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미래 강원 노포 탐방] 56. 춘천 명곡사

김진형 2023. 8. 23.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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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이라는 음악의 힘이 지킨
아날로그 감성 마지막 보루
시청 앞 골목 20㎡ 남짓한 매장
이석범 대표 1981년부터 운영
최신 앨범·희귀 음반 장르 불문
LP·CD·카세트 테이프 총망라
음악 애호가들 빛과 소금 역할
가수 나얼 1년에 1~2번씩 방문
레코드판 찾는 MZ 발길 늘기도
“건강 허락 때까지 가게 지킬 것”
춘천 명곡사 내부

시간이 지나도 다시 찾게 되는 것이 명곡이고 고전이다. 시대를 초월해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것은 무엇인가. 잊을만 하면 멜로디가 다시 떠오르고 오랜 세월 입에서 오르내린다.

춘천시청 앞 명곡사 앞을 지날 때면, 그 때 그 노래가 흘러나온다. 홀로 시간을 보내기도, 지갑을 비우기도 좋은 장소다.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40년 넘게 자리를 지켜온 ‘음악의 보물창고’를 두드렸다. 사서 고생은 모르겠지만 음악은 원래 사서 듣는 것이다.

‘명곡사 아저씨’로 불리는 이석범(75) 대표는 평생을 춘천의 음악지킴이로 살아왔다. 전축 판매를 했던 그는 1981년 3월 춘천 명동에 가게를 차렸다. 처음에는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먹고 살기 위해서였다. 호황기에는 음반가게가 18곳 정도 됐지만 산업 사양화로 이제 춘천에 남은 곳은 한 곳 뿐이다. 90년대 음악 플레이어의 주도권이 LP에서 CD로 넘어갔을 때만 해도 좋았다. 음질도 깨끗하고 사용법도 편리했다. 하지만 MP3 보급, 스트리밍 서비스 활성화, 군인들의 스마트폰 사용 등이 연이은 악재였다. 차량에서 듣던 음악은 이제는 CD와 카세트 대신, USB나 블루투스가 대체했다.

20㎡ 남짓한 가게에서는 오래된 음반부터 최신 앨범까지 종류별로 다채롭게 만날 수 있다. 클래식부터 대중음악, 블루스, 재즈, 팝, 힙합, 전통, 종교음악… 심지어 품바까지 없는 장르를 찾아보기 어렵다. LP, CD, 카세트 등 취급하는 매체도 다양했다. 조금만 공을 들이면 희귀음반도 구할 수 있다. 손님들이 절판된 앨범을 찾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음반은 오프라인에서 사는 감동이 있어요. 실제로 보고 느낄 수가 있잖아요. 여러 음반을 직접 찾아보는 정겨움도 생기고요”

이 대표의 말이 공감됐다. 음반 수는 세어보지 못했다고 하나, 1만 장은 족히 넘어보였다. 대화 도중 여러 손님들이 가게를 찾았다. 반클라이번 우승자 임윤찬과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으로 유명해진 레드윔프스, 아이돌 그룹 스트레이키즈 등 손님들의 취향도 제각각이었다. 중학생으로 보이는 손님이 아버지에게 “만원만 부쳐달라”고 전화를 거는 모습이 보였다. 며칠 전에는 멀리 경북 포항에서 옛 손님이 추억을 더듬어 다시 찾아왔다고 한다. 처음 생각했던 음반 대신 다른 앨범을 손에 들고 나가는 경우도 다반사다. 비록 모든 음반을 구비해 둘 수는 없지만 전화로 미리 요청하면 음반을 준비해 두기도 한다.

“자리를 지켜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가끔 들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제가 위안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받고 있는 것 같아요. 그분들이 있어주셔서 지금은 참 고맙다는 생각 뿐이에요. 손님과 같이 늙어가는 기분도 들고요. 돈을 떠나서 그런 마음으로 여유와 행복을 갖고 사는 거죠.”

