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레이도, 뉴턴도…유리가 없었으면 ‘과학혁명’은 없었다 [김기철의 역사를 바꾼 사물들]

김기철 기자(kimin@mk.co.kr) 2023. 8. 19.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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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철의 역사를 바꾼 사물들 10 - ‘관찰’과 ‘실험’을 가능하게 해준 유리

1609년 7월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베네치아에 들렀다가 귀가 번쩍 뜨이는 소식을 들었다. 네덜란드의 안경 제작자인 한스 리퍼세이라는 사람이 렌즈를 두 개 배치해서 ‘망원경’이라는 물건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갈릴레이는 그 물건의 중요성을 단박에 알아 차렸다. 아, 모두가 예상하는 것처럼 ‘망원경’을 이용해서 천체를 관측할 수 있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갈릴레이는 멀리 있는 물체를 볼 수 있는 도구라면 군사와 무역에서 매우 중요한 용도로 사용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특히 망원경을 이용해서 베네치아 항구로 들어오고 있는 배가 어떤 배인지를 누구보다 먼저 알아낼 수 있다면 큰 돈을 벌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요즘으로 치면 투자 정보를 먼저 알게 되는 셈이다.

8월초에 갈릴레이는 네덜란드에서 온 사람이 새로 발명된 망원경을 갖고 파도바에 도착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서둘러 베네치아에서 파도바로 돌아왔으나 길이 엇갈리고 말았다. 그 사람은 갈릴레이와 반대로 베네치아로 향했다.

오른 손에 망원경을 쥐고 있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모습
갈릴레이는 그 사람을 따라가는 대신 네덜란드산 렌즈를 사서 직접 망원경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오목렌즈와 볼록렌즈를 교차해서 망원경을 만들었다. 그날이 1609년 8월 4일이었다.

갈릴레이는 자기가 개발한 망원경을 베네치아 총독 앞에서 시범을 보인 뒤 선물로 상납했다. 그 덕분에 갈릴레이는 파도바대학교 종신 교수직을 얻었다.

망원경에 대한 연구를 지속한 갈릴레이는 1609년 12월 20배율의 망원경을 완성했고, 1610년초 그 망원경으로 목성에서 가장 밝고 가장 큰 위성 네 개를 발견했다. 이 발견으로 ‘지구중심설’은 무너진다. 이 위성을 우리는 지금도 ‘갈릴레이 위성(Galilean moons)’이라고 부른다.

과학의 근본은 ‘관찰’과 ‘실험’이다. 엄정한 ‘관찰’과 ‘실험’을 통해 논증된 사실에 기반한 진리가 바로 과학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리’는 인류의 과학을 발전시킨 일등공신이다. 유리가 없었으면 ‘관찰’과 ‘실험’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볼 수 있는 가시거리 밖의 사물까지 관찰할 수 있게 해준 망원경으로 인해 천체물리학을 시작으로 근대 과학이 중세의 몽매에서 깨어날 수 있었고, 인간이 들여다볼 수 없는 세포까지 관찰할 수 있게 해준 현미경 덕분에 생명과학이 움틀 수 있었다. 유리에 굴절된 스펙트럼으로 빛을 분석했고, 전자와 광자와 양자의 세계 속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그뿐인가? 우리가 생각하는 과학 실험실은 온통 유리로 가득 차 있다. 유리로 된 비이커, 실린더, 플라스크, 시험관을 갖추지 않은 실험실은 존재할 수가 없다.

인류의 과학 문명이 얼마나 많은 빚을 유리에 지고 있는지, 떠나보자.

우연과 행운이 빚은 유리의 탄생
많은 혁신들이 노력과 우연, 행운의 결합이듯이 유리 역시 그렇게 발견됐다. 로마의 역사학자 플리니가 쓴 ‘박물지(Nature History)’에 따르면 유리는 기원전 3000년경 페니키아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천연소다를 거래하던 페니키아 상인이 강가 모래톱에서 솥을 걸어놓고 식사 준비하던 중에 천연소다 덩어리가 불에 녹아 모래와 뒤섞이는 일이 벌어졌다. 뜨거운 소다와 모래가 섞이니 투명한 액체 상태의 물질로 변했고 이것이 굳어서 튜명한 유리가 됐다. 모래를 이루는 이산화규소(SiO2)와 천연소다 속 나트륨이 화학반응을 일으켜 유리가 된 것이다.

