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자 요람된 감리회사… 도면에는 '까막눈'

정영희 기자 2023. 8. 26.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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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실시공에 가린 '허수아비 감리'(1)] 철근 부실 눈치 못챈 감리 무용론

[편집자주]한국토지주택공사(LH) 발주 공공주택 건설현장에서 철근 부실 사태가 발생함에 따라 감리의 역할이 도마 위에 올랐다. 부실공사를 막기 위해 현장의 관제탑 역할을 하는 감리가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건설업체와 공공기관 출신 퇴직자가 감리 인력 풀의 다수를 채우고 있어 전문성이 떨어짐에도 저비용만을 좇고 고용 안정성마저 보장되지 않는 업계 관행은 '허울뿐인 감리'라는 오명을 벗기 힘들게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도 법정 감리 인원 기준을 못 채우는 현장이 부지기수인 것으로 드러나 실망감만 키우고 있다.

◆기사 게재 순서
①퇴직자 요람된 감리회사… 도면에는 '까막눈'
②3000가구 공사 감리 고작 '4명'… 법적기준 못채운 LH 단지 82%
③지자체 감리 감독 유명무실한데… 정부 산하 감리기관 설립 논란

한국토지주택공사가 발주한 공공주택에서 철근 누락이 연이어 발생하며 설계나 시공 과정에서의 오류를 잡아내지 못한 감리에 책임 소재가 기울었다. 사진은 서울 소재 건설현장의 모습./사진=뉴시스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쏘아 올린 '철근 누락' 사태가 국내 건설업계를 뒤흔들고 있다. 지난 4월 인천 검단 신축 아파트 지하주차장 붕괴 사고의 원인인 무량판 구조 철근 누락 사례가 LH 자체 발주 단지에서 잇따라 적발된 것. 7월 국토교통부의 전수 조사 결과 91개의 LH 발주 아파트 중 15개 단지에서 반드시 시공해야 할 철근이 빠져있는 것으로 드러난 데 이어 얼마 지나지 않아 5곳이 추가됐다. 설계에선 구조변경 계산을 빠트리거나 산식 오류 등을 범했고 시공에선 다른 층 도면으로 잘못 보고 공사를 하는 일이 벌어졌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건설현장의 '최후의 보루'로 불리는 감리가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비판 여론이 높아지고 있다. 설계와 시공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오류를 바로잡고 현장의 전반적 관리·감독 일선에 서야 하는 감리가 업무에 소홀했단 지적이다. 업계에선 이번 철근 누락 사태가 현행 감리제도의 유명무실함을 여실히 드러내는 사례라고 입을 모은다.

공사감리는 건축물이나 건축설비가 설계도서의 내용대로 시공되는지를 확인하고 품질·공사·안전관리 등을 지도·감독하는 역할을 한다. 착공 전 허가된 설계도서에 구조상 오류가 없는지 확인하며 공사가 시작되면 공정별로 시공 단계나 사용 자재가 설계도서의 내용과 일치하는지를 검사한 뒤 다음 단계로의 착수를 안내한다.

준공이 가까워지면 예비준공검사를 통해 하자가 생길 가능성이 높은 부분을 점검하고 발주자에게 감리 완료보고서를 제출, 사용승인서를 받도록 돕는다. 현장의 통신, 소방, 전기 등 전문분야 준공 여부를 따져본 후 공사비 최종 지불 청구서를 검토하는 것도 감리의 일이다.


평균 연령 높아진 감리… 이유는


감리는 역량지수에 따라 초급·중급·고급·특급 등 4개 등급으로 나뉜다. 역량지수를 산정할 때는 국가기술자격증과 학력, 교육이수 현황과 경력을 합산해 종합적으로 판단한다. 자격증은 ▲기능사 ▲산업기사 ▲기사 ▲기술사 등으로 나뉘며 기술사의 평가 지수가 가장 높고 장기간의 현장 경력을 요한다. 이때 현장 경력에는 감리뿐 아니라 설계, 시공, 안전관리, 건설사업관리, 안전점검, 정밀안전진단 등 다른 업계 재직 경험이 포함된다.

수십 년간 감리 분야에만 몸담아온 '베테랑' 감리 인력은 전문성이 높은 대신 월급도 많이 줘야 한다. 때문에 감리회사가 주로 고용하는 인원은 비교적 낮은 연봉을 제시해도 채용 제안에 응하는 다른 분야 퇴직자들이다.

한 해 매출이 1000억원을 넘는 감리업체는 한미글로벌과 삼우씨엠건축사사무소 등 극소수다. 다수의 감리업체들은 소수의 직원들로 구성돼 인건비로 지출할 수 있는 경비가 한정돼 있어 저연봉의 고령 감리를 선호하곤 한다. 문제는 다른 분야에서 '1차 직장생활'을 마치고 감리로 인생 2막을 연 기술인 중 많은 이들이 관련 지식이나 현장 경험이 없는 이른바 '까막눈'이란 점에 있다.

