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 시대에 뿌린 ‘정보화 씨앗’… 1975년 한글로 쓴 첫 컴퓨터 교과서

채민기 기자 2023. 8. 22.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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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현대사 보물] [19] ‘한국 전산학 박사 1호’ 문송천
경기 과천시 자택에서 만난 문송천 KAIST 명예교수는 “미래의 먹거리를 지금처럼 하드웨어에서만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면서 “지도자들이 국가 미래 비전에 소프트웨어를 포함시켜야 한다”고 했다. 오른쪽 책은 1970년대 실업계 고등학교용으로 집필했던 한글 교과서들. 왼쪽 마그네틱 테이프에는 그가 국내 기술로 개발했던 데이터베이스 관리 프로그램이 저장돼 있다. /이태경 기자

‘대한민국 전산학 박사 1호’의 서재는 의외로 평범했다. 지난 18일 문송천(71) KAIST 경영공학부 명예교수의 경기 과천 자택에 들어서면서 골동품 같은 구형 컴퓨터와 온갖 부품으로 가득한 작은 박물관을 상상했다. 그러나 책상 위에 노트북 한 대가 있고 책꽂이에 책이 꽂혀 있을 뿐이었다. 아파트에서 흔히 보는 ‘서재방’ 풍경이었다.

다소 실망하는 기색이 드러났는지 문 교수는 “소프트웨어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IT(정보 기술)의 60%는 소프트웨어”라면서 “IT라고 하면 하드웨어만 떠올리는 기계 장비 일변도의 생각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문 교수는 대한민국 IT, 특히 소프트웨어 역사의 산증인이다. 고교 시절 문과였지만 컴퓨터가 미래를 바꾼다는 기사를 접한 뒤 컴퓨터에 빠져들었고, 1971년 당시 국내 유일했던 숭실대 전자계산학과에 2기생으로 입학했다. 숭실대 전신인 숭전대 초대 총장 김형남(1905~1978) 박사가 미국에서 접한 컴퓨터를 적극 도입해 숭실대에 국내 첫 전자계산학과가 설립됐다고 한다.

전산학 대학원 과정이 설치돼 있지 않던 시절에 숭실대를 졸업한 문 교수는 KAIST 수학 및 물리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1977년 스물넷에 모교 숭실대 교수가 됐다. 지식의 깊이에 스스로 한계를 느끼고 1981년 미국 일리노이대학교(어바나샴페인)로 유학을 떠났다. 3년 만에 전산학 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와 KAIST 교수를 지내고 2018년 퇴임했다.

그는 “유학 시절엔 한국에서 배워 온 밑천이 일주일 만에 바닥나 학부 1학년 수업부터 다시 들어야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모두들 어렵다고 기피하는 클라우드(가상 데이터 공간) 컴퓨팅과 블록체인(분산 저장·처리) 분야를 전공한 그는 “남들 안 하는 것만 해온 인생”이라고 했다.

◇산업화 시대에 뿌린 정보화의 씨앗

책꽂이에는 우리나라 컴퓨터 교육의 역사를 보여주는 책들이 꽂혀 있었다. ‘IT 강국’ 대한민국이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한창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던 1970년대에 이미 정보화의 씨를 뿌리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료들이다.

‘컴퓨터 개론’은 1975년 석사 과정 1년 차에, ‘코우볼 프로그래밍’과 ‘어셈블리어 프로그래밍’은 숭실대 부임 후 1977년에 집필한 실업계 고등학교용 교과서다. 한글로 된 첫 컴퓨터 교과서이기도 하다.

1970년대 후반 공무원들을 상대로 강의할 때 사용한 교재. /이태경 기자

“대학 시절 교과서가 전부 영어로 돼 있어서 저는 원서로만 공부했습니다. 컴퓨터 용어가 국내에 도입이 안 돼 있다 보니 영한사전으로는 해석도 안 돼서 영영사전만 봤지요. 당시 실업계 학교에서는 일본의 컴퓨터 학원에서 배워 온 선생님들이 교과서 없이 수업을 하는 형편이었어요.” 문 교수는 “19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반 사이에 배출된 국내 코딩 인력은 이 책들로 교육받은 이들”이라고 했다.

