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수호자들’(上)[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2023. 8. 23.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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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회]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 전시된 ‘자유의 수호자들’. 이승만 트루먼 대통령과 백선엽 클라크 장군 등 양국의 장군들을 함께 모았다. 구자룡 기자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지하 전시실에는 ‘자유의 수호자들’과 ‘새벽의 침략자들’ 사진을 전시하고 있다. 수호자는 한미의 대통령과 장군들, 침략자는 북-중-소의 최고 지도자와 군사령관들이다.

6·25 전쟁이 3년 넘게 계속되면서 정치 및 전쟁 지도부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미국은 공화당의 아이젠하워가 1952년 11월 대선에서 당선돼 프랭클린 루즈벨트 이래 민주당의 20년 집권이 끝났다. 31년 철권통치를 해온 소련 스탈린도 1953년 3월 75세로 사망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직선제 개헌의 정치 파동속에 권력을 유지했다.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과 북한 김일성은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6·25 전쟁을 지휘한 유엔군사령관은 맥아더 해임 뒤 리지웨이와 클라크가 뒤를 이었다. 미 육군과 한국에 파견된 16개국 병력, 그리고 작전권을 이양한 한국군을 지휘했던 미 8군 사령관은 워커, 리지웨이, 밴플리트 그리고 테일러 등 4명이었다.

‘자유의 수호자’ 정치 지도자와 군 사령관들은 공산측 불법 침략 격퇴 목표는 같았으나 방법론과 군사 작전의 범위, 작전 성향 등에서 차이가 적지 않았다. 이런 차이가 전쟁 수행과 전개에도 영향을 미쳤다.

● 트루먼과 맥아더

트루먼과 맥아더의 상호불신과 불화에 대해서는 본 시리즈의 <17회> ‘맥아더는 왜 전쟁 중 해임됐나’ 편에서 다룬 바 있다. 두 사람의 충돌에는 개인적 성장 배경과 직업적 경험 차이, 군인과 정치인, 정치 진영의 차이, 대통령과 전쟁 영웅으로서 각자가 가진 대중적 지지 등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두 사람의 긴장과 갈등은 맥아더의 해임으로 일단락됐다.

트루먼과 맥아더는 대통령과 전쟁 지휘관이라는 상하 관계에서 나타난 커다란 이견과 갈등은 6·25 전쟁 과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 여파는 인천상륙작전, 북진, 만주 폭격, 원폭 사용, 대만 국민당 군대의 참전 허용 여부 그리고 휴전회담까지 주요 고비마다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여러 사안을 관통하는 것은 ‘전쟁에 승리 외에는 없다’며 필요하면 핵사용과 만주 폭격을 주장하는 확전론(맥아더)과 소련의 개입 등 제3차 대전으로의 확전을 막는 등 ‘전장의 승리보다 전략적 정치적 판단이 우선해야 한다’는 제한론(트루먼)의 차이였다. 여기에 유럽과 아시아에 대한 우선 순위에 대한 두 사람의 차이도 변수로 작용했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해 전세를 뒤집는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중공군의 대규모 참전을 정확히 예측, 대비하지 못해 압록강까지 북진했다가 다시 밀려 내려왔다. 한 때 37도선까지도 밀렸던 전선이 38선 부근에서 교착 상태에 이른 뒤 휴전론이 높아질 때 맥아더는 물러났다.

● 퇴임 후 ‘사라지지 않은 맥아더’

맥아더는 의회 고별 연설에서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고 했으나 그는 퇴임 후 사라지지 않았다. 1년 간 미국을 종횡무진하며 미국의 위기를 역설하고 다녔다. 군복에 훈장을 모두 매달고 전국을 다니며 때로는 변덕스런 정치적 연설을 했다. 하지만 그가 트루먼을 맹렬히 비난할 때마다 그의 위상은 조금씩 흔들렸다고 한다.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영웅의 모습과 조금씩 멀어졌기 때문이다.(맨체스터, 561쪽)

그의 연설 중에는 ‘서유럽 방어의 제1선은 엘베 강도 아니고 라인강도 아니다. 그것은 압록강이다’라며 아시아 우선주의를 견지했다. 자신의 해임을 두고 트루먼과 논쟁을 벌이는 등 ‘평생 군인’에서 우익의 신념을 대변하는 당파적 정치가가 되었다. 그의 ‘반 트루먼 행정부’ 유세에 트루먼은 “맥아더는 가짜클럽이 있다면 출마도 필요없이 회장이 되었을 것” “진실이라고는 한 푼어치도 없는 인간”이라고 역공했다. 트루먼은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맺으면서 일본점령군사령관으로서 전후 일본을 창설한 맥아더를 제외하는 것으로 뒷끝을 보였다.

