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글씨로 써내려간 ‘평화의 외침’…언젠가 북한도 달릴 수 있었으면

성백 시각예술가·행위예술가 2023. 8. 22.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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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아츠버스 유럽통신 <하> 덩케르크·하노버·베를린 그리고

- 2차 대전 격전지 덩케르크서
- ‘STOP WAR’ 퍼포먼스 벌여
- 베를린장벽기념관 야외광장선
- 그간 방문한 도시 한지에 기록

- 윤이상 집 곳곳 분단 고뇌 느껴져
- 남북예술가 함께 작업할 날 고대

- 세계 평화 간절히 꿈꾸었던
- 한 달간 뜨거운 여정 마무리

7월 21일 프랑스 최북단 항구도시 덩케르크에 도착했다. 우리는 2차 세계대전 중 펼쳐진 덩케르크 철수작전을 소재로 한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2017년 영화의 배경이 된, 격전지 덩케르크 해변을 둘러보았다. 조용하고 길게 펼쳐진 해변을 보니 이곳에서 왜 대규모 구출 작전이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우리는 ‘STOP WAR’라고 쓴 큰 걸개그림을 배경으로 각자 영역에서 퍼포먼스를 펼쳤다. 나는 2차 세계대전 때 사용했던 벙커 구조물의 외벽을 탁본 작업했다.

지난달 30일 독일 베를린장벽기념관에서 홍라무(오른쪽) 작가와 성백 작가가 베를린장벽을 상징하는 거대한 철판 앞에서 평화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아츠버스 월드투어 프로젝트 제공


폴란드 아우슈비츠에서도 그렇고, 유럽에 와서 느낀 점이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 좋은 사람이 있는 곳에서 1차, 2차 세계대전에서 수많은 삶을 죽였다.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한 전쟁과 학살이 이곳에서 일어났다. 믿어지지 않았다. 누가 전쟁을 만들고 기획하는 걸까? 지금도 러시아는 우크라니아를 침공해 전쟁을 하고 있다. 이런 침공이 정당한지, 누구를 위한 전쟁인지, 배후에 어떤 음모가 있는지, 모르겠다.

멈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3차 세계대전과 핵전쟁 위험에 빠진다. 인류 공동의 안녕이 특정 국가의 이익이나 이념에 의해 희생되고 있다. 덩케르크에서도 2차 세계대전 때 40여만 명 연합군의 목숨을 구하기 위한 상륙작전이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의 희생이 있었을까?

▮아! 시동이 걸렸다

위 사진은 아츠버스 예술가와 현지 작가·시민이 평화 퍼포먼스를 함께하는 모습.


7월 24일 화요일. 독일 하노버 도착. 베를린으로 가기 전 우리는 하노버에서 2박 하기로 했다. 일행 모두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숙소에 도착한 뒤 권영일 작가와 나는 마트에 가려고 아츠버스(ARTsBUS)에 올라 시동을 거는데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여기까지 잘 견디며 왔는데. 거의 다 왔는데 여기서 멈추다니. 아츠버스와 함께했던 지난 몇 년의 시간이 눈앞을 스친다. 여기서 멈출 순 없다. 어떻게 해서든 내 손으로 살려내겠다고 다짐하며 찬찬히 차를 살피고 이것저것 만져 본다.

2019년 유라시아 횡단 당시 시베리아 한복판에서 아츠버스가 갑자기 멈춰섰던 기억을 떠올렸다. 차량의 퓨즈 문제로 고장 났던 것이 생각나 배터리에 연결된 퓨즈를 만져 본다. 이래 저래 만지고 먼지를 털어내고 풀었다 죄기를 반복하니, 시동이 걸린다. 야호! 일행과 함께 꿀맛 같은 저녁밥을 먹었다.

7월 26일 수요일. 비가 오다 그치기를 반복한다. 어제는 소 뒷걸음에 쥐잡 듯 아츠버스의 시동이 걸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동을 걸어 봤는데 또 안 걸린다. 왜! 심각한 손상이 아닌지 걱정됐다. 인터넷을 검색하고 유튜브를 찾아보고, 시차를 확인해 가며 한국의 지인에게 전화해 증세를 말해주었다. 전자· 전기 계통으로 이상이 있으니 그렇게 알고 고쳐보라고 한다. 배터리 퓨즈 등을 점검했다. 배터리 연결 조임쇠를 교체해 본다. 아! 시동 걸렸다. 아츠버스는 다시 뜨겁게 심장을 돌린다. 일행은 연신 손뼉을 치며 기뻐한다.

하노버의 아침이 상쾌하다. 2019년부터 아츠버스를 타고 유라시아를 지나 독일까지 몰았다. 그리고 2020년 한 달간 사전 답사차 유럽 일주를 했다. 2022년 5월 아이슬란드 아트프로젝트 참가차 잠시 베를린을 경유할 때 현지에 주차해 두었던 아츠버스의 배터리를 교체하고 일주일 정도 베를린을 유랑했다. 그리고 올해 다시 아츠버스를 몰고 한 달간 유럽을 유랑하고 있다. 그동안 무탈하게 여기까지 와줘서 고맙다. 지면을 통해 다 전하지 못하지만, 하루 하루 사건 사고로 스펙터클하다.