이후 문 교수는 한글 교재 17종을 비롯해 총 22권의 책을 썼다. 햇볕 정책을 폈던 김대중 정부의 방침에 따라 북한에 15종의 책을 보내기도 했다. “김일성 대학과 김책 공대에서 우리가 보낸 책으로 공부한 것으로 안다”고 했다. 북한이 해킹 등 사이버전(戰)을 벌이는 데 대해서는 “우리의 지원과는 무관하며, 소프트웨어는 설비가 필요 없는 두뇌 산업이기 때문에 북한도 파고들면 잘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실제로 세계적인 소프트웨어 경진대회에서 후진국이 입상하는 경우도 많다”면서 “다만 북한이 기술을 악용한다는 사실이 문제”라고 했다.

‘정보공동활용체제반 교재’라는 책은 숭실대 부임 이후 유학길에 오르기 전까지 직접 집필해 고위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강의했던 교재다. 총무처의 요청을 받아 서울 삼청동에 있었던 전자계산소 강당에서 5년간 강의했다.

“일선에서 전산화가 정착되지 않은 시기였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행정 전산화에 강한 의지를 가지고 매년 진행 상황을 체크했습니다. 그 리더십 덕에 공무원 교육이 이뤄졌고 공직 사회에 ‘컴퓨터 마인드’가 형성됐습니다.” 박정희 정부는 1967년 경제기획원에 국내 최초로 대형 컴퓨터를 도입하고 1970년대에는 행정 전산화 기본 계획을 수립해 추진하는 등 정보화에 적극적이었다.

문 교수는 “숭실대 전산학과 설립(1970년)을 비롯한 학계의 노력,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 도전(1974년), 전산화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의지가 맞물려 IT 강국의 원동력이 됐다”면서 “1980년대 중반에 본격적인 노력을 시작한 대부분 국가들보다 10년쯤 앞섰기에 지금까지 강국의 면모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IT 강국 대한민국… 소프트웨어는 아직”

IT 강국 대한민국의 상징은 스마트폰과 메모리 반도체, 초고속 인터넷 같은 것들이다. 엄밀히 말하면 IT 강국이 아니라 ‘첨단 굴뚝산업 강국’이라는 의미다. 문 교수는 “소프트웨어는 아직 미국과 영국에 한참 뒤처진다”고 했다. “우리나라는 두뇌 산업을 본격적으로 해본 적이 없습니다. 공장 세우고 조직력을 앞세워 물건 만드는 건 잘하지만 방에 혼자 틀어박혀서 머리 짜내는 데는 약해요. 단순 코딩과 달리 고난도 코딩은 그런 집요한 노력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는 “약 530조원 규모인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삼성전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20% 정도 되는 데 비해 2500조원 규모의 소프트웨어 시장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비율은 1%가 안 된다”고 했다.

문 교수도 직접 고난도 소프트웨어를 개발한 적이 있다. 1990년 데이터베이스(DB) 관리 시스템 IM을 개발했고, 1992년에는 여기에 블록체인 기술을 적용해 여러 데이터베이스를 하나의 시스템처럼 쓸 수 있게 해주는 DIME을 개발했다. 모두 국내 최초이자 아시아 최초였다.

문 교수는 IM과 DIME이 저장된 마그네틱 테이프를 꺼내 보여줬다. “한 국가의 소프트웨어 역량은 운영 체제(OS)나 데이터베이스 엔진 같은 핵심 프로그램을 외국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 개발할 수 있느냐에서 판가름 납니다. 마이크로소프트(MS), IBM, 오라클 같은 세계적 소프트웨어 기업들이 장악한 분야지요. IM과 DIME은 우리도 그런 첨단 개발 역량이 있다는 걸 보여준 작품이었습니다.”

상용화에는 실패했다. “1994년 빌 게이츠의 영입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도 IM과 DIME의 상용화 때문이었는데 결국 국내 기업들이 외면했지요.” 제자들이 MS와 구글로 떠나고 그는 국립대 전산학과 교수직의 미래를 두고 고심하다가 경영대학으로 소속을 옮겼다. 이후 금융정보분석원(FIU) 혐의거래적발시스템을 비롯해 국방부·특허청·은행 등 민관 정보 시스템의 문제점을 개선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대한민국의 소프트웨어 역량을 키우기 위해 “기업이 소프트웨어로 눈을 돌리고 적극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여건을 정부가 만들어줘야 한다”고 했다. 대학 교육의 질적 변화도 시급하다고 했다. “미국은 운영 체제(OS)나 데이터베이스(DB) 수업을 듣는 학생이 학기말에 소형 OS나 DB를 직접 개발하게 합니다. 우리는 그런 걸 시키면 교수가 강의 평가를 좋게 받기 어려우니 학생들에게 수준높은 과제를 요구하지 않지요. 선진국을 따라가려면 교수들이 눈치보지 않고 실질적인 교육을 소신껏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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