이석범 대표가 추천한 베르너 토마스의 첼로 앨범 ‘재클린의 눈물’

단골 손님에 대한 기억도 여럿이다. 학창시절 메탈 음악을 즐겨 듣던 ‘소양보리밥’집 아이는 훗날 ‘소보’라는 가수가 되어 ‘명곡사’를 위한 헌정곡을 발표했다. 국내 R&B 보컬을 대표하는 가수 ‘나얼’도 1년에 한 두 번쯤 찾았다고 한다. 이 대표가 미처 얼굴을 몰라봤을 뿐 더 많은 음악인들이 이곳을 방문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음악사를 꿰뚫고 있는 이 대표는 단골 손님의 음악 취향도 기억하고 앨범을 추천한다. 그렇게 명곡사는 춘천에 오면 꼭 한 번 들러야 하는 음악애호가들의 ‘빛과 소금’이 됐다. 예전에는 각종 음악회 티켓을 대행 판매했고, 유니버설뮤직코리아로부터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음악은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고, 유행처럼 돌고 돈다. 몇년 전부터 젊은 층 사이에서 LP 수요가 조금씩 늘고 있다. 턴테이블이 없어도 앨범의 소장가치나 디자인을 보고 사는 경우도 늘었다. 이후에는 LP가 가진 섬세하고 따뜻한 음색에 반한다. “뭐든 손이 많이 가야 정이 든다”는 이 대표의 설명이다. LP 제작 공장은 국내에 한 곳 뿐이고, 나머지는 전량 해외 수입이다. 이 대표는 “참 세월이라는게 돌고 도는 것만 같다. 어떻게 젊은 층이 LP를 알고 사는가,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고 했다.

이석범 대표는 좋아하는 LP음반으로 앙드레 레비의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앨범과 오펜바흐의 ‘재클린의 눈물’을 추천했다. ‘재클린의 눈물’은 오펜바흐가 작곡한 곡으로 전설적인 첼리스트 재클린 뒤 프레를 기리기 위해 베르너 토마스가 이름을 붙였다. 국내 가수로는 최백호와 나훈아, 팝 가수로는 잉글버트 험퍼딩크를 추천했다.

손님들에게 당부하는 것은 한 가지다. 절대 음반을 버리지 말라는 것. 버리고 나면 다 클래식이 되고 소장가치가 높아진다. 한 때, 가게에서 5만원 가량에 팔렸던 아이유의 희귀 앨범 ‘꽃갈피’는 그 종류에 따라 온라인상에서 500만원을 호가한다.

가게를 먹여 살리는 주 수입원은 역시 아이돌 그룹의 음반이다. 춘천 출신 민지가 소속해 있는 ‘뉴진스’와 ‘BTS’의 음반이 요즘 한창 잘 나간다. 투모로우 바이 투게더, 세븐틴, 블랙핑크, 오마이걸 등도 빼놓을 수 없다. 새로운 세대의 등장이 지금의 명곡사를 만든다.

물론, 음반가게 운영은 어렵다. 팔리지 않는 앨범은 재고로 쌓인다. 일부는 오랜 세월을 지나 비로소 주인을 찾는다. 가끔씩 가게 안에 있어도 못 찾는 앨범도 있다. ‘나만의 방식’으로 90년대를 풍미한 김기하를 비롯해 시나위 출신 손성훈과 삐삐밴드의 카세트 앨범이 보인다. 국내 록밴드 ‘무당’과 ‘피아’의 앨범에도 눈이 가고, 통로 아래쪽에서는 포크 음악의 거장 ‘조안 바에즈’가 손을 흔드는 것만 같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음악을 듣고 있다는 기자의 말에 이석범 대표는 ‘세상의 모든 음악’을 추천했다.

최근 본지와 인터뷰를 가진 이석범 명곡사 대표는 “명곡사를 사랑하시는 분들이 있기 때문에 이 가게를 지키고 있는 것”이라며 “이곳에서 음악을 들으며 살아가는 과정 자체가 좋다”고 말했다.

“음악을 많이 들으면 마음이 아름다워집니다. 편안함을 갖게 되고, 나쁜 짓을 할 수 없어요. 음악이 우리에게 가르친 아름다운 믿음이 있잖아요.”

이석범 대표는 여전히 음악의 힘을 믿는다. 단순히 가게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보다는, 사람들과 위안을 주고 받는 것에 더 큰 가치를 둔다. 명곡사가 없어지면, 춘천에서 음반은 어디서 사야 할까. 이 대표는 “도청 소재지이자 문화도시 춘천에는 최소한 이런 가게들이 몇 곳은 있어야 한다”며 “이렇게 아름다운 음악이 호반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건강이 허락하는 이상 가게를 계속 지키고 싶은 마음이다. 21세기의 새로운 고전이 될 음반들과 함께 지금도 손님을 기다린다. 오늘도 ‘플레이 더 명곡사’다.

“여기가 마지막 보루죠. 마지막, 그게 있어요.” 김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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