페니키아의 제조법이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 전해져 소다석회 유리가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이 제조 기술이 세계 각지로 전파됐다.

로마제국 전성기인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4세기 로마가 유리 산업의 중심지가 되는데 다양한 모양과 색깔의 유리 성형 기술이 발전했다. 특히 입으로 불러 원하는 모양을 만드는 블로잉 기법이 크게 발전했다.

우리나라에도 삼국시대에 본격적인 유리 문화가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2000년 초 전북 익산 왕궁리와 미륵사지터에서 발견된 초록색과 보라색의 유리 구슬과 유리를 녹였던 도가니 등을 보면 7세기 무렵 우리도 독자적인 유리 제조 기술을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영어 ‘글래스(glass)’의 어원은 투명하고 빛나는 물질을 지칭하는 라틴어 ‘글래숨(glaesum)’이고 우리가 쓰는 유리(琉璃)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인 ‘바이두랴(Vaidurya)’에서 나왔다. 바이두랴가 라틴어 ‘비트룸(Vitrum)’을 거쳐 한자 벽유리(壁琉璃)로 음역됐고 여기서 유리가 나온 것이다.

유리는 너무 귀한 물건이어서 보물이나 장신구로 주로 사용되었고 성당이나 모스크 같은 종교적 건물의 스테인드글라스로 쓰였다. 색유리를 통해 쏟아지는 다양한 색깔의 햇빛보다 신의 은총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기 때문이다.

유리의 뒷면을 주석 같은 금속으로 막으면 빛이 반사돼 거울로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12세기 이후 유리 거울도 널리 사용됐다. 하지만 유리를 넓고 편편하게 만드는 기술이 발달되지 않아 크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1670년대 프랑스에서 유리를 녹여 금속 테이블에 붓고 롤러로 펴서 냉각시키는 기술을 개발하면서 대형 유리와 대형 거울을 생산할 수 있게 됐다. 프랑스의 이 기술이 집대성된 곳이 베르사이유 궁전의 ‘거울의 방(Hall of mirrors)’이다. 루이14세 즉위 17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거울의 방은 578개 거울로 장식된 17개면의 거울 벽면과 17개의 유리창으로 구성돼 있다.

1248년 완공된 파리의 생 샤펠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유리를 넓고 편편하기 만들 수 있는 기술이 발전하면서 유리는 건축 소재로도 널리 활용되기 시작했다. 1851년 영국은 만국박람회의 전시장으로 쓰일 건물을 세상에 선보이는데 건축가 조지프 팩스턴 경이 하이드파크 내에 철골과 유리로 길이 563m 폭 124m, 축구장 18개 크기의 거대한 온실 같은 건축물을 1년 만에 완성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이것이 크리스탈 팰리스, 바로 수정궁이다. 그 이후 철골과 유리는 도시 건축의 핵심적인 소재가 됐다.
유리 덕분에 ‘관찰’과 ‘실험’이 가능했다
광학이 가장 발전했던 네덜란드에서 망원경이 처음 개발된 것처럼 현미경 역시 네덜란드에서 처음 만들었다. 1590년경 네덜란드의 안경제작자인 자카리아스 얀센은 18인치의 황동관에 볼록렌즈와 오목렌즈를 조합하여 최대 10배율의 현미경을 만들었다.

