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 극복의 서사로 승화된 관동대지진… 학살은 외면

김동현 기자 2023. 8. 24.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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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 100년] 日 국민 기억 속의 관동대지진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의 2013년 작 ‘바람이 분다’는 남주인공 지로가 같은 열차에 타고 있던 여주인공 나호코를 우연하게 만나면서 시작한다. 몇 마디 짧은 대화를 나누던 두 주인공 뒤로 붉은색 빛이 ‘번쩍’하고 나타나더니, 온 주택가가 들썩일 정도의 강한 지진이 도쿄를 덮친다. 현관문이 떨어져 날아다닐 정도의 강풍과 화염, 급히 피난 가는 주민들의 인파로 마을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그래픽=김하경

‘바람이 분다’는 2차 세계대전 때 ‘가미카제(神風) 폭격기’라고 불린 일본군 전투기 ‘제로센’을 설계했던 호리코시 지로(1903~1982)의 일생을 그렸다. 작중 등장한 지진은 그가 스무 살이었던 1923년에 도쿄·가나가와 등 관동 지방에 발생한 ‘관동대지진’을 묘사한 것이다. 10만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당시 비극의 현장은 미야자키 감독 특유의 화풍으로, 비극과 서정이 뒤섞인 풍경으로 그려진다. ‘불가항력의 재해’에 순응하면서도 삶을 다시 일궈낸다는 일본 문학 특유의 서사를 상징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두 주인공이 첫 만남에서 함께 읊조리는 대사 “바람이 분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폴 발레리 ‘해변의 묘지’ 중)란 구절이 이런 정서를 상징한다.

1923년 9월 1일 일어난 관동대지진의 역사를 다룬 영화·드라마·애니메이션·소설 등 일본 문화계 작품들은 대재해를 ‘슬픔을 승화시킨 아름다운 서사’의 출발지로 그리는 경우가 많다. 일본 국민 역시 당시 군국주의와 대재해의 피해자이고, 그럼에도 굳건하게 살아갔다는 메시지를 많이 담았다. 관동대지진의 트라우마를 문학 등으로 치유하려는 것이다. 이런 작품들에서 당시 무고한 조선인들이 일본인에게 죽임당했던 학살의 역사는 가려져 있다. 최가형(일본문학 전공) 삼육대 교수는 “관동대지진 이후의 일본 문학은 (거대한 재난에도) ‘일본은 건재할 것이다’란 국가주의적 가치를 앞세우느라 별도 사건의 피해자였던 조선인에 대한 서사를 소거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했다.

그래픽=김하경

대표적인 작품이 1983~1984년 방영된 NHK의 인기 연속극 ‘오싱’이다. 야마가타 시골 마을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소녀 오싱이 돈을 벌기 위해 일곱 살 때부터 도쿄 등으로 거주지를 옮기며 일본 근현대사를 살아간 이야기를 담았다. 아침 드라마였는데도 평균 시청률이 53%, 최고 시청률 63%란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이 드라마에도 관동대지진은 중요한 전기(轉機)로 등장했다. 오싱 부부가 어렵게 공장을 여는 날 지진이 일어나 모든 것을 앗아간다. 115화에서 오싱이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참자, 힘내자”라며 피난길을 떠나는 모습에서 시청자들은 눈물을 쏟았다. 관동대지진은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굳건한 캐릭터’로 그려지는 오싱이 결국은 극복하는 거대한 역경으로 그려진다.

지난 3월 한국에서도 개봉해 흥행한 일본 애니메이션 ‘스즈메의 문단속’에도 관동대지진이 등장한다. 주인공 스즈메가 일본 열도에 지진을 일으키는 괴물 캐릭터 ‘미미즈(지렁이)’를 막는다는 줄거리 속에 네 번째로 방문하는 도시인 도쿄의 에피소드가 관동대지진을 소재로 했다. 관동대지진은 동일본 대지진(2011년 3월 11일)과 함께, 이 애니메이션을 관통하는 ‘치유의 여정’을 만들어내는 거대한 재해 중 하나로 소개된다. 붉은색의 거대한 미미즈가 도쿄 상공을 뒤덮으면서 지진을 일으키는 듯한 모습은 영화를 상징하는 장면이 됐다. 애니메이션은 관동대지진을 대표적인 재난 중 하나로 그리면서, 재해를 당한 도시와 주민들이 아픔을 치유하는 여정을 그렸다.

일본인 4인 가족이 관동대지진을 전후로 해체와 화해를 겪는다는 내용의 소설 ‘남동생(おとうと·오토토)’은 여성 잡지 부인공론(婦人公論)에 작가 고다 아야가 1956~1957년 연재한 작품으로 이후 영화·드라마로도 제작됐다. 작중 배경이 조선인 학살 현장 중 한 곳이었던 도쿄 스미다구이지만 학살 관련된 내용은 언급되지 않는다. 지진으로 붕괴한 마을에서 살아가는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아시아의 여자’(연극·나가츠카 게이시 연출), 지진에 무너진 집안을 일으켜 세우려는 소녀의 이야기 ‘새벽의 아리아’(만화·아카이시 미치요 작가) 등 관동대지진을 배경으로 흥행한 다른 작품들에서도 지진은 ‘극복되는 아픔’으로 그려진다. 류정훈 고려대 인문융합연구원 교수는 “사건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적 조사나 사과가 없다 보니 문학 작품 등에도 조선인 학살이 부각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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