맥아더는 1952년 11월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 후보 아이젠하워를 반대하고 태프트와 손잡고 대권의 꿈을 꾸기도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크고 하얀 집’(백악관)에 대한 정치적 희망이 무너진 뒤 민간 기업 ‘스페리 랜드’의 이사회 의장을 맡아 주주들과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때론 자신을 ‘원로 정치가’로 언급하기도 했다.(맨체스터, 587쪽) 케네디 대통령은 맥아더를 ‘숭앙’해 자주 백악관으로 초청, 조언을 들었다. 맥아더는 “아시아 땅 위에서 미군 병사가 싸우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충고했다. 1964년 4월 뉴욕 월도프의 호텔에서 급성신부전 등으로 생을 마감해 ‘노병은 사라졌다’.

경기 파주 임진간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 동상. 파주 = 홍진환 기자

● 사후 재평가 받은 트루먼

2021년 미국 정치전문매체 C-SPAN의 조사에서 트루먼은 존경받는 역대 대통령 6위에 올랐다. 링컨 워싱턴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시어도어 루스벨트 그리고 아이젠하워에 이은 것이다. 6·25 전쟁 기간 두 명의 미국 대통령이 모두 40여명 미국 대통령 중 5,6위를 차지했다.

트루먼은 ‘우연히 부통령이 된 후’ 루스벨트 대통령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대통령에 오르기 전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재선 임기를 마친 뒤에도 인기가 높지 않았다. 그는 사망 20여년이 지난 1990년대에 비로소 냉전시대의 초석을 닦았던 많은 업적이 새삼 부각됐다. 영국 처칠 수상이 그에게 “서양 문명을 구했다”고 한 말에 걸맞는 평가를 뒤늦게 받았다.(강성학, 8쪽)

트루먼은 1945년 4월부터 1953년 1월까지 두 차례 임기 동안 많은 결단을 내렸다. 유엔 창설, 포츠담 회담, 일본 원자탄 투하, 마샬 플랜, 이스라엘 건국 산파, 베를린 봉쇄에 맞선 공수작전, NATO 창설, 수소탄 개발 결정 그리고 한국전 참전과 유엔군 결성 등.

경북 칠곡 다부동 전적기념관에 세워진 트루먼과 이승만 대통령 동상. 사진제공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장
북한의 침략에 신속한 미군 투입 등으로 6·25 전쟁에서 한국을 구한 것에 비하면 한국내의 평가는 높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그의 동상이 경기도 파주 임진각의 한 켠 미군 참전비 앞에 세워져 있는데 인천자유공원에서 인천항을 내려보며 랜드마크가 된 맥아더 동상과도 차이가 있었다. 정전 협정 70년을 맞은 7월 27일 경북 칠곡 다부동전적기념관 앞에 트루먼과 이승만 대통령 동상이 나란히 세워졌다.
<표: 전쟁 3년간 유엔군 사령관과 미 8군 사령관 변화>
유엔군 사령관
주한 미국 육군 제8군 사령관


이름
재임 기간
이름
재임 기간
더글라스 맥아더
1950년 7월〜1951년 4월
월튼 H. 워커
1948년〜1950년 12월
매슈 B. 리지웨이
1951년 4월〜1952년 5월
매슈 B. 리지웨이
1950년 12월 25일〜1951년 4월 12일
마크 W. 클라크

1952년 5월〜1953년 10월
제임스 A. 밴 플리트
1951년 4월 14일〜1953년 2월 11일


맥스엘 D. 테일러
1953년 2월 11일〜1955년 4월 1일
※미 8군 사령관은 1957년 이후 유엔군 사령관이 겸임
한국전쟁 중의 맥아더와 워커.

● 낙동강방어선을 지킨 ‘불독 장군 워커’

워커(1889〜1950)는 1950년 7월 14일 전황이 최악일 때 도쿄에서 부임했다. ‘죽느냐 지키느냐(stand or die)’의 결의로 낙동강방어선을 최후 방어선으로 지켜냈다. ‘워커 라인’이 무너지지 않아 인천상륙작전 및 북진 반격이 가능했다. 번쩍거리는 철모와 강한 인상처럼 바람앞의 등불 같았던 초기 급박한 전황을 지켜낸 ‘불독 장군’이었다.