▮베를린장벽 기념관에서

7월 28일 독일 베를린으로 우리는 다시 돌아왔다. 한 달간의 이번 여정의 끝은 베를린이다. 마침 한국 작가들과 독일 작가들이 함께하는 전시가 있어 베를린장벽 기념관을 들렀다. 어차피 우리도 이곳에서 이번 2023 아츠버스 월드 투어 프로젝트의 마지막 프로그램으로 퍼포먼스를 할 계획이었다. 우리는 그들의 전시 작품과 퍼포먼스를 관람하고 내일 우리가 하고자 하는 퍼포먼스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공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문제는 날씨였다. 최근 베를린 날씨가 하루에도 2, 3번씩 소낙비가 오는 여름철 장마여서 공연 시간을 잡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다행히 7월 30일은 날씨가 흐리지만 비가오지 않아 야외에서 퍼포먼스를 하기에 좋았다. 이날 우리는 그동안 해왔던 모든 작업을 되새기며 작가적 역량을 모두 발휘한 퍼포먼스를 펼쳤다.

유지환 작가가 우리 전통 한지를 30m 정도 바닥에 펼치면서 나가면, 심홍재 작가는 우리 일행과 아츠버스가 그동안 달려왔던 나라와 도시를 붓글씨로 써 내려갔다. 독일 베를린 올림픽스타디움을 시작으로 폴란드 아우슈비츠 유대인 포로수용소, 체코 트리 시크릿, 스위스, 벨기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프랑스 뮐루즈와 파리, 다시 베를린 장벽기념관까지. 10개국 20여 도시의 기억을 한 획 한 획 정성스럽게 써 내려갔다. 그 뒤를 필자가 흙 한줌과 작은 들꽃 한송이를 들고 걸어 들어가 심홍재 작가가 내려놓은 붓 위에 올려 놓았다.

이때 홍라무 작가가 베를린 장벽을 상징하는, 녹으로 붉게 물든 거대한 철판 앞으로 천천히 등장한다. 나는 홍라무 작가를 향해 물을 흥건히 묻힌 흰 천으로 철판 위를 닦아내듯 수평선을 그리며 다가가 작가의 배경을 닦아내는 퍼포먼스를 했다. 우리는 그러한 행위를 통해 우리가 걸어온 평화를 위한 외침을 시각으로 보이고자 했다.

이 퍼포먼스는 이곳 베를린 장벽기념관을 찾는 많은 관광객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퍼포먼스 이후 관객들에게서 이런저런 질문을 받고 답변하는 시간을 가졌다. 우리는 그렇게 2023 아츠버스 월드 투어 프로젝트-유럽 기행을 마무리했다.

▮고 윤이상 선생의 베를린 집

다음날 우리는 세계 현대음악의 거장 고 윤이상 선생의 베를린 집으로 갔다. 작곡가 윤이상 선생께서 생전에 창작활동을 했던 곳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남북한 모두에서 위대한 예술가로 기록됐고, 유럽에서도 한국인의 예술 재능을 선보인 예술가이지만 정치적인 핍박을 받았던 선생의 고뇌가 집안 곳곳에서 느껴졌다. 독일인의 기록과 정리도 돋보였다. 연도별로 구별한 파일이 보관장에 가득 정리돼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복사본으로 정리돼 있어 한 번 더 놀랐다. 통일이 되어 남북한 예술가들이 만나 함께 창작활동을 나눌 수 있었으면 한다.

아츠버스는 2019년부터 약 5만km를, 부산에서 출발해 혹한의 시베리아를 거쳐 유럽 일대까지 거침없이 달렸다. 그러나 약 500km 구간인 북한만은 지나지 못해 동해에서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유라시아를 지났다. 정말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고마웠어요! 모두

한 달여 프로젝트에서 예술가로서 최고의 역량을 발휘한 일행 모두에게 깊은 존경의 마음을 전한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좋은 작품을 창조하고 예술가의 품격을 잃지 않는 모습에서 많은 배움을 얻었다. 현재 아츠버스는 독일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는 교민 권오복 님의 도움으로 베를린에 장기 주차돼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육로 이동이 힘들어져 이렇게 선택했다. 우리는 유럽 현지에 아츠버스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한국 작가의 유럽 활동을 지원하는 아츠버스 레지던스로 활용할 궁리도 하고 있다. 부산시·부산문화재단의 지원과 국제신문의 지면 할애에 고마움을 전한다. 인연을 맺은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

▶참여 작가=기획단장 성백(시각·행위예술, 부산) 심홍재(시각·행위예술, 전주) 유지환(시각·행위예술, 서울) 홍라무(부토, 제주) 권영일(사진, 곡성), 배시아(시각·행위예술, 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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