 오히려 공작의 머리에 단아하게 달고 있는 벼슬 모양의 아름다운 장식을 닮았다. 수컷 공작의 그것이 흉내 내기 어려운 푸른색의 장식으로 암컷 공작을 유혹한다면, 자귀나무는 분홍빛의 화려한 장식과 꿀로써 매개자를 부른다. 청정한 계곡 같은 곳에 핀 자귀나무꽃을 만나거든 오랫동안 지켜보시기를 바란다. 그 화려함에 이끌려 다가오는 매개자 중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산제비나비도 만날 수 있다. 그런 장면을 만나면 꽃과 매개자 모두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한동안 넋을 잃고 보게 된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용규(충북 괴산, 여우숲 생명학교 교장)

*이 시리즈는 대우재단 대우꿈동산과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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