하지만 워커는 주변에서 두루 신뢰를 받지 못했다. 전선이 낙동강까지 밀려갈 때 미 육군은 8월 초 리지웨이 중장을 한반도에 파견해 워커의 지휘 방식을 조사했는데 워커의 참모들이 수동적인 태도로 일관하는데 놀랐다고 한다. 일부 연대장들은 전투 경험이 거의 없었고 병사들은 투혼을 발휘하던 2차 대전 때와 달랐다. 워커 파면 얘기까지 나올 만큼 맥아더나 참모들은 워커를 신뢰하지 않았다.(핼버스탬, 219쪽)

경기도 평택 ‘캠프 험프리스’ 미국 기지의 워커 동상.
워커는 낙동강이 급박하다며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을 반대했다. 따라서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진 과정에서 맥아더는 알몬드 소장의 미 10군단 지휘권을 워커에게서 분리하는 이례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승만 대통령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한국군은 왜 잘 싸우지 못하냐며 내놓고 불평을 한데다 매너가 고분고분하지 않아 심기를 건드릴 때가 있었다. 이승만은 이따금 “버릇없는 친구였어”라며 불만을 나타냈다. 백선엽은 워커와 후임인 리지웨이의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잘된 것은 미군 탓, 잘못된 것은 국군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고 했다.(백선엽, 2009, 175쪽)
경기도 양평 지평리 전투 기념관에 전시된 리지웨이 장군. 지평리 전투는 그의 부임후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격퇴하고 유엔군이 자신감을 갖게 한 계기가 됐다. 양평 = 구자룡 기자

● 공중증(恐中症) 극복한 리지웨이의 ‘위력 수색’

리지웨이(1895〜1993)는 워커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숨지면서 12월 27일 한국에 왔다. 그는 오른쪽 가슴 멜빵에 수류탄을 차고 있어 별명이 ‘철의 가슴(Old Iron Tits)’이란 별명이 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는 독일군 후방에서 공수작전을 지휘했다. 그는 맥아더가 육사 교장시절 체육 교관으로 함께 근무했다. 맥아더는 자신의 선택과 천거로 워커 후임으로 왔다고 했다.(리지웨이 회고록 ‘향군’ 1월호, 124쪽)

그가 워커 후임으로 부임한 때는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뒤 북진했다가 중공군 참전으로 올라갈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밀려 내려오던 때였다. 그가 한국에 도착하기 하루 전날인 12월 26일 중공군은 38선을 돌파해 내려왔다.

그는 유엔군이 중공군에 밀려 침체되고 패배주의에 빠져 있는데다 전황에 따라서는 한반도에서 철수를 검토하는 상황에 부임한 것이다. 그는 유엔군의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중공군 섬멸작전’을 전개했다. 그의 ‘위력(威力) 수색’은 섬멸을 위한 전초전격이다. 화력을 갖춘 수색 부대를 적진 깊숙이 투입해 적의 반응을 보고 직접 타격도 가하는 수색 및 기동타격전이다.

‘울프 하운드 작전’으로 불린 수도권 위력 수색에 이어 한강 이남까지 범위를 넓힌 ‘썬더 볼트’ 작전을 전개했다. 1951년 2월 지평리 전투 때는 직접 헬기로 현장을 순시하면서 중과부적인 상황에서 승리를 이끌어 내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자신감을 되찾게 했다. (백선엽 3권, 172쪽)

중공군 부사령관 훙쉐즈는 유리하면 밀어붙여 요충지를 점령하고 불리하면 빠르게 물러나 는 리지웨이의 전술을 중공군이 꼼짝달싹못하게 붙잡아 놓는 ‘자석 전술’이라며 대응에 어려움을 겪었음을 토로했다. 중공군이 보급 문제 때문에 공격에 일정한 주기가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이에 맞춰 대응하게 했다. ‘중공군이 가장 두려워한 장군’이었다.(훙쉐즈, 215쪽)

리지웨이의 한국전쟁 자서전.