영국 그레셤칼리지의 기하학 교수이자 물리학자였던 로버트 훅(Rovert Hooke)은 1660년대 현미경을 직접 만들어 이를 관찰에 활용한다. 그가 1665년에 출간한 <마이크로그라피아>가 바로 현미경으로 관찰한 바를 기록한 책이다. 그는 현미경으로 코르크의 세포 구조를 처음 발견했는데 세포의 모양이 수도자의 방을 닮았다고 생각해서 ‘셀(cell)’이라고 이름 붙였다. 물론 그가 관찰한 코르크의 작은 구멍들은 엄밀하게 말하면 현대 생물학에서 말하는 세포가 아니었지만 그는 거기에 세포라는 이름을 붙였고, 19세기 생물학자들이 진짜 세포를 발견했을 때 세포(cell)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

갈릴레이가 망원경을 통해 관찰한 기록을 담은 <별의 메시지>가 우주 전반의 본질에 대해 사람들의 눈을 열어 줬다면 훅의 <마이크로그라피아>는 미시세계에 대해 사람들의 눈을 열어주었다.

네덜란드의 직물상인이자 발명가인 안톤 판 레벤후크(Anthon van Leeuwenhoek)는 단렌즈를 이용하여 275배율의 현미경을 만들어 내는데 이를 통해 그는 당시까지 볼 수 없었던 효모와 혈액 세포는 물론 사람의 정자까지 살필 수 있었다.

훅이 현미경을 통해서 세포만 관찰한 것은 아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빛의 성질에 대한 연구도 시작했고, 이것이 바로 인류 과학사의 일대 사건인 ‘뉴턴 혁명’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뉴턴의 그 유명한 ‘거인의 어깨’라는 표현이 바로 로버트 훅과의 논쟁과정에서 나온 말이다.

훅은 두 개의 유리가 약간 어긋난 각도로 만날 때 색의 고리가 생겨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훅의 실험은 이렇게 진행됐다. 평평한 유리 판위에 볼록렌즈를 올리면 유리가 맞닿은 부분에 쇄기 모양의 공기틈이 생긴다. 이것을 렌즈위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물 위 기름막에서 색색의 소용돌이 무늬가 생겨나는 것처럼 빛이 보인다. 이를 바탕으로 훅은 ‘빛을 향해 빛을 쏘아도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며 ‘빛은 파동’이라고 주장한다.

프리즘 실험을 하는 뉴턴의 모습을 그린 그림
이 이론으로 훅은 아이작 뉴턴과 충돌한다. 뉴턴이 유리로 만든 프리즘실험을 통해 빛은 입자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훅은 자신보다 어린 뉴턴에게 학문적 논쟁의 패배를 인정하면서 이렇게 정중하게 편지를 썼다.

“그 일(빛 연구)에서 당신이 나보다 더 나아갔다고 판단합니다. 그 주제를 들여다볼 사람 중 당신보다 더 어울리고 유능한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당신은 모든 면에서 일찍이 내가 한 연구에 대한 생각을 완성하고 바로잡고 개선할 자격이 있습니다. 내가 맡은 더 골치 아픈 다른 업무만 아니었다면 내 스스로 그렇게 할 계획이었으나 그랬더라도 능력이 당신보다 훨씬 떨어졌을 거라는 점 충분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목적과 나의 목적은 아마도 똑같이 진리의 발견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노골적인 적의를 담고 있지 않는다면 반론을 받아들일 수 있고, 또 실험에서 이끌어 내는 더할 나위 없이 분명한 이성적 추론 앞에 굴복할 마음가짐이 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뉴턴은 이렇게 답장을 보냈다.

“당신은 여러 면에서 많을 것을 더 했는데, 얇은 판(유리와 렌즈가 맞닿은 얇은 공기틈)의 색을 철학적으로 고려했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습니다. 제가 더 멀리 보았다면 거인들의 어걔 위에 올라서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로버트 훅은 1703년 세상을 떠났고,아이작 뉴턴은 그 이름해인 1704년 빛에 관한 대작인 <광학(Opticks)>를 세상에 내놓았다. 훅에 대한 경의의 표현인지, 아니면 승리의 표현인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후대의 과학은 두 사람이 무승부라고 판정했다. 빛은 파동이기도 하고 입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양자역학에서 입증했기 때문이다.

유리가 불러온 전자공학의 시대
“나는 최근에 흥미로운 실험을 했습니다. 실험 결과 원자 안에서 새로운 입자를 찾아냈습니다.”