경기 오산시 청학동 오산세교2 A6블록 아파트 지하주차장에 잭서포트(하중분산 지지대)가 설치된 모습./사진=뉴스1
건설업계 한 관계자는 "건설뿐 아니라 도시계획이나 토목에 종사했던 이들이 상대적으로 진입 장벽이 낮은 아파트 현장에 자주 배정이 되다 보니 도면을 못 보거나 캐드(CAD) 프로그램 사용법을 몰라 힘든 점이 있다"며 "감리가 무량판 등의 자재를 잘 모르고 공법에 대한 지식도 부족한데 설계나 시공상 오류를 잡아내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불안정한 감리 고용 구조도 문제로 지적된다. '주택 건설공사 감리자 지정기준'에 따르면 공사중단 기간이 3개월 이상 예상돼도 해당 일까지 감리원을 다른 프로젝트에 참여시킬 수 없다. 공사가 미뤄져 감리 업무를 못하는 인력을 활용할 수 없으니 정규직보단 계약직 등 비정규직으로 직원을 채용하는 회사가 많다. 고용 안정성을 추구하는 2030세대의 청년층은 계약직으로의 근무보단 타 분야에서 일하기를 선택한다. 비정규직이어도 괜찮은 이들은 앞서 다니던 직장에서 은퇴해 언제 그만둬도 될 소일거리를 찾는 퇴직자들이다. 고령화로 자연스레 이어지는 수순인 셈이다.

3년 간 감리직에서 일하다 얼마 전 퇴사한 30대 A씨는 "70대 초반이 최연소일 정도로 감리의 고령화가 심각한 현장도 있다"며 "은퇴자들은 일이 힘들지 않고 책임져야 할 업무 부담도 작아 민간공사 현장을 선호한다"고 했다.


"싸게 가자" 발주처 눈치 보는 감리업체들


감리업체가 퇴직자 출신을 감리로 뽑는 또 다른 이유는 인맥에 있다. LH처럼 거대조직으로 구성된 공공기관이나 대형 시공사에선 한 해에만 수백 명의 퇴직자가 쏟아진다. 이들이 소규모 감리업체로 향하면 이번 철근 누락 사태 뒷면에 감춰졌다 드러난 전관 카르텔로 이어질 수 있다.

국토부에 따르면 최근 철근 누락으로 논란이 된 LH 아파트 중 두 곳은 LH 전직 직원이 세운 업체가 감리를 맡아 진행했다. 3곳의 감리를 담당한 또 다른 건축사 사무소는 전체 임원 65명(2018년 기준) 가운데 22명이 LH 출신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민간업체가 아파트를 건설할 땐 독립성 확보를 위해 지자체가 감리 업체를 선정한다. 하지만 감리업체에 지급되는 돈이 발주처에서 나오다 보니 '을'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보다 많은 계약을 체결하려면 발주처와 연줄이 닿아 있는 사람을 한 명이라도 더 영입해 회사의 영향력을 키워야 한다는 판단으로 이어진다.

감리에 사업자 논리를 들이밀고 '최저가 입찰'을 추구하는 업계 관행도 품질을 떨어뜨리는 원인으로 지목됐다. 직원 개개인의 능력보단 저렴한 가격을 제시하는 업체를 우선 고용하다 보니 전문성은 더 떨어지고 고령화도 부추긴단 것이다.
건설업계 전문가들은 부실 감리 문제를 뿌리뽑기 위해 관리·감독 역할을 하는 각 지방자치단체의 제도가 별도로 로마련돼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사진=뉴스1
공공공사의 경우 공사비가 100억원 이상인 현장에선 22개 공종에 대한 건설공사를 감리업체의 전적인 책임 하에 관리감독이 진행되는 책임감리제도가 적용된다. 공사비가 300억원 이상이면 가격과 기술력을 함께 평가하는 종합심사제를 통해 협력업체를 선정하는 등의 규정도 있다. 반대로 민간공사의 대부분은 책임감리제도를 활용하지 않는 데다 최저가낙찰제를 기본으로 한다. 감리업체들은 수주를 위해 비용을 낮춰야 하기에 인건비 절감에 나서고 여기서 또 높은 임금을 챙겨줘야 하는 젊은 건설기술인보단 은퇴자로 눈을 돌린다.

전문가들은 현장에 팽배한 부실감리를 해결하고 감리에 대한 신뢰를 제고하기 위해선 보다 엄격한 법적 기준이 마련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김영현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연구위원은 "감리 인원의 고령화는 감리 자체를 비용으로만 보는 민간공사 현장에서의 시스템과 감리에 대한 의무교육조차 없는 현실이 맞물려 생기는 문제"라며 "발주처와 감리업체의 계약은 일종의 사인 간 거래이기에 국가가 제도적으로 개입했을 때 어디까지가 적절한 것인지를 파악하는 데 시간이 소요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경우에 따라선 감리가 열심히 일을 하고 싶어도 공사비 등 민감한 정보를 감추기 위해 업무에서 배제하거나 지난해 발생한 광주 아파트 건설현장 붕괴 사고처럼 적정 인원을 배치하지 않고 감리 이름만 빌리는 일도 허다하다"고 지적했다.

이동주 한국주택협회 산업본부장은 "구조설계 안전성이 가장 우선적인 관리감독 대상이 돼야 함에도 이를 확인할 수 있는 능력의 감리자가 없는 것이 문제이기에 제도적 정비가 절실한 상황"이라며 "전문성을 갖춘 감리 채용을 위한 적정 감리비의 기준을 법적으로 세우고 현장에서 부실 감리를 제재할 방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자체는 감리를 선정만 해놓고 공정별로 일은 잘 하는지 등을 확인하지 않는다"며 "감리자의 역량 부족이나 업무 태만 등이 발견되면 시공사 측에서 낸 의견을 수렴하거나 감리 업체를 교체하는 등 관리·감독 체계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정영희 기자 chulsoofriend@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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