● 맥아더와 다른 길을 간 리지웨이

트루먼 대통령과 확전론, 휴전에 대한 견해 차이 등으로 맥아더가 해임돼 후임으로 임명된 리지웨이가 워싱턴의 뜻에 맞춰 맥아더와 다른 지휘 노선을 보인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리지웨이는 “전쟁이 전면전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내 권한 범위 내에서 실행 가능한 모든 조치들을 취하는 것”이 유엔군사령관으로서 자신의 임무라고 했다.(리지웨이, 228쪽) 리지웨이는 미 8군 사령관으로서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온 중공군에 반격을 가해 섬멸작전으로 남진을 저지했다. 하지만 중공군과 대치 상황으로 변한 뒤 유엔군사령관이 되었을 때는 전략적 중점이 ‘공세에서 수세’로 바뀌었다.

백선엽 장군은 리지웨이 8군 사령관의 리더십 덕분에 1·4 후퇴로 내주었던 서울을 되찾고 남쪽으로 밀려가던 전세를 뒤집어 반격해 올라가게 됐다고 했다. 다만 유엔군사령관으로 옮겨간 뒤에는 ‘합참의 지시에 충실해 한반도 전쟁을 관리하는 역할에만 몰두했다’고 평가했다.(백선엽 1권, 169쪽).

그의 수세적이고 제한전쟁에 머무는 전략으로 예성강 너머의 개성이나 동부 전선에서 금강산 일대를 차지하려는 작전에 모두 반대했다고 백선엽은 아쉬움을 나타냈다. 백선엽은 휴전회담이 교착상태이던 1950년 10월 평양∼원산 선까지는 못가도 예성강까지는 탈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반도가 과거 통일국가로서 전통을 갖고 있어 휴전도 통일을 전제로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리지웨이는 어디서 들었는지 과거에도 마한 진한 변한 3국의 세 갈래로 나눠진 적이 있다는 말까지 하면서 공격적인 전선 끌어올리기 작전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백선엽, 2009, 253쪽)

특히 1951년 6월 경 미군이 가진 제7함대 등 전력이라면 동부전선을 마음껏 북상시켜 압박할 수 있다며 밴플리트 8군 사령관도 적극 관심을 보인 고저(庫底) 상륙작전을 불허했다. 이는 한미 4개 군단이 참가해 원산 동남쪽 30km 고저를 점령하는 등 동부 전선을 훅 끌어올리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양구군 해안면과 금강산을 거점으로 하는 적군을 포위 섬멸해 동해안 북위 39도까지 확보하자는 것이었다. 리지웨이는 미 합참에 올리지도 않고 자신의 선에서 차단해 버렸다. 그런 리지웨이는 북진 통일까지 꿈꾸던 이승만과는 ‘물과 기름’처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맥아더의 만주 폭격 등 확전에는 반대 신념이 확고했다. 공군이 만주 지역을 공격하면 공군의 자연적 소모와 전투 손실로 유럽의 미군이 약 2년동안 적의 공군력에 무방비로 노출된다는 것이다. 설사 확전으로 맥아더가 추구하는 승리가 한국에서 달성돼도 다른 곳에서는 균형을 깨뜨리는 부작용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맥아더가 아시아에서 무너지면 유럽도 위험하다며 아시아를 중시한 것과 대비된다.(리지웨이, 207쪽)

전사한 장군과 장군의 아들

6·25 전쟁 3년 중 많은 장병들이 희생됐다. 고위 장성들은 전투를 지휘하다 전사하거나 부대 시찰을 위해 이동 중 자동차나 항공기 사고 등으로 순직했다. 장군의 아들들은 대부분 현장에서 작전 중 전사했다.

서울 도봉구의 워커 장군 전시지 표지석. 구자룡 기자

● 워커, 불의의 교통사고로 순직

1호선 도봉역 2번 출구를 나와 도봉로를 건너 우측으로 조금 걸어가면 대로변 검은 돌 위에 4개의 별이 새겨져 있다. ‘미 육군 대장 월튼 해리스 워커 전사지’ 표지판이다. 표지석 윗면에는 실제 전사한 곳 주소가 ‘도봉 1동 596-5 번지’로 안내되어 있다. 표지석에서 100여m 떨어진 이면 왕복 2차로길인 ‘도봉로 169나길 55’의 건물에 낯익은 워커 장군의 사진이 2층 벽에 새겨져 있다. 낙동강방어선을 지키며 했던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끝까지 한국을 지키겠다’는 말이 그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곳에 걸려있다.