1897년 4월 30일 조지프 톰슨은 영국왕립학회(Royal Institution)에서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원자를 분리될 수 없는 최소의 단위라고 믿고 있었던 회원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그때는 톰슨의 이 발견이 20세기 전자공학의 시대를 열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톰슨의 발견에 따르면 원자 안에 아주 작고 음극을 띠고 있는 입자(corpuscule)가 존재했다. 새로운 입자는 어떤 종류의 원자보다도 최소한 1,000배 이상 작은 것이었다. 훗날 전자(electron)로 불리게 될 원자의 구성 물질이 발견된 것이었다. 톰슨의 발견은 지금까지는 입증할 수 없었던 원자구조와 전기에 관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전자의 발견은 은하, 항성, 원자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했고, 어떻게 빅뱅의 고온가스가 최종적으로 우리가 되었는지를 화학결합에서의 원자간 전자 교환으로 설명했다. 전자 덕분에 과학자들은 전기회로, 정전기, 배터리, 압전기, 발전기, 트랜지스터의 작동원리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런데 톰슨의 이러한 발견은 유리 진공관의 발명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유리 진공관은 마이클 패러데이에서부터 율리우스 플뤼커(Julius Plücker), 하인리히 가이슬러(Heinrich Geißler), 윌리엄 크룩스(Williams Crookes)의 연구가 이어지면서 완벽해졌다.

물리학자 조지프 존 톰슨이 음극선 실험을 하는 모습
1897년 톰슨은 진공유리관으로 음극선 테스트를 실시했다. 유리관에 두 장의 금속판을 넣고 배터리에 연결하여 전기장을 만드는 실험이었다. 스위치를 켜자 톰슨의 눈앞에서 음극선이 배터리의 양극에 연결된 아래쪽 금속판을 향해 움직였다. 이는 음극선이 음전하를 띤다는 뜻이다. 톰슨은 이를 통해 음극선이 음전하를 띤 작은 입자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추론하고 이를 관찰했다. 이 입자가 바로 전자였다.

톰슨은 그 전에 사실 다른 재료로 전자 실험을 시도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모두 실패했다. 구리를 포함한 모든 금속은 음극선을 흡수해 버리기 때문에 사용할 수 없었다. 나무나 진흙은 진공 상태를 유지할 수 없어서 역시 쓸 수가 없었다.

유리는 진공을 유지하는 데에는 최고의 재료였고 전파를 왜곡하지 않는 매질이었다. 게다가 투명하고 전기가 통하지 않으며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기도 쉬웠다. 무엇보다 유리는 과학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바로 ‘관찰’이었다. 톰슨이 무슨 실험을 했던 유리관을 통해 ‘관찰’할 수 없었다면 전자의 ‘발견’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리의 도시는 유리로 구성됐다
19세기말 자동차가 발명되고 보급되면서 유리에 대한 수요도 급증했다. 안전을 위해서 전후좌우를 모두 볼 수 있게 하려면 유리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유리가 충격에 약할 뿐 아니라 깨지면 위험해진다는 점이었다.

프랑스 과학자였던 에두아르 베네딕투스(Edouard Benedictus)는 어느날 신문에서 자동차 관련 사고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자동차 사고로 인한 부상자들은 대부분 부서진 유리창에 의해 찔리거나 절단되는 상해를 입는다는 것이다. 당시 셀룰로이드를 연구하고 있던 베네딕투스는 잘 깨지지 않는 안전한 유리를 만들겠다는 결심을 하고 연구에 들어갔다.

베네딕투스의 연구에서도 실수와 우연이 결합돼 행운으로 돌아왔다. 어느날 실험실에 고양이 한 마리가 들어왔다. 실험실 곳곳을 휘젓고 다니던 고양이가 선반 위에 있던 플라스크들을 건드려 떨어뜨리고 말았다. 화가 난 베네딕투스는 고양이를 내쫓고 바닥에 널브러진 플라스크를 치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플라스크들이 대부분 박살이 났는데 유독 한 플라스크만 깨지지 않고 금만 간 상태였다. 오래전에 셀룰로이드를 담아 놓고 까먹고 있던 플라스크였다.

유레카! 베데딕투스는 안전 유리에 대한 해법을 바로 포착해냈다. 셀룰로이드를 바르면 유리의 내성이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1909년 깨지지 않는 유리에 대한 특허를 제출한 베네딕투스는 2년 뒤인 1911년 두 장의 유리 사이에 셀룰로이드 막을 끼워 넣은 최초의 안전유리 ‘트리플렉스(Triplex)’를 출시했다.

베데딕투스의 안전유리 ‘트리플렉스’는 자동차 산업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자동차 사고가 나더라도 유리창 파손으로 인한 위험이 크게 줄어들었다. 이뿐 아니라 안전 유리는 건축의 소재로서 유리의 활용도를 더욱 높여주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방탄 유리로 된 차에서 내리는 모습
튼튼한 유리에 대한 연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1913년 코닝 글래스 웍스에 신입연구원으로 입사한 물리학자 제시 탤벗 리틀턴(JT Littleton)은 오븐에 넣은 요리 용기가 쉽게 망가진다는 아내의 투덜거림을 듣는다. 그는 열에 강한 유리를 만들면 오븐 용기로 적합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 코닝사에는 철도의 아크등 용도로 개발한 열에 강하고 잘 깨지지 않는 ‘노넥스 유리’라는 제품이 있었다. 노넥스는 붕소 함유량을 높인 유리 제품이었다.

리틀턴은 회사에 있는 사각의 노넥스 유리를 집에 가져와서 아내에게 주었고 아내는 거기에 맛있는 스폰지 케잌을 구었다.

리틀턴은 열에 강한 내열 유리가 요리 시간을 단축시킬 뿐만 아니라, 효율적인 열전도율로 균일하게 요리가 가능하며, 음식이 눌러 붙거나 냄새가 스며들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리틀턴은 아내가 구운 스폰지 케잌을 동료들에게 나눠주며 노넥스 유리가 주방 용기로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코닝사 경영진은 상품화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바로 개발에 들어갔다. 노넥스 유리에는 납이 포함되기 때문에 배합을 바꾸어 납을 넣지 않은 붕규산 유리를 만들었다. 이 제품을 1915년 ‘파이렉스(Pyrex)’라는 상표로 세상에 내놓았고 이것이 미국 주방의 풍경을 바꾸어 놓았다.

유리가 이어주는 정보통신 네트워크
유리 진공관이 전자공학의 시대를 연 것처럼 정보통신의 시대도 유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바로 유리로 만든 광섬유 덕분이다. 세계의 인터넷 네트워크는 유리로 만든 광케이블로 연결돼 있다.

이 이야기도 미국의 유리기업인 코닝 글래스 웍스에서 시작됐다. 1970년 코닝의 연구진들이 큰 손실 없이 빛을 전송할 수 있는 유리섬유를 개발하면서 광통신 시대를 열었다.

그 이론적 기반은 1960년대 중국계 물리학자인 찰스 카오에 의해 정립됐다. 카오는 광섬유 내 빛의 손실이 유리에 포함된 불순물에 의한 것임을 밝혀내고 손실이 적은 후보 물질로 석영 유리를 제시했다. 카오는 이런 공로로 ‘광통신의 아버지’로 불리며 2009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유리 광섬유는 광 신호를 전달하는 광통신의 핵심 소재이다. 컴퓨터와 같은 기기가 정보를 보내는 경우, 이 데이터는 전기 에너지의 형태로 출발하고 컴퓨터의 레이저가 신호를 광자, 즉 빛으로 변환시켜 광섬유 속 코어를 따라 파동을 통해 이동시킨다.

무선 통신과 클라우드 컴퓨팅이 통신의 세계를 확장하였지만, 음성, 동영상, 데이터 신호 대다수는 여전히 광섬유 네트워크를 통해 전달된다.