서울 도봉구의 워커 장군 실제 사망 지점에 있는 건물 2층에 워커 사진이 새겨져 있다. 구자룡 기자
워커 미 8군 사령관은 1950년 12월 23일 오전 11시경 의정부 남쪽에서 손수 지프를 운전했다. 이날 미 24사단 소속 외아들 샘 워커 대위 등에게 북진 전공으로 사령관 표창장을 줄 예정이었다. 그의 가방에는 아들에게 줄 표창장이 있었다. 그는 중앙선을 넘어온 국군 6사단 2연대 소속의 민간인 수리공이 몰던 쓰리쿼터 트럭에 측면을 받혀 차가 뒤집어지면서 차체에 깔려 야전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졌다. 부관 등 동승자는 중상을 입었다. 워커는 사후 대장에 추서됐다. 아들 샘 워커도 1977년 최연소 육군 대장으로 진급해 육군 사상 처음으로 부자 4성 장군이 됐다.
워커 장군의 이름을 띠 지어진 서울 워커힐 호텔의 한 켠에 워커장군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구자룡 기자
중공군 부사령관 훙쉐즈(洪學之)는 ‘워커가 후퇴하던 길에 자동차 사고로 숨졌는데 상대의 후퇴길이 어느 정도로 혼란스러웠는지 알 수 있다’고 기록했다. 정확한 전사를 기록하기보다 적장의 갑작스런 죽음을 자신들 편의에 맞게 꾸민 것이다.(훙쉐즈, 174쪽) 심지어 북한중앙통신은 2년여가 지난 기사에서 워커가 인민 군대의 매복에 걸려 사망했다고 날조했다.

● 헬기 사고, 작전 중 사망 미국 장교들

경기도 여주의 무어 장군 추모 전적비.
브라이언트 무어 소장(1894〜1951)은 1951년 1월 31일 제9 군단장으로 부임해 3주만인 2월 24일 ‘킬러 작전’을 전개하며 ‘남한강 도하 작전’을 지휘하던 중 여주 북쪽 한강변에서 헬기 추락으로 순직했다. ‘킬러 작전’은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극복하고 반격의 전환점이 된 지평리 전투(2월 13〜15일) 이후 적에게 휴식과 재편성의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한 공세작전이었다. 사고 현장인 경기도 여주에는 ‘무어 장군 추모 전적비’와 ‘무어 장군길’이 있다. 6·25 전쟁에서 전사한 미군 장성은 워커 중장과 무어 소장 두 명이다.

6·25 전쟁에 참전한 미군 장성 아들은 모두 142명이다. 마크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 워커와 밴 플리트 8군 사령관은 부자(父子) 모두 함께 전장에 있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아들은 대통령 당선 이후에도 미 3사단 대대장으로 복무했다. 미군 고위 장성의 자녀 중 사상자는 35명이었다.

서울 노원구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있는 미 육사 1950년 졸업 기수 전사자 추모비. 6·25 전쟁이 나던 해 졸업해 투입돼 초급 장교로 근무하다 숨진 것이다. 구자룡 기자
서울 노원구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있는 미 육사 1949년 졸업생 전사자 추모비. 동기생들이 세워놓은 것이라고 한다. 구자룡 기자
미 해병 제1항공사단장의 아들 해리스 소령은 장진호 전투에서 아버지의 항공 지원하에 육상에서 장진호를 돌파하는 임무를 수행하다 하갈우리에서 전사했다. 클라크의 아들 마크 빌 클라크 대위는 세 번이나 부상을 입어 제대 후 후유증으로 사망했다.(‘1129일의 전쟁’, 414쪽)

장진호 전투에서 호수 동쪽을 맡았다가 괴멸적 타격을 입은 미 육군 7사단 31연대의 매클린 연대장은 적군을 아군으로 오인해 접근하다 붙잡힌 뒤 사망했다. 그는 중공군 80사단에 포위돼 철수 작전을 벌이던 1950년 11월 29일 장진호 동쪽 풍류리강 안곡에서 남쪽에서 접근하는 부대를 보고 후방에서 오는 예하 2대대로 착각하고 손을 흔들며 접근했다. 그는 중공군 병사들에게 끌려간 뒤 연락이 끊겼다. 그는 포로가 되어 이동하다 12월 초 부상당한 상처 때문에 사망한 것으로 뒤에 알려졌다. 동료들은 그를 도로 옆에 묻어주었고 실종 8개월 후 그에게 수훈십자훈장이 수여되었다.(애플먼, 189쪽)

경기도 오산 미공군 기지의 밴플리트 중위의 흉상.