세계 해저광케이블 지도
광섬유 소재의 기술 발달로 지금은 1초에 100기가비트 이상 속도로 데이터를 전송할 수 있다. 한 가닥의 광섬유가 최대 1억 건의 고화질 동영상 스트리밍을 동시에 지원한다. 새로운 광섬유 혁신 덕분에 가정에서는 컴퓨터, 운영시스템, 게임 콘솔, 노트북 등을 고속으로 광통신 연결을 할 수 있다.

광섬유가 유리로 만들어져서 약할 것이라는 편견과 달리 인장 강도가 고장력 강철과 티타늄 보다 높다.

모바일이 대세가 되도 광케이블의 역할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늘어났다. 무선통신도 광통신용 광케이블이 설치되어 있지 않으면 무용지물이 된다.

세계의 디지털 데이터의 99%가 해저 광케이블로 유통되기 때문에 광케이블을 둘러싸고 패권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즈(FT)는 지난 6월 “바다 밑에서 ‘신냉전’ 기류가 흐르고 있다”고 보도했다. FT에 따르면, 전 세계 바다 밑에는 450개 이상 140만㎞에 달하는 해저 케이블이 깔려 있다. 전송 가능한 정보량의 측면에서 볼 때, 무선통신보다는 유선통신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것은 이 때문이다.

미국은 일찌감치 해저 케이블의 중요성에 주목하고 중국을 견제했다. 2018년 아마존과 메타(옛 페이스북)는 미 서부 캘리포니아~싱가포르~말레이시아~홍콩을 연결하는 해저 케이블 구축을 위해 중국 국영통신사 차이나모바일과 손잡았다. 하지만 2020년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행정부가 이를 막아섰다. 1만2,000㎞의 케이블이 이미 깔렸는데도 차이나모바일은 컨소시엄에서 결국 탈퇴해야 했고, 결국 해당 사업도 좌초했다. 이 프로젝트 관계자는 “수억 달러가 태평양에 가라앉았다”고 말했다.

물론 중국도 미국에 맞서고 있다. 2015년 개발도상국의 통신·감시·전자상거래 분야에 막대한 투자를 하는 내용의 전략적 이니셔티브를 내놓은 게 대표적이다. ‘일대일로’와 함께 인터넷 케이블 설치를 핵심으로 하는, 일종의 ‘디지털 실크로드’ 전략이었다는 게 FT의 평가다.

21세기는 유리 시대
유엔은 지난 2022년을 ‘국제 유리의 해(International Year of Glass)’로 지정했다. 과학기술의 특정 분야를 기념하는 해를 지속적으로 지정해 온 유엔이 유리라는 특정 물질을 기념하는 해를 지정했다는 점에서 특이했다.

인류는 역사를 특정 소재로 구분해 왔다.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시대로의 역사 구분이 바로 그렇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지금은 ‘유리 시대’로 불러도 될 만큼 우리는 유리에 둘러싸여 있다. 유리로 된 집에 살고 유리로 된 차를 타고 유리로 지어진 회사로 출근한다. 유리로 된 안경을 쓰고 유리섬유를 전달되는 정보를 읽는다. 그뿐인가. 우리는 하루 종일 유리로 된 스마트폰 화면을 만지면서 생활한다.

지금까지 유리가 인류의 문명에 많은 기여를 해왔지만 과학자들은 앞으로 기여할 수 있는 분야도 무궁무진하다고 보고 있다. 그만큼 아직 유리와 관련해서 과학이 밝히지 못한 부분이 남아 있다는 얘기다.

고재현 한림대 반도체·디스플레이스쿨 교수는 “오랜 역사 속에서도 왜 유리라는 물질이 만들어지는지 과학적인 관점에서 아직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며 “과학자들은 현재도 액체가 유리로 변하는 과정을 다양한 방법들로 조사하며 정교한 이론적 체계를 만들고 있으나 유리 상전이 과정의 본질에 대해서는 계속 논쟁 중”이라고 말했다.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필립 앤더슨도 “고체 상태 이론에서 가장 심오하고 가장 흥미로운 미해결 문제는 아마도 유리와 유리 상전이의 본성에 대한 이론일 것”이라 말한 바 있다. 이 문제가 해결되면 우리 앞에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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