● 밴 플리트 2세의 마지막 편지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의 아들 제임스 밴 플리트 주니어 중위는 아버지가 미 8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한국 근무를 자원했다. 그는 1952년 4월 4일 B-26 폭격기를 몰고 압록강 남쪽 80km 지점의 북한 순천 지역에서 폭격 임무를 수행하던 중 대공포를 맞고 실종됐다.

그는 밴 플리트가 결혼 10년 만에 얻은 외아들이었다. 밴플리트 중위는 2년 전 결혼한 부인과 사이에서 돌이 갓 지난 아들이 있었다. 밴 플리트 장군은 “내 아들만 죽은 것이 아니다. 내 자식을 찾는 일로 다른 장병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해서는 안 된다”며 적지에서의 수색 작업 중단을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에게 요청했다.

밴 플리트는 자신의 아들을 잃은 뒤 자신처럼 한국전선에서 아들을 잃어버린 부모들에게 위로 전문을 보냈다. “모든 부모님들이 저와 같은 심정이라고 믿습니다. 자신의 삶을 내놓는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습니다”(남정옥, 105쪽)

아버지처럼 전장에서 가족에게 자주 편지를 썼던 밴 플리트 중위는 실종 보름 전 역시 어머니에게 ‘군인의 아내에게’로 시작하는 ‘마지막 편지’를 보냈다. “저는 모든 사람이 두려움없이 살 수 있는 권리를 위해 싸우는 아버지에게 조그마한 힘이 되어 주기 위해 한국에 왔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하지 마시고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소집된 승무원(항공사, 폭격수, 기관총사수)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어머니의 눈물이 이 편지를 적시지 않았으면 합니다.”(남정옥, 101쪽)

밴 플리트 2세처럼 6·25 전쟁에서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미군 조종사는 1920명에 달했다. 한미동맹친선협회가 밴 플리트 대위(사후 대위 추서)의 흉상을 오산 공군기지에 건립한 것은 이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국가보훈처는 2022년 9월 정부세종청사 내 보훈처 건물 5층 회의실 명칭을 ‘밴플리트홀’로 바꿨다.

경남 하동 ‘쇠고개 전투’ 현장의 채병덕 장군 전사비.

● 백의종군하다 전사한 채병덕 장군

6·25 전쟁이 터졌을 때 육군총참모장(참모총장)이었던 채병덕 소장은 북한군이 서울을 함락한 직후인 6월 30일 해임됐다. 채 소장은 백의종군을 자청해 후방에서 병력을 보충하고 새로운 부대를 편성하는 것이 임무인 경남지구 편성군사령관이 됐다.

그는 7월 23일 호남을 통해 영남으로 장갑차를 앞세우고 오는 북한군 1개 대대를 섬멸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24일 부산과 마산의 병원에서 모은 가벼운 부상병으로 1개 대대를 편성해 떠났다. 그 때 갓 태어난 아들 이름을 ‘영광의 진격’이라는 뜻의 영진으로 짓고 하동으로 떠났다. 채병덕은 미군 19연대와 합동 작전을 벌이다 7월 27일 전사했다. 아군의 군복과 장비를 착용한 북한군을 검문하기 위해 접근해 “적인가 아군인가?” 라며 묻자 바로 총격을 가했다. 경남 하동 ‘쇠고개 전투’ 현장에는 전사비가 세워졌다. 정부는 그를 중장으로 진급시키고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하였다.

경남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 옆 흥남철수 기념공원에 세워진 김백일 장군 동상. 거제 = 구자룡 기자
1951년 3월 27일 리지웨이 사령관은 여주 미 8군 전진 지휘소에서 한미 양국의 사단장과 군단장을 전원 소집했다. 이날 여주회의를 마치고 경비행기 편으로 강릉으로 귀환하던 김백일 1군단장(소장)이 악천후로 탑승기가 대관령 산중에 추락했다. 유해는 5월 9일에나 발견됐다.

김백일 소장은 흥남철수의 영웅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이용문 준장.
이용문 준장(1916〜1953)은 육군참모학교 부교장 때 6·25가 터졌다. 서울에서 부대가 와해되자 남산에 숨어서 게릴라전을 폈고 서울이 공산 치하에 들어간 뒤에는 행상으로 변장해 북한군 동향을 파악하다 이듬해 6월 준장으로 군에 복귀했다. 1953년 남부지구경비사령관으로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 토벌 작전을 지휘했다. 정전 협정 체결을 한 달여 앞둔 그해 6월 24일 남원 상공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로 순직했다. 검사장 출신 전 자민련 소속 이건개 전 국회의원의